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후배에게 <백치>를 추천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후배는 열린책들 판으로 책을 샀고, 읽었습니다. 얼마 후 재밌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읽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한참이 지나고 또 말하더군요, 아직도 다 못 읽고 있다고. 어렵다는 말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분량 때문이었을까요? 사실, 그 때 저는 <백치>를 읽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말년의 걸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읽은 후였고 그것 때문에 <백치>를 추천했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내 정신을 마비시킨 위대한 작가의 책을 추천할 때, 안 읽은 책을 추천한 건 베짱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배를 무시했던 건 아닐까요? 내가 읽은 건 소화할 실력은 안될 것 같으니 그보다 부담이 덜한(도대체 뭣 때문에 부담이 덜하다고 생각한 건지) 작품을 읽어보라고 한 걸까요? 모두 추측일 뿐입니다.


 저는 작년에 <백치>를 손에 들었습니다. 바르샤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미쉬낀과 로고진의 첫 만남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부담 없이 읽어나갔는데, 저도 어느 순간 책을 놓아버렸습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이건 대충 기억이 납니다. <죄와 벌>을 고등학생 때 꾸역꾸역 읽고 20대 중반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고 난해함과 지루함에 대한 오해를 모두 풀었습니다. 그리고 <악령>을 읽었죠. 어려웠습니다. 도스도예프끼의 가장 정치적인 소설이었으니까요. 이것은 일종의 소묘인데, 그의 작품 창작시기를 산에 비유하자면 저는 예상보다 빠르게 정상에 올랐고, 산 타는 재미를 만끽했지만 즐거움에 취한 탓에 차분하게 오르지 못했습니다. 힘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내려오면서 봐야 할 다른 진맛들을 훑기만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상에서의 도취가 희석돼버린 것이죠. 


 올해 다시, <백치>를 손에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고 말하며 나스따시야를 동정하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미쉬낀 공작은 분명 도스또예프스끼 사상의 구체적인 형상입니다. 그의 숭고함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오해 받습니다.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평생 동안 그를 쫓아다녔던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 화합과 이상을 실현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시대의 복잡한 삶 속에서 심각하게 드러나는 문제들의 제기”를 동반하는데, “진정한 선과 미와 진실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여건, 니힐리즘의 팽배로 인한 기존 사회 가치의 무용성과 도덕적 타락 등”입니다. 그런 현상과 투쟁하는 작가의 이상 주위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이고 뒤엉킵니다. 


 결론적으로 <백치>는 비극입니다. 공작의 숭고함은 사람들을 어느정도 감화시키는 듯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에 다다르기 전에 그 잎이 시들어버립니다. 깨어짐과 죽음이 끝에 놓여있는 이것은 <악령>과 짝패입니다. 미련함의 비극(악령)과 숭고함의 비극(백치), 이 두 애가의 공통점은 죽음이 뒤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죽음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네 작품은 수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네요. 하지만 <백치>에서 ‘숭고’는 비극의 독을 정화시킵니다. 이 책에서 그런 이미지, 묵직한 이미지를 만나게 됩니다.(예빤친 장군 네 가족과의 대화, 나스따시야의 생일잔치, 가톨릭에 대한 비판과 슬라브주의 연설, 이뽈리뜨의 꿈 이야기, 아글라야와의 논쟁 후 지쳐있는 나스따시야를 달래고 위로하는 미쉬낀, 나스따시야의 시체를 두고 대화하는 미쉬낀과 로고진


 참고로, ‘백치’는 다른 역어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요? 제목으로만 쓴다면 괜찮겠지만 미쉬낀 공작의 순진한 행동에 분노하는 가브릴라나 로고진이 “백치같으니라구!”할 때의 어감은 상스러운 소리에 가까운데 우리말에서 ‘백치’가 지나온 세월은 그만큼의 강렬함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죠. 차라리 영어 제목처럼 ‘머저리’나 ‘얼간이’가 분위기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후배는 이제 <백치>를 다 읽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