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11일
한유주와 윤성희의 단편 몇 개를 읽었어요.
[오늘의 문제소설]에 실린 윤성희의 [재채기]를 정신없다고, 중구난방이라고 나 혼자(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퇴박을 놓았었죠. 그랬다가 왜 문제소설로 선정했을까 하는 의구심에 다시 읽어보았어요. 뭔가 보이는 것이 느껴졌어요.
작년에 본 적이 있는 윤성희의 다른 작품, [저 너머](작가세계, 2005 겨울)를 다시 읽었어요.
알 것 같아요. 매력있어요.
윤성희의 작품 매력은 속도감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고공묘사법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그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주 높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묘사를 하면, 아주 멀리까지 한 눈에 보면서 묘사를 한다면.... 공간이 아닌 시간에도 적용시켜서, 과거와 더 과거와 그보다 더 과거를 한 눈에 보면서 서술한다면....
예를 들어서 [더티 와이프]를 보자면 현미경을 들이대고 묘사하는 것처럼 아주 촘촘한 글쓰기가 있죠.
윤성희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어떤 곳을 기준으로 점차 확대하면서 서술하지 않지요. 여기를 그리는가 싶으면 벌써 저기를 갖다 눈 앞에 툭 놓죠. 지금을 말하는가 싶을때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단 몇줄로 슬쩍 말하고 다시 몇 년을 휙 뛰어넘는 식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큰 미덕. 유머. [재채기]에서 한 번의 실수를 갚기 위해서(자신이 용서가 안 되어서) 속세를 떠나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감상적인가요? 그러나 윤성희는 가볍고 가볍게 유머로 버무려서 그것을 극복해버리네요.
한유주의 단편도 매력 있어요. 그 매력의 원인이 뭘까? 새로움때문에?
[그리고 음악]을 보면 서두부터 '거짓말이다'라고 하고, 독자가 잊을까봐 계속 거짓말이다,를 반복하죠. 세어봤더니 열 세번입디다.
그 외에도, '아마도'라는 말과 '이것이 나의 야만이다'가 네 번씩 도드라지게 씌여있죠.
이렇게 강조하는데 그냥 보면 안 되지. 잘 봐. 이것은 야만이야,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주인공이랄 수 있는 '환영'의 이름과 묘한 조응을 하는 것 같아요. '환영'이라는 단어는 이름도 될 수 있지만, 상상속의 가공인물이라는 느낌도 오거든요. 결국은 환영이고 거짓말이라는 거 아닐까.
한유주의 글들은 서사를 거부하고 상징으로 채워져있죠.
글을 읽다보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덧 둥둥 떠오릅니다. 시간으로부터, 공간으로 부터 떠 오르죠. 아득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부유하게 되요.
그것은 좀 슬프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어요.
윤성희와 한유주를 한데 묶어서 매력있다고 하면, 그것이 지나치게 거칠고 폭력적인 단언이기는 해요.
그렇지만 저는 그 둘에게서 같은 종류의 기쁨을 느꼈어요.
시를 쓰면서 아마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소설 쓰기는(말하자면 시쓰기에 비해서) 어쩐지 작위적이고 의뭉스런 행위 아닌가.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넘기는(살고 있는) 어떤 것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 같았고, 소설은 몰래 기초공사하면서(구성따위) 잘 짜맞추어 완성한 후 시침떼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소설가는 소설가일 뿐 소설인이 아니지. 시는 가슴으로 쓰지만 소설은 머리로 쓰느거 아닌가. 시인은 시가라고 하지 않지. 뭐 그런 종류의 생각들이었죠.
한유주와 윤성희의 글은 이런 저의 생각들의 맥락에서 본다면 확실히 '의뭉스런 짜맞추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훨씬 더 '노회한 짜맞추기'죠.
당분간 더 윤성희와 한유주에게서 머물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