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지음, 고픈 옮김 / 인향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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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많이 말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책 자체에 오래 귀 기울여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성 범죄는 갈수록 보편적이 돼 가는 이 와중에 상처에 대한 귀 기울임은 여전히 논의 발전에서 제 자리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이 궁핍해지고 사회 내의 갈등이 첨예해질수록 듣기의 기술은 간절해집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은 제대로 듣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상처는 당사자에게 개인이 되라는 강요와 같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발언을 다지기 위해 기억의 회로를 돌리는 순간 어쩔 수 없니 내리 꽂히는 트라우마의 그늘을 닦아내고 털어내며 이야기해 나가며 다시 살아내야 합니다. 든는 사람은 그에 맞춰 극진한 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경험자의 '듣기'는 사소해보이지만 상대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화해야 가능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와 내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경험해왔던 사람은 타인의 처참한 과거를 직면해 자연스럽게 거부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듣기'가 참 어려워집니다. 말하지 않는 것, 잊는 것, 억누르는 것을 옳게 여기는 분위기,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는 종교적 권고의 매끈한 설교. 사회는 그렇게 생존자를 보편적 무리 속으로 급하게 재편입시키려 합니다. 
 
 보편성은 이제 냉대가 됩니다. 상처 입은 자는 그 앞에서 '개인'이 돼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싸움입니다. 차이를 강조하고 관용을 성숙의 지표로 삼아 공공연히, 또는 사적인 자리에서 제 자람을 멋내는 어휘로 남발하기 좋아하는 이 세속에서 모든 어휘와 사유는 다시 갱신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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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숙 2023-01-0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진 않았지만 댓글만 읽고도 보편성의 함정에 대해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네요
 

 故 문익환 목사의 호는 늦봄이라 하고 배필이신 박용길 전도사는 봄길이라 한답니다. ‘봄’이라 이름한 거대한 꿈 앞과 뒤에 기다림과 올바름은 수수하면서도 끈질긴 어떤 건강한 낭만을 지시하는 것 같습니다. 김형수 시인이 쓴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의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가독성 좋은 감동적 풀이글로 한 맺음을 해놨습니다. 



 “늦봄! 이것은 그냥 예뻐서 취택된 언어가 아니었다. 그 뒤켠 어디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이 아름다운 어휘를 그는 방패로도 사용했고 이정표로도 사용했다. 방패로 사용될 때는 ‘늦게 봄’이라는 행위언어였지만 이정표로 사용될 때는 ‘늦은 봄’이라는 계절언어였다. 아내의 아호를 ‘봄길’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가 후자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진다.”(51쪽)


 ‘늦봄으로 살(방법)’고 ‘늦봄을 살(목적)’아 온 문익환 목사는 유학지에서 박용길 전도사를 만난 이후 평생에 1천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소설가 김성동 씨는 일찍이 유서 깊은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가 한자 천자로 교본한 <천자문>을 네 글자씩 끊고 여덟 글자씩 묶어 각 문장을 간단하게 풀고 그 밑에 쓴 자기 글 125편으로 책을 엮어 <김성동의 천자문>(청년사)을 냈습니다. 글 각각은 천자문 풀이와 영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한자에 담긴 중화사상이나 가부장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읽기도 하며 생태 문제나 인간성을 상실한 세태에 대한 쓴맛 등 그가 평소 접근하고 주장하던 생각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한 일화 등의 가정사가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어 자진하심으로써 선비의 길을 지키셨던” 증조 할아버지나 “성균진사의 아들이요 외주부사의 손자로 정유년(丁酉年)에 태어나셨던 조선 사람” 할아버지,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고 일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일찍이 숨을 거둔 아버지. 사람이 역사를 바로 알면 시름하게 되고 제대로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 흐르는 꼴은 어둡기만 해, 김성동 씨의 글을 따라 가다보면 가슴이 허덕입니다. 손자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봉생봉이요 용생용이라던 옛사람의 말두 증녕 허언이었더란 말인가.”라며 아버지와 김성동 씨를 비교하곤 했다죠. 하지만 그것이 질투나 수치만으로 풀어낼 단선적인 속사정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더 농도 짙었던 것 아닐까요? “청춘 시절에 이성을 구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김형수)라는데, 김성동 씨가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 어머니에게 보낸 아버지의 연서는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복원하고자 한 마음짓으로 쓴 글 아닐까요?



 “새록새록 그대의게 대한 애착심이 더 깊어질 뿐, 이것이 곳 나의 유일한 생명선인가 하오. 허위만으로 얼킨 부평 같은 인생에 순진한 사랑마니 오즉 아름다웁고 행복될 것으로 밋어요. 물질에서 구하는 행복은 다만 인생의 가치를 저락식힐 뿐이오. 공명으로 인연된 행복도 허영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밋어요. 물질과 영요글 멀니하고,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주고밧으며 정신적으로 유쾌하고 만족한 생애를 누린다면 이것이 가장 슝고한 행복일 것이오. 미물이 안인 사람의 당연한 의무라고 안이할슈 없슬 것이지요. 이러사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곳 자긔마음 여하여 달였슬뿐, 마음을 떠나 구할곳이 업슬줄노 밋어요.”(편지 부분)




 편지 곳곳에 보이는 낯선 표기와 어휘는 다음 책을 언급하기 위한 연결 지점이기도 합니다. 송재학 씨가 가장 최근에 낸 <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은 단단한 시집인지라 제 사유와 언어로 몇 글자 풀어내는 것이 어려운, 고단위의 어휘와 단단한 사색의 시집입니다. 단, 제가 쓸 글 이름만큼은 ‘초록의 소리’라고 얼추 잡아놨지만요. 그 중 한편만 집어 여기서 말하려 하는데, 시집 제목과 동일한 세번째 시편 ‘내간체(內簡體)를 얻다’입니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운문보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유금에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송재학 씨는 내간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년)을 참고로 말 그대로 내간체를 얻은 듯이 이 내밀한 시를 써냈습니다. 옛 아낙들이 문창호 안쪽에서 오글조글 단아하게 써 나간 태의 시인데 다른 시편들을 껴안는 품을 몇 겹으로 안은, 정말 천천히 읽어야 할 시입니다. 그런데 그 품은 ‘늪’입니다. 그 속을 한눈에 꿰뚫기 어려운 초록, 검죽죽하고 걸죽한 초록의 늪으로 들어가는 유동하는 바람과 모래의 물, 그 물의 시입니다. 이로서 독자는 “상처의 안팎으로 들어가는” 시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덧 – 아, 제가 인용한 시의 부분은 사실, 고어와 옛 어투로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 하 자 등을 쓰는 한계가 있어서 시에 뒤이어 쓴 풀이된 현대어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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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구르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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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몇 문단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저 먼 곳에서는 이미 고요해진 정오의 바람이 무테보 호수의 수면을 살랑거리게 했다. 드바노프는 말을 타고 물가로 다가갔다. 어린 시절 그는 여기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시고 살았다. 물은 언젠가 그의 아버지를 깊은 곳에 안식시켰으며, 이제는 드바노프의 마지막 피를 나눈 동지가 좁은 땅속에서 고독한 수십 년이 세월 동안 그를 애타게 그리워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겼는데, 발아래에서 뭔가가 방해를 했다. 드바노프는 아래를 살펴보고는 호숫가에서부터 말의 발에 걸려 딸려 온 낚시 도구를 발견했다. 낚싯바늘에는 바싹 마르고 부서진 작은 물고기 뼈가 걸려 있었다. 드바노프는 이것이 어린 시절 여기 놓아두고 잊어버린 자신의 낚싯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잠잠해진 호수를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였다. 사실 아버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의 뼈와 그의 살아 있던 육체의 물질들과 땀으로 젖은 셔츠 조각, 모든 생명과 우정의 고향 말이다. 그리고 저곳에서는, 어느 날 아버지의 육체에서 아들을 위해 분리되어 나간 그 피의 귀환을 영원한 우정으로 기다리는, 좁고도 더 이상 아무와 헤어지지 않아도 될 장소가 알렉산드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바노프는 프롤레타리아의 힘의 가슴까지 물에 잠기도록 물속으로 들어간 다음 말과 작별을 고하지도 않은 채, 생명을 계속 이어 가면서 말에서 내려 직접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젠가 아버지가 죽음의 호기심 속에서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을 찾아서. 드바노프는 그 잔재가 무덤 속에서 지쳐서 쉬고 있는 약하고 망각된 육체 앞에서, 삶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걸어갔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르는 아직도 파괴되지 않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쉴새 없이 아름다운 문장이 흐르는 소설. 체벤구르의 체푸르니가 공산주의를 도래할 구원으로 기다렸듯이, 많은 독자가 이 소설을 기다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걷고 또 걸으며 이건 아니라고 여기며 속에서 자라는 질문을 수긍하여 뒤섞이며 플라토노프의 이 소설을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완성된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회정치적 공상의 문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의 상식으로 체벤구르의 생활은 그것이 공산주의가 됐든 아니든, 낙원의 그것에 가까운 편이 아닙니다. 분명 깊고 진한 상흔을 남겼지만, 한번의 독서로 그 열기를 정리하고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간추리고 정리해보자면, "인류애를 짊어진 추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한없이 맑고 순진한 정치적 행위는 가장 종교적"일 수 있다는 가정.

 정성일 평론가가 들려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이야기 중 그가 영화로 진로를 정한 계기는 그의 영화처럼 시적이었습니다. 당시 해양탐사를 위해 바다 속에 들어간 타르코프스키는 느린 물의 움직임을 보며 "이것을 카메라도 담고싶"은 영감을 받았고 애초 마음에 없던 영화로 정향을 하게 됩니다. 물의 흐름. 역시 정성일 씨가 밝힌 것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물의 이미지가 주조음을 이루고 있죠. 플라토노프의 이 소설 역시 물의 소설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물의 문장과 추구자의 고뇌가 당신 옆구리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영감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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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구르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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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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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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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후배에게 <백치>를 추천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후배는 열린책들 판으로 책을 샀고, 읽었습니다. 얼마 후 재밌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읽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또 말하더군요, 아직도 다 못 읽고 있다고. 어렵다는 말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분량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그 때 저는 <백치>를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말년의 걸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읽은 후였고 그것 때문에 <백치>를 추천했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내 정신을 마비시킨 위대한 작가의 책을 추천할 때, 안 읽은 책을 추천한 건 베짱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배를 무시했던 건 아닐까요? 내가 읽은 건 소화할 실력은 안될 것 같으니 그보다 부담이 덜한(도대체 뭣 때문에 부담이 덜하다고 생각한 건지) 작품을 읽어보라고 한 걸까요?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저는 작년에 <백치>를 손에 들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미쉬낀과 로고진의 첫 만남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부담 없이 읽어나갔는데, 저도 어느 순간 책을 놓아버렸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이건 대충 기억이 납니다. <죄와 벌>을 고등학생 때 꾸역꾸역 읽고 20대 중반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고 난해함과 지루함에 대한 오해를 모두 풀었습니다. 그리고 <악령>을 읽었죠. 어려웠습니다. 도스도예프끼의 가장 정치적인 소설이었으니까요. 이것은 일종의 소묘인데, 그의 작품 창작시기를 산에 비유하자면 저는 예상보다 빠르게 정상에 올랐고, 산 타는 재미를 만끽했지만 즐거움에 취한 탓에 차분하게 오르지 못했습니다. 힘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내려오면서 봐야 할 다른 진맛들을 훑기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상에서의 도취가 희석돼버린 것이죠. 


 올해 다시, <백치>를 손에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고 말하며 나스따시야를 동정하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미쉬낀 공작은 분명 도스또예프스끼 사상의 구체적인 형상입니다. 그의 숭고함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오해 받습니다.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평생 동안 그를 쫓아다녔던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화합과 이상을 실현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대의 복잡한 삶 속에서 심각하게 드러나는 문제들의 제기”를 동반하는데, “진정한 선과 미와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여건, 니힐리즘의 팽배로 인한 기존 사회 가치의 무용성과 도덕적 타락 등”입니다. 그런 현상과 투쟁하는 작가의 이상 주위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이고 뒤엉킵니다. 


 결론적으로 <백치>는 비극입니다. 공작의 숭고함은 사람들을 어느정도 감화시키는 듯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에 다다르기 전에 그 잎이 시들어버립니다. 깨어짐과 죽음이 끝에 놓여있는 이것은 <악령>과 짝패입니다. 미련함의 비극(악령)과 숭고함의 비극(백치), 이 두 애가의 공통점은 죽음이 뒤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죽음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네 작품은 수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백치>에서 ‘숭고’는 비극의 독을 정화시킵니다. 이 책에서 그런 이미지, 묵직한 이미지를 만나게 됩니다.(예빤친 장군 네 가족과의 대화, 나스따시야의 생일잔치,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슬라브주의 연설, 이뽈리뜨의 꿈 이야기, 아글라야와의 논쟁 후 지쳐있는 나스따시야를 달래고 위로하는 미쉬낀, 나스따시야의 시체를 두고 대화하는 미쉬낀과 로고진


 참고로, ‘백치’는 다른 역어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제목으로만 쓴다면 괜찮겠지만 미쉬낀 공작의 순진한 행동에 분노하는 가브릴라나 로고진이 “백치같으니라구!”할 때의 어감은 상스러운 소리에 가까운데 우리말에서 ‘백치’가 지나온 세월은 그만큼의 강렬함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죠. 차라리 영어 제목처럼 ‘머저리’나 ‘얼간이’가 분위기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배는 이제 <백치>를 다 읽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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