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4일




미시마 유끼오 [우국]을 읽는데 머리속에 가미가재특공대도 생각나고 다자이 오사무도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도 내내 그 생각들이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들을 검색해보니(네이버에 경의를!!) 다자이 오사무보다 미시마 유끼오가 이십여년 후에 출생했다.
그 반대로 생각했는데.

여러가지로 미시마의 [우국]과 오사무 [인간실격]은 비교가 된다.

[우국]에서 칼로 활복하여 내장을 쏟아내며 죽는 죽음의 방법이 있다면 [인간실격]에서는 물에 빠져서 죽는 방법이 나온다. 

[우국]의 주인공 삶은 이념을 숭상한 삶이었지만 [인간실격]은 이념적인 운동에 참가한 적도 있지만 '멋도 모르고 그냥'했다며 자신의 행동을 폄하하는 이가 주인공이다. 

[우국]이 이쁘고 다소곳하며 절대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된 삶을 사는 여성이 나온다면 [인간실격]에는 초라한, 그리고 비참한 여성이 나오며 여성은 남성을 부양한다.

그리고 공통점은 두 작가 모두 작품 속에 등장한 죽음의 방법을 택해서 자살했다는 점.




그런데 생각은 또 꼬리를 물고, 이상이 오사무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알아보니(네이버여 영원하라) 이상과 오사무는 한 살 차이.

이상이 십년 정도 먼저 죽었고.

날개가 씌어진 해와 인간실격이 씌어진 해를 비교해보고 싶다.

그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면 재미있는 논문이 나오겠다 싶기도 하고.

하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누군가 이미 그런 분석 쯤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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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훌리아아주머니와 결혼했다」라는 긴 제목의 이 책에 대해서 말하려고 든다면 너무 많은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요사의 자전적인 이 소설은 형식면에서도 기발하고 재미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다 떠나서 한 가지 생각에 몰려있다. 어쩌면 그 생각은 이 작품을 읽어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어도 이 생각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생각이다.







주인공 나는 열여덟에 열네 살 연상의 이혼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미성년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악전고투하는지 알게 된다. 그의 결혼관과 문학관, 그리고 사랑에 대한 맹세. 책 두 권 분량은 그의 결혼난관극복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 사이사이에 드라마를 요약한 것처럼 스토리들이 하나씩 들어있다).







              [훌리아와의 결혼생활은 참으로 행복했고, 모든 친척들과 그녀 자신이 염려했거나 원했거나 예견했던 것보다 좀 더 오래, 그러니까 팔 년 동안 지속되었다. ]







가장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물론 읽던 나는 발끈한다. ‘팔 년 동안 지속되었다’라고 썼지만 뭐라고 해도 그 문장은 ‘팔 년 동안이나...’라고 읽힌다. 뭐라고? 고작 팔 년 지속을 위해서 그런 요란을 떨었단 말이야? 나는 내 발끈한 화를 삭혀줄 이별의 원인을 기대한다. 사랑을 믿었으나 이래저래해서 어쩔 수 없었다, 라는 최소한의 변명은 있겠지, 좋아, 변명해봐, 조롱해 주겠어. 물론 그는 변명하지 않고 그걸로 끝이다. 그게 끝인 것이다. 사랑이 끝났는데 무슨 더 할 말이 있으랴. 그의 새로운 여인은 훌리아의 조카다. 훌리아가 그 후로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라고 나는 아까 썼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이든 이별이든 꿈이든 야망이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영원이라 믿었던 사랑이 팔 년(‘고작’이던 ‘이나’던)으로 끝을 맺더라도 처음 사랑이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사랑은 뜨거웠었고 그 다음은 사라졌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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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 3

기본정보 모험,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 미국 | 124| 개봉 2006.05.03


감독 J.J. 에이브람스
출연 톰 크루즈(에단 헌트)... 더보기

 

  

2006년 5월 21일 
 

그리하여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이든과 줄리엣은 뜨거운 포옹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벅찼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그 후를 본다.

 

세월이 흘러흘러, 그들의 사랑은 여전했으나 조그만 문제로 다툼의 나날이 이어졌다.

작전에 함께 참가했던 동료는 이든의 실수로 죽고, 물론 이든은 그 잘생긴 얼굴을 구기며 무지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면 뭐하나, 한 번 죽은 이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든은 죄책감 때문에 동료(그냥 빌이라고 하자), 빌의 아내(수잔이라고 하자) 수잔을 돌보아준다. 전혀 이상한 감정이 없다고 누누이 밝혀도 줄리엣은 쌍심지를 돋구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 사랑스럽던 줄리엣이었지만 이든은 너무 피곤하다. 그들은 그 일로 대판 크게 싸우고, 서로의 험악한 행동에 놀라서, 어떻게 그대가 이럴 수가, 하다가 뜨겁게 포옹하고 다시는 서로를 오해하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화해한다.

화해한 후 불과 한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전격 이혼한다. 이혼 사유는 뭐, 알것 없다. 다만 이든은 수잔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고 밝혀 둔다.

 

총알을 겨눈 상황에서는 죽음도 불사할 것 같은 사랑도 사소한 불화속에 서서히 부식되어 녹아버렸다.

 

헤헤. 심술 때문에 이런 황당한 예견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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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의 행방불명.  

감독 신재인  

출연 조현식, 예수정, 문슬예, 우준영 더보기 
   


신성일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라면서 이 글을 클릭했다면, 나와 같은 전철을 밟는 거다. 고3(씩이나)이 된 딸이 갑자기(자기는 갑자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별렀다지만)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그 영화 제목이 바로 [신성일의 행방불명]이다. 요즘 잊혀져가는 원로배우 신성일이 등장하는 무슨 영환가 싶었다. 신성일은 물론이고 엄앵란도 안나온다.

 

이렇게 이 영화는 제목부터 뒷통수를 때리며 나를 끌어들였다.

주님의 뜻에 따라 천사들을 돌본다는 원장의 말도 이중적인 생활로 관객의 믿음을 뒤집어버린다. 원장은 식탐은 죄라는 인식을 고아들에게 세뇌시켰고 아이들은 먹지 않는(고로 싸지 않는) 주님을 닮기 위해 배고픔을 부끄러워하고 인정하지 않으려하며 고통스럽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해결한다. 침대 밑이나 버려진 냉장고 속이나 재래식 화장실에서.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해결해야하는 싸는 행위와 다름없다는 인식이 심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슬쩍 해치우는 주식은 '초코파이'하나와 '우유'한 팩. '초코파이'는 그동안 광고에서 '정'을 내세웠고, 영화 '집으로'에서도 '정'이라는 이미지가 잡힌 빵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아이러니다. 그토록 금기시하는 '먹는 행위'를 원장이 몰래 하는 것은 물론이다. 안 먹고 어찌 살 수있나. 근엄하고, 따뜻하며, 폭력도 쓰지 않는, 늘 인자한 원장. 영화가 진행되면서 진정한 따뜻함과 진정한 폭력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또 특기할 점은 유머와 익살이다. 영화가 시작하자 난데없이 목소리가 등장해서 '이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오마주도 아니고...'라고 일러주질 않나, 잊었던듯 얼른 음악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가져왔다고 덧붙이지를 않나. 이런 생소한 장치들이 기존의 영화 상식을 뒤엎었다. 전혀 원래의 이름과 닮지 않은(오히려 그 반대의 이미지인) 신성일이나 김갑수,이영애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나오는 자막처리도 웃음이 나온다. 예를 들면 '신성일의 배(주린)에서 천둥치는 소리'같은.

 

한 번도 먹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들은 영화속의 아이들이 불쌍할 따름이지만 바로 이어서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들이 '수치스러운 일'이나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분류하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왔던 것에 대해. 그동안 철썩같이 믿었던 인식들이 잘못된 인식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고아원의 체제를 경험하지 않은, 새로온 고아 이영애는 공개된 장소에서 밥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서 원생들을 당혹하고 수치스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웃겨, 아까 식당에서 먹었잖아(원장이). 그 뭐야, 그거랑. 가자민가? 넙적한거"라고 외친다.

 

영화관을 가는 동안 딸이 독립영화라고 내게 귀뜀을 해주었다.독립영화의 정의가 무언지도 모르는데. 나는 나름대로 독립영화는 상업적인 영화하고 대척점에 있는 영화겠거니 짐작하면서 영화관을 들어섰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설땐 딸이 고3인 것도 잠시 잊고, 야, 우리 2편이랑 3편도 꼭 보자, 했다. 이 영화는 장편영화의 1편인 것이다. 2편은 [김갑수의 운명]이고 3편은 [심은하의 잠적].

 

얼마전 본 [왕의 남자]에 실망해서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영활 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왕의 남자]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서 그에 대한 글들을 곳곳에서 심심치않게 볼 수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것은 이준익 감독의 글 중에 이런 부분이 있어서였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술가보다 생활인을 더 존중한다는 뭐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말에 혹해서 영화관으로 갔는데 다 보고나니, 여론 몰이에 나 또한 함께 놀아난 느낌이 참 고약했다. 내가 영화의 수준을 가늠할 위치도 아니고 나의 이러쿵저러쿵 궁시렁 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일 사람도 없겠지만 하옇든 내 성에는 차지 않았다. 사극도 경극도 가부끼도 아닌 것이 눈길 잡는 요기와 장치를 영악스럽다할 정도로 영리하게 엮은 영화같았다. 기대를 하고 봐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신성일......]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건진 것처럼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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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11일  

한유주와 윤성희의 단편 몇 개를 읽었어요.

[오늘의 문제소설]에 실린 윤성희의 [재채기]를 정신없다고, 중구난방이라고 나 혼자(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퇴박을 놓았었죠. 그랬다가 왜 문제소설로 선정했을까 하는 의구심에 다시 읽어보았어요. 뭔가 보이는 것이 느껴졌어요.


작년에 본 적이 있는 윤성희의 다른 작품, [저 너머](작가세계, 2005 겨울)를 다시 읽었어요.

알 것 같아요. 매력있어요.

윤성희의 작품 매력은 속도감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고공묘사법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그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주 높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묘사를 하면, 아주 멀리까지 한 눈에 보면서 묘사를 한다면.... 공간이 아닌 시간에도 적용시켜서, 과거와 더 과거와 그보다 더 과거를 한 눈에 보면서 서술한다면....  

예를 들어서 [더티 와이프]를 보자면 현미경을 들이대고 묘사하는 것처럼 아주 촘촘한 글쓰기가 있죠.  

윤성희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어떤 곳을 기준으로 점차 확대하면서 서술하지 않지요. 여기를 그리는가 싶으면 벌써 저기를 갖다 눈 앞에 툭 놓죠. 지금을 말하는가 싶을때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단 몇줄로 슬쩍 말하고 다시 몇 년을 휙 뛰어넘는 식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큰 미덕. 유머. [재채기]에서 한 번의 실수를 갚기 위해서(자신이 용서가 안 되어서) 속세를 떠나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감상적인가요? 그러나 윤성희는 가볍고 가볍게 유머로 버무려서 그것을 극복해버리네요.

한유주의 단편도 매력 있어요. 그 매력의 원인이 뭘까? 새로움때문에?

[그리고 음악]을 보면 서두부터 '거짓말이다'라고 하고, 독자가 잊을까봐 계속 거짓말이다,를 반복하죠. 세어봤더니 열 세번입디다.  

그 외에도, '아마도'라는 말과 '이것이 나의 야만이다'가 네 번씩 도드라지게 씌여있죠.  

이렇게 강조하는데 그냥 보면 안 되지. 잘 봐. 이것은 야만이야,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주인공이랄 수 있는 '환영'의 이름과 묘한 조응을 하는 것 같아요. '환영'이라는 단어는 이름도 될 수 있지만, 상상속의 가공인물이라는 느낌도 오거든요. 결국은 환영이고 거짓말이라는 거 아닐까.


한유주의 글들은 서사를 거부하고 상징으로 채워져있죠.  

글을 읽다보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덧 둥둥 떠오릅니다. 시간으로부터, 공간으로 부터 떠 오르죠. 아득한 이미지의 세계에서 부유하게 되요.  

그것은 좀 슬프고 아름다운 경험이었어요.


윤성희와 한유주를 한데 묶어서 매력있다고 하면, 그것이 지나치게 거칠고 폭력적인 단언이기는 해요.


그렇지만 저는 그 둘에게서 같은 종류의 기쁨을 느꼈어요.


시를 쓰면서 아마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소설 쓰기는(말하자면 시쓰기에 비해서) 어쩐지 작위적이고 의뭉스런 행위 아닌가.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넘기는(살고 있는) 어떤 것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 같았고, 소설은 몰래 기초공사하면서(구성따위) 잘 짜맞추어 완성한 후 시침떼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소설가는 소설가일 뿐 소설인이 아니지. 시는 가슴으로 쓰지만 소설은 머리로 쓰느거 아닌가. 시인은 시가라고 하지 않지. 뭐 그런 종류의 생각들이었죠.


한유주와 윤성희의 글은 이런 저의 생각들의 맥락에서 본다면 확실히 '의뭉스런 짜맞추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훨씬 더 '노회한 짜맞추기'죠.

당분간 더 윤성희와 한유주에게서 머물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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