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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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남자가 죽고, 그의 생을 반추하는 식의 '소설'이라는 외양. 하지만 저자는 허구적인 이야기는 자기가 쓰고자 하는 글이 아니라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20면)


"그것은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휑해져 버린 얼굴 한가운데 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헐렁하게 느껴지는 진청색 양복에 감싸인 그는 누워 있는 한 마리 새 같았다."(12면)


 외양과 식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삶을 써봐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한 사람의 결심의 단락이 아버지의 죽음 다음에서 시작된거라면, 식마저도 사치일 수 있습니다. ("월요일이 되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 했던 냄새였다. 썩은 물이 고인 화병에 꽂혀 방치된 꽃들이 발하는 은은하면서도 끔찍한 악취였다.":13면) 지나친 사유와 세밀함이 본질을 가리기도 합니다. 모든 글쓰기는 사적인 것일진대 거기서 식을 꾸역꾸역 챙기다보면 볼품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자기 글쓰기의 본령을 일찍이 간파하고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갔습니다.


"좀처럼 독서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 두꺼운 책의 어느 부분에 이르면 아버지는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을 터였다."(122면)


 책을 읽는다거나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을 잊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의 완전한 주의 안에서 산만한 모든 것들은 지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독서와 집필이 버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지연시키지 않고 앞당기는 것만 같습니다.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다른 우선순위들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추락에의 강박적인 즐거움(사회성 안에서 문자적 쾌락은 모두 추락입니다)은 내 정신과 육체의 급소들을 정확하게 투과합니다. 무한한 황홀함과 천재지변같은 공포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늦은 봄날, 활짝 핀 쥐똥나무 꽃의 향기, 11월에 개들이 낭랑하게 짖어 대는 소리, 바깥 날씨가 차가운지 여기까지 들려오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 그래, 아마 그랬으리라, 세상을 이끌고, 지배하고,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래도 이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나요>라고 말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누렸으리라."(84면)




<외울 대목>


"어느 일요일, 열두 살이었던 나는 미사가 끝난 후 아버지와 함께 시청의 커다란 계단을 올라갔다. 우린 시립 도서관의 문을 찾았다. 둘 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난 너무나도 신이 났다. 문 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은 조용했다. 교회보다도 조용했고, 마루는 삐걱거렸으며, 특히 뭔가 오래된 듯한 이상한 냄새가 우릴 감쌌다. 서가에로의 접근을 막은 아주 높직한 카운터에서 두 남자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질문하는 동안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다. 「책을 대출하고 싶어요.」 남자 중 하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어떤 책을 원하죠?」 집에서 우리는 빌리고 싶은 책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제목들을 비스킷 이름을 말하듯 쉽사리 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우리 대신 골라 주었다. 내게는 『콜롱바』를,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모파상이 지은 어떤 가벼운 소설을. 우리는 두 번 다시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그 책들을, 아마 반납 기한이 지난 후에, 반납해야 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125~1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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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제자도 - 정의, 평화, 치유를 위한 기독교적 비전
에마뉘엘 카통골레 & 크리스 라이스 지음, 안종희 옮김 / IVP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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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역의 자판기에서 꺼내 먹는 캔음료수, 에스컬레이터, 전기포트, 대패삼겹살, 당일배송, 급행전철 등. 만족을 위해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절정기의 픽사 스튜디오 작품 중 <Wall-E>가 있습니다. 지구가 쓰레기 천지가 돼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되고, 청소 로봇만 남은 그곳에 월-E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선 액시엄(Axiom) 호를 타고 우주를 표류한 지 700년 가까이 됐습니다. 사랑꾼 월-E는 우여곡절 끝에 액시엄 호에 타게 되고, 얼떨결에 액시엄을 지구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지구청소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다국적기업 BNL은 계획 실행 얼마 후 지구에는 더 이상 회복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액시엄 호에게 영구 표류를 명한 바 있습니다. 700년 전이지요. 700년이 지난 현재, 액시엄 호의 선장은 월-E에게 배달받은 희망과 확신에 들떠 두 발로 일어섭니다. 몇 백년만에 다시 시작된 두족보행! 귀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계획은 700년까지 보지 않습니다. 기껏 10년? 길게 잡아 나 살아 있는 동안까지만이라도 겨우 밑그림 그릴 정도일 것입니다. 머리나 계획, 현실은 물론이고 정보와 전망, 꿈이 아니라 인내가 스스로 희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도정(道程)’이라는 어휘로 꼴 잡습니다. ‘도정’은 평화라는 난제를 등에 짊어지고 화해라는 신기루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는 확신이 인내의 발 뒤꿈치 굳은 살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철학자 윤노빈을 생각했고 故 문익환 목사님을 그리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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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계절 (양장)
폴 투르니에 지음, 박명준 옮김 / 아바서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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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래 전에 우리말 번역본이 있었지만 절판된지 오래고, 이번에 재출간됐다고 들었습니다. 재출간이 꼭 됐어야 할 책입니다. 지금도 늦은 건 아니지만 더 빨랐어도 좋을 책입니다. 이것은 1959년에 폴 투르니에가 독일에서 동명으로 한 강연을 다듬어서 책으로 쓴 것 같습니다. 책의 탄생 이야기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할 뿐입니다. 사람이 기적의 하나님,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물질계의 원리도 하나님의 세계이고, 따라야 할 법칙의 순서로 따지자면 자연계 그 다음이 초자연계입니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을에도 봄날을 맞이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징”이라지만 몸이 겪은 시간에 맞춰 내면도 봄부터 겨울까지 차례대로 가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개방적이지만 현실적 세계관으로 인생의 사계절과 그에 걸맞은 성숙의 척도를 제시하여 보여줍니다.


 식상한 은유가 기적적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글은 시가 됩니다. 『인생의 사계절』은 그런 책입니다. 때로 은유는 지겹습니다. 모자라서 심심하기도 합니다. 적절한 은유는 의외로 만나기 어려운 법인데 이 글은 제가 만난 최고의 ‘자기 계발서’입니다. 자기 계발서라면 질색을 하는 제가 꼭 신앙생활을 해서가 아니라 폴 투르니에야말로 두루 읽어야 할 자기 계발서 저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글을 사이에 두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무의미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남자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마지막 피조물, 여자가 자연의 정점인 것입니다.”(14면)


“인간에 대한 연구가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운 이유는 인간이 두 세계, 즉 자연 세계와 초자연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시에’를 강조하고 싶습니다.”(18면)


“일반적으로 성인은 젊은 날의 이상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성인기의 활동에 필요한 활력은 대개 청년기의 이상에서 나옵니다. 반면, 성공적인 노년기의 삶에 이르는 열쇠는 통합의 길에서 오는 지혜를 얻는 데 있습니다.”(37면)


“하나님은 곧바로 포기하는 이들보다는 그분과 맞붙어 싸우려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50면)


“저는 여러 번의 인생 위기와 부침을 겪으면서 인생의 전반적인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인생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 있으며 맨 처음 가졌던 소망이나 열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65면)


“저는 그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킵니다.”(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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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한길그레이트북스 118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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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웅장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막힘 없이 수긍이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 계속 그 음악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함께 시작한 장엄한 오프닝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자인 아서 C. 클라크가 책에서도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모티프로 삼은 게 맞는지, 큐브릭의 독창적인 번역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 한해서 말한다면 큐브릭이 니체에게 보내는 헌사와 같은 영화라는 것이 8~9년 만에 쓰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후기입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이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인데, 볼프가 니체의 글에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은 기독 서적이 아무리 열린 태도로 나온다 해도 니체를 읽고 여과하는 방법은 편의에 의한 선택 위주였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는데 볼프는 니체의 사유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을 적극 선취하는 동시에 십자가 신학를 선으로 하여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아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니체에게 돌아가 묻고 무언가를 받아오는 식으로 <배제와 포용>을 구성했습니다. “이제 그의 책을 읽어보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라투스트라>)에 붙은 유명한 헌사(?)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에서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러면서도 책은 한 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정되는 동시에 앞에 붙은 조건과 함께 재긍정되는 순간이 도래했고, 그때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야 한다는)예감이 제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뿌리-힘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복음서를 심층적으로 읽어 내면서 예수님의 적들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니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이미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 덕목을 제안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악의 부재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독침을 가진 벌레처럼 “그들은 사람을 쏘되”, 완전히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다. 배제는 ‘악한 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 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91~92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건 4부였습니다. 노년의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은신처인 동굴에서 나와 비명 같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같기도 한 큰 소리를 따라 영내를 돌다가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들(그 전에, 그를 시험하겠다며 오랜만에 찾아온 예언자가 있습니다)과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동굴로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저녁이 돼 동굴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낯선 이들의 축제에 마지막 들어간 사람이 되는데 그곳에서 또 많은 대화와 춤, 기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환멸, 그 속에서 고뇌하는 차라투스트라. 하지만 대단원에 이르러 들리는 가장 추악한 인간의 발언. 그 유명한 발언과 함께 그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시작된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하룻밤을 함께 한 “더 높은 인간들”이 진정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변모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와 같이 변하여 “나의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동굴을 떠납니다, 책의 오프닝에서 그가 예찬한 태양처럼 씩씩하게. 읽기 전엔 이미 완성된 인간인 차라투스트라의 완결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이거니 했는데, 읽어보니 투쟁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4부는 수시로 재독하고 싶은 장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가장 추악한 인간이 말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하루 때문에, 처음으로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살아온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로 증언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지상에서 산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보낸 하루, 한 번의 축제가 나에게 대지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정녕 삶이었던가?’라고 나는 죽음을 향해 말하리라.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들도 나처럼 죽음을 향해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삶이었던가? 차라투스트라를 위하여,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두행숙 옮김, 부북스 판, 480~481면)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어려운 책입니다. 시적으로 활용한 비유가 많기 때문에 이 한권을 한 권 읽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완결된 독서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기본 문서로 잡고 니체의 다른 글들, <차라투스트라>와 가장 가까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같은 철학적 색채가 농후한 저술들을 주석서처럼 참조하며 반복해서 독서하는 것이 니체라는 산을 오르는 정공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색채의 예언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각성한 인식의 피로 한 사람이 쓴 이 책은 “읽을 수 있는” 모든 개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비유하자면 완벽한 심장 같은 책입니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제가 소장한 또 한 권의 니체 저작,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책세상)에 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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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반양장) 부클래식 Boo Classics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두행숙 옮김 / 부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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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첫 독서는 이 책으로! 번역도 무난한 것 같고, 판형이 좋다. 고전은 이래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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