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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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마텔의 동명의 원작을 영화화 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의 14번째 작품입니다. 이안 감독의 세계에서 장르 간의 벽은 상당히 낮습니다. 그는 장인적 경지에서 예술적 성취를 해내는 감독으로 정평나 있고, <헐크>를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호응을 끌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선 3D 기술에 힘입어 장인적 솜씨는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는 이 작품을 IMAX 3D로 봤습니다. 영화의 태초가 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한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의 원초적 책임을 완벽하게 실현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가 영화라는 마술의 기원에 바치는 경외라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기원을 현재화시킨 충실한 계승입니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원예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릴 때부터 다양한 종교 안에 내재한 신의 풍요로움에 심취했던 남자 피신. 그는 어려워진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한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키우던 동물들과 가족을 태운 일본 회사 소유의 배에 오릅니다. 폭풍을 만난 배는 난파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그뿐입니다. 구명보트에는 그 외에도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있습니다. 며칠이 안 돼 피신과 리차드 파커만 남고 모두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오랜 여정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제가 언젠가 <서칭 포 슈가맨>을 말하며 원작 <파이 이야기> 서문에 쓰인 "신을 믿게 될 겁니다."를 인용했었는데, 서문만 읽고 영화를 보고난 지금 보니 그 말은 쉽게 인용하고 말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작품의 끝에 가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차분하고 마법적인 이미지의 여운 때문에 피신이 밝히는 또 하나의 진실(의 가능성)의 충격은 크지 않지만 곰곰히 생각해볼 만 합니다. 


 덧-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故 김 현 씨가 번역한 <어린왕자>를 몇 장 읽고 나왔습니다. 문득, 이안 감독이 <어린왕자>를 영화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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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특별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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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실패하며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는 나로호 발사 준비가 정부 입장에서야 별스럽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드렁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 저는 국가 간 경쟁에 냉소적이기도 하거니와 저 광막한 공간에 무언가를 쏘아 올린다는 것의 의미가 그다지 범우주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도 봅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는 그것이 한낱 치졸한 경쟁심리로 불 붙는 것이라고 해도 모두가 눈 여겨 봐야 하며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화학과 물리학 등으로 원리를 조밀하게 펴 보일 때는 두 줄도 집중하기가 힘들더군요. 하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 지식을 쥐어짜내며 저자의 글발을 따라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밤하늘을 봐도 별 하나 보기가 힘들만큼 내 눈은 어둡지만 항상 그 자리에 드리우고 있던 허공을 이제는 경이로 보게 됩니다. 탄소 원자에서 시작된 우연의 음악이 수백 억년을 흘러와 존재의 신비를 연주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언어로 직조된 한 뭉치의 정보일 뿐인데도 그 어떤 노작의 예술품 못지않게 감동입니다.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과학 정신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지와 악덕에 대한 탄식을 드러내며 윤리적인 답변들까지 제공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비겁함의 소유자”들이 “1,000년이나 지속된 암흑 시대라는 혼수상태”를 만들고 “인구가 100만이나 되던 고도의 문명 사회를 지구상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런 역사 위에서 우리는 두세 걸음이 아니라 10보, 100보 후퇴했다 한두 발 앞으로 나아가곤 했습니다. 저자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 강조하고 아름답게 논해 보이지만 거기에만 매여 지구 상의 문제를 등한시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 인류는 지적 생물과의 교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와 같이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지적 생물과의 교신부터 먼저 진지하게 시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일갈합니다. 아래와 같은 통찰은 과학 정신이 올바로 서 있을 때, 가장 윤리적이고 지혜롭다는 점을 확증합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과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보급판, 620~621쪽)

 이쯤 되면 우주적 정신의 핵은 ‘관용’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20세기에 관용에 몰두했던 문필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작(이자 미완성)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뭉테뉴>(안인희 옮김, 유유)서 아무 구절이나 끄집어내 대조해보면 교학상장하여 한 길로 이어지는 지성의 흐느낌과 가느다란 희망이 좀 더 밝게 타오르는 것을 볼 것입니다.

“우리 삶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고 풍부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 우리의 평화, 독립, 타고난 권리 등 이 광신도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겨우 열 명 남짓한 인간들의 광증에 제물로 바쳐진 시대에, 시대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든 문제는 단 한 가지로 집중된다. 곧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온갖 위협과 위험에 맞서, 서로 다투는 당파들의 광기 어린 분노 한가운데서 어떻게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이런 야만성 한가운데서 어떻게 마음 속 휴머니즘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32쪽)

 
  - <위로하는 정신>. 츠바이크의 문장력은 여전하고 재미도 있지만, 분량 상 김이 새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차라리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아롬미디어)이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바오)를 추천합니다. 아! <코스모스>와 함께라면 <광기와 우연의 역사>(휴머니스트)를 병행하여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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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마가리타 테레코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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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했던 것보다 지루하진 않았지만(아마 그건 상대적으로 짧은-1시간 30분 남짓-러닝 타임 때문일 것입니다) 예상 못했던 만큼 무서웠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볼 때도 종종 느꼈던 바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에는 좀 무섭고 섬찟한 구석이 있습니다. 엄마가 외출을 하고 집에 혼자 남은 아들이 갑자기 나타난 중년의 여자(검은 옷을 입고 표정은 무뚝뚝하며 말투는 차갑습니다)가 차를 마시며 아이에게 글을 읽으라고 합니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음산한(한낮이고 조명은 충분한데도) 실내와 쇠를 긁는 듯한 배경음 아래서 화면은 살짝 일그러져 보입니다. 아이는 푸쉬킨의 글을 읽는데,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아이가 나가보니 또 다른 여자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 안. 검은 옷의 여자는 사라져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그려내는 이 무의식적인 공포의 회화들은 제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한 축인 것 같습니다. 다만 넘어서야 할 축이기도 합니다. 
 
 17인치 컴퓨터 모니터로 첫 감상을 한 후 약 2주가 지났는데, 저는 이 작품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어 번 더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그 '두어 번'이 '또 두어 번'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죠? 다만 이 후에는 좀 제대로 준비해서 Camera Obscura(어두운 방) 안에서 이 무의식의 영화를 정직하고 차분하게 보고싶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세계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거울>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난해하고 사적인 작품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독의 무의식을 깊이 들여다보는 가운데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 '나의 어린시절', '아버지의 어린시절', '지금과 내 유년시절의 어머니'를 굴대로 삼아 모자이크처럼 흩어지고 모이는 영상시 <거울>은 극단적으로 사적이기에 공적인 작품이 됩니다. <봉인된 시간>에 썼듯이 <거울>은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호응과 상찬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타르코프스키의 비석 앞에 꽃 한 송이 아니면(디아스포라 유태인들이 하듯이) 돌멩이 하나 내려놓으며 "<거울>, 잘 받습니다, 고맙습니다."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어두운 시대에 제가 그려볼 수 있는 희망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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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마가리타 테레코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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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세계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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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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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모이어스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과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나온 책입니다. 번역은 이윤기, 소설가로 데뷔했지만 대중적으로는 번역이 그의 유명세의 밑받침을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책을 번역했지만 소설(카잔차키스, 움베르토 에코 등)과 신화(캠벨, 융 등)관련 서적 번역이 그의 대표작들이죠. 제가 10대일 때 선풍적 인기였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이윤기 씨를 설명할 때 가장 앞 자리에 놓일 책일 것입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 중 하나라는 게 과거 인기의 방증이기도 하죠.
 
 이제는 고인이지만 그는 성실하고 철학을 가진 번역가였죠. 그는 당시 신화(학)에 대해 무지하고 매정했던 국내 독서계에 캠벨을 필두로 한 신화학 서적을 번역해 알린 1등 공신이기도 합니다. 신화(학)과 종교(학)에 기질적으로 깊이 끌리는 저로선 이윤기 씨에게 큰 빚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번역이나 창작 모두, 이윤기 씨의 언어가 저와 궁합이 잘 맞는 편은 아닙니다. 열린책들 판으로 나온 고인 번역의 <인간과 상징>(C.G.융)과 마찬가지였는데, 어려운 글이 아님에도 텍스트의 왜벽을 넘어서 그 안으로 들어서기가 은근히 그리고 끈질기게 고됐습니다. 번역의 연장선에서만 볼 때, 적어도 저는 그를 故 함석헌 옹과 대조하게 됩니다. 번역자의 개성이 뚜렷하다는 데서 두 어른은 참으로 닮았지만 함석헌의 번역을 읽을 때는 시간과 비례하여 그 특유의 어휘와 배열을 애호하게 됩니다. 결국 독자 개인차일 뿐이죠. 그럼에도 이윤기 씨는 제가 배우고 싶은 저자의 책과 두루 연결된 고마운 분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 덕을 충분히 보려면 제가 읽기의 촉수를 좀 더 세밀하게 나눌 필요가 있겠다 싶네요. 그래서 기회를 만들어 얼마 전 재판된 <하늘의 문>(열린책들)을 읽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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