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제자도 - 정의, 평화, 치유를 위한 기독교적 비전
에마뉘엘 카통골레 & 크리스 라이스 지음, 안종희 옮김 / IVP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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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역의 자판기에서 꺼내 먹는 캔음료수, 에스컬레이터, 전기포트, 대패삼겹살, 당일배송, 급행전철 등. 만족을 위해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습니다. 절정기의 픽사 스튜디오 작품 중 <Wall-E>가 있습니다. 지구가 쓰레기 천지가 돼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되고, 청소 로봇만 남은 그곳에 월-E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선 액시엄(Axiom) 호를 타고 우주를 표류한 지 700년 가까이 됐습니다. 사랑꾼 월-E는 우여곡절 끝에 액시엄 호에 타게 되고, 얼떨결에 액시엄을 지구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지구청소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다국적기업 BNL은 계획 실행 얼마 후 지구에는 더 이상 회복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액시엄 호에게 영구 표류를 명한 바 있습니다. 700년 전이지요. 700년이 지난 현재, 액시엄 호의 선장은 월-E에게 배달받은 희망과 확신에 들떠 두 발로 일어섭니다. 몇 백년만에 다시 시작된 두족보행! 귀향을 위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계획은 700년까지 보지 않습니다. 기껏 10년? 길게 잡아 나 살아 있는 동안까지만이라도 겨우 밑그림 그릴 정도일 것입니다. 머리나 계획, 현실은 물론이고 정보와 전망, 꿈이 아니라 인내가 스스로 희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도정(道程)’이라는 어휘로 꼴 잡습니다. ‘도정’은 평화라는 난제를 등에 짊어지고 화해라는 신기루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는 확신이 인내의 발 뒤꿈치 굳은 살이 되는 일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철학자 윤노빈을 생각했고 故 문익환 목사님을 그리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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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계절 (양장)
폴 투르니에 지음, 박명준 옮김 / 아바서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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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래 전에 우리말 번역본이 있었지만 절판된지 오래고, 이번에 재출간됐다고 들었습니다. 재출간이 꼭 됐어야 할 책입니다. 지금도 늦은 건 아니지만 더 빨랐어도 좋을 책입니다. 이것은 1959년에 폴 투르니에가 독일에서 동명으로 한 강연을 다듬어서 책으로 쓴 것 같습니다. 책의 탄생 이야기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할 뿐입니다. 사람이 기적의 하나님,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물질계의 원리도 하나님의 세계이고, 따라야 할 법칙의 순서로 따지자면 자연계 그 다음이 초자연계입니다. 시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을에도 봄날을 맞이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징”이라지만 몸이 겪은 시간에 맞춰 내면도 봄부터 겨울까지 차례대로 가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개방적이지만 현실적 세계관으로 인생의 사계절과 그에 걸맞은 성숙의 척도를 제시하여 보여줍니다.


 식상한 은유가 기적적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글은 시가 됩니다. 『인생의 사계절』은 그런 책입니다. 때로 은유는 지겹습니다. 모자라서 심심하기도 합니다. 적절한 은유는 의외로 만나기 어려운 법인데 이 글은 제가 만난 최고의 ‘자기 계발서’입니다. 자기 계발서라면 질색을 하는 제가 꼭 신앙생활을 해서가 아니라 폴 투르니에야말로 두루 읽어야 할 자기 계발서 저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글을 사이에 두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무의미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남자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마지막 피조물, 여자가 자연의 정점인 것입니다.”(14면)


“인간에 대한 연구가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까다로운 이유는 인간이 두 세계, 즉 자연 세계와 초자연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시에’를 강조하고 싶습니다.”(18면)


“일반적으로 성인은 젊은 날의 이상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사실 성인기의 활동에 필요한 활력은 대개 청년기의 이상에서 나옵니다. 반면, 성공적인 노년기의 삶에 이르는 열쇠는 통합의 길에서 오는 지혜를 얻는 데 있습니다.”(37면)


“하나님은 곧바로 포기하는 이들보다는 그분과 맞붙어 싸우려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50면)


“저는 여러 번의 인생 위기와 부침을 겪으면서 인생의 전반적인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인생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 있으며 맨 처음 가졌던 소망이나 열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65면)


“저는 그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킵니다.”(6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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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한길그레이트북스 118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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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 웅장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막힘 없이 수긍이 되더군요. 이 책을 다 읽어갈 때쯤 계속 그 음악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함께 시작한 장엄한 오프닝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화의 원작자인 아서 C. 클라크가 책에서도 “동일자의 영원회귀”를 모티프로 삼은 게 맞는지, 큐브릭의 독창적인 번역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영화에 한해서 말한다면 큐브릭이 니체에게 보내는 헌사와 같은 영화라는 것이 8~9년 만에 쓰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후기입니다.


 올해 처음 읽은 책이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인데, 볼프가 니체의 글에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은 기독 서적이 아무리 열린 태도로 나온다 해도 니체를 읽고 여과하는 방법은 편의에 의한 선택 위주였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는데 볼프는 니체의 사유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들을 적극 선취하는 동시에 십자가 신학를 선으로 하여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아는 것 같았고 그러면서도 꾸준히 니체에게 돌아가 묻고 무언가를 받아오는 식으로 <배제와 포용>을 구성했습니다. “이제 그의 책을 읽어보라”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저는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짜라투스트라>)에 붙은 유명한 헌사(?)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에서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러면서도 책은 한 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정되는 동시에 앞에 붙은 조건과 함께 재긍정되는 순간이 도래했고, 그때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야 한다는)예감이 제가 이 책을 다시 들게 된 뿌리-힘이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복음서를 심층적으로 읽어 내면서 예수님의 적들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와 그분을 죽이고자 하는 태도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니체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이미 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안적 덕목을 제안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악의 부재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독침을 가진 벌레처럼 “그들은 사람을 쏘되”, 완전히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다. 배제는 ‘악한 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 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ivp, 91~92면)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건 4부였습니다. 노년의 차라투스트라가 그의 은신처인 동굴에서 나와 비명 같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같기도 한 큰 소리를 따라 영내를 돌다가 만난 다양한 인간 군상들(그 전에, 그를 시험하겠다며 오랜만에 찾아온 예언자가 있습니다)과 대화를 나누고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동굴로 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저녁이 돼 동굴로 돌아간 차라투스트라가 낯선 이들의 축제에 마지막 들어간 사람이 되는데 그곳에서 또 많은 대화와 춤, 기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환멸, 그 속에서 고뇌하는 차라투스트라. 하지만 대단원에 이르러 들리는 가장 추악한 인간의 발언. 그 유명한 발언과 함께 그들은 모두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시작된 아침. 차라투스트라는 하룻밤을 함께 한 “더 높은 인간들”이 진정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변모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와 같이 변하여 “나의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있다”고 말한 뒤 자신의 동굴을 떠납니다, 책의 오프닝에서 그가 예찬한 태양처럼 씩씩하게. 읽기 전엔 이미 완성된 인간인 차라투스트라의 완결된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책이거니 했는데, 읽어보니 투쟁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4부는 수시로 재독하고 싶은 장입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가장 추악한 인간이 말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하루 때문에, 처음으로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살아온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로 증언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지상에서 산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차라투스트라와 함께 보낸 하루, 한 번의 축제가 나에게 대지를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정녕 삶이었던가?’라고 나는 죽음을 향해 말하리라.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들도 나처럼 죽음을 향해 말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삶이었던가? 차라투스트라를 위하여, 좋다! 다시 한 번!’이라고.”」 
(두행숙 옮김, 부북스 판, 480~481면)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어려운 책입니다. 시적으로 활용한 비유가 많기 때문에 이 한권을 한 권 읽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완결된 독서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을 기본 문서로 잡고 니체의 다른 글들, <차라투스트라>와 가장 가까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같은 철학적 색채가 농후한 저술들을 주석서처럼 참조하며 반복해서 독서하는 것이 니체라는 산을 오르는 정공법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색채의 예언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각성한 인식의 피로 한 사람이 쓴 이 책은 “읽을 수 있는” 모든 개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비유하자면 완벽한 심장 같은 책입니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제가 소장한 또 한 권의 니체 저작,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책세상)에 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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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반양장) 부클래식 Boo Classics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두행숙 옮김 / 부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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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 첫 독서는 이 책으로! 번역도 무난한 것 같고, 판형이 좋다. 고전은 이래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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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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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을 추종하지는 않았다”(<단편 선집> 중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이 책은 W.K.C. 거스리 교수가 비전공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안을 토대로 쓴 책입니다. 부제는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인데, 이오니아 학파 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에서 시작한 고대 희랍 나아가 유럽 철학의 흐름은 크게 두가지로 양분됩니다. “한편으로 전체로서의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행위를 다”루는 물줄기인데,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의 본질과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과학이기도 했죠. 그리고 소피스테스들과 소크라테스에 와서 “자연의 고찰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철학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인간의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거스리 교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하게 고대 희랍 철학을 분류한 뒤 독자들이 알아야 할 고갱이를 콕콕 집어줍니다. 아쉬운 것은 번역입니다. 오역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술술 읽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역자의 능력이 직관적으로 읽히지가 않아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할 문장들이 곳곳 눈에 뜨입니다. 그럼에도 재독 삼독을 해야 할 알찬 책입니다. 한 번 정독했다면 다음부터는 플라톤과 아리스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은 물론이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이하 <단편 선집>)같은 원전을 옆에 두고 행간을 살피며 읽으면 좋은 공부가 될 책입니다.

 저는 한때, <단편 선집>을 정독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읽을 책이 아닌데도 어느 인상적인 표현대로라면 “독서량이라는 근대 이후의 패러다임에 갇혀” 정독하여 완독하겠다는 쓸데없는 목표를 세워놨기 때문이었습니다. <단편 선집>은 사전처럼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 철학 입문>을 읽고 사전적인 관심으로 <단편 선집>의 파르메니데스 편을 골라 읽었습니다. 

 헬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단순한 이오니아적인 우주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하나이다(hen panta einai)’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 지혜롭다.”(<단편선집>)라고 했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diapheromenon)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homologeei)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palintropos harmonie)이다” (<단편선집>)라고 했습니다. 생명과 사고를 물질적인 원질(물, 불, 흙 등)의 틀 속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명과 사고는 얼마 가지 않아 곧 그 틀을 깨뜨리게끔 되어 있었던 게 분명”(69)했습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의 과업이었습니다.

 “그는 헬라클레이토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어서는 운동과 변화만이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는 운동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실재(實在) 전체가 하나의 단일하고 부동 ∙ 불변인 실체로 이루어졌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의 사고가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습니다. “이 사상가의 힘과 한계는 똑같이 희랍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계를 형성했습니다.”(70) “파르메니데스의 중요성은 그가 희랍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추상적인 사유의 길을 걸어가게끔 했으며, 지성으로 하여금 외계의 사실과 관계없이 활동하도록 했고, 또한 지성의 활동 결과를 감각적 지각의 활동 결과보다도 격을 높였다는 점입니다.”(73)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희생시키고서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을 높인 최초의 철학자”(74)였습니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말하기를 이오니아적 뿌리를 떠나 현실인 물질계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 고대 희랍 철학의 추상성이라는 조급함을 세계사의 비극이라고 하더군요. 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쓴 칼 포퍼 같은 경우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파르메니데스를 주제로 중요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지금에 와서도 마르지 않는 분수령인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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