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역사 - 위대한 사건은 어떻게 불멸의 이야기가 되는가
심용환 지음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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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무엇인가? 심용환 작가의 『신화의 역사』를 읽기 전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인류의 진보와 추악함을 보여주는 우화” 정도로 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화를 전혀 몰랐다는 말이다. 그런데 학계라고 신화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가령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신화 속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갈등에서 “성욕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들의 아버지 살해는 필연적이라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정도로 해석했지만, “오늘날 그리스 신들에 대한 해석은 지나치게 심리학적이며 그만큼 단편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p.65). 그간 인간 심리의 이면(aka. 막장 심리) 외에 딱히 다른 걸 읽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신화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출발해 게르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인도와 중국의 신화를 가로지른다. 이 여정의 끝자락에서, 독자로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신화는 지식이자 역사, 이데올로기, 종교를 한데 담은, 당시 인간 지성 활동의 결정체였다는 것. 동시에 부족의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집단이 신화를 통해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했다는 것. 다시 말해 고대인들이 역사적 사실을 메타포의 형태로 전하면서 그리스는 물론, 게르만, 메소포타미아 등에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엮이는 집단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신화가 우화였다면 이런 일을 해낼 순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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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단지 신화만 오해한 것이 아니다. 나는 신화에 대한 오해와 함께 현대인들이 삶의 중대한 무언가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신화는 인간 문화에서의 단지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적인 요소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이성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화적 동물이며 또한 그렇게 존속한다. 신화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다.”(p.364) 나는 본성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저자가 재인용한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의 주장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의 저자 파리드 자카리아는 오늘날 극우의 기원을 “이념적 대의가 없는 사람이 물질적 필요와 욕구를 추구하며 공허하고 외롭고 우울한 하루하루” 속으로 “포퓰리즘, 민족주의, 권위주의가 파고” 든 결과라고 말한다. 카시러와 자카리아의 주장을 한데 모아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한계를 뚜렷하게 인지하고 신화에 의지하던 과거인들과 달리, 풍요와 무한한 가능성에 취한 현대인들은 가치를 상실한 채 위기를 맞았다는 것.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쓰면서 완벽한 논증만으로 신(신성, 또는 신앙)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겠지만, 어림없는 소리. 도킨스의 논증은 굳이 신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반박 가능한데, 가령 신경과학의 ‘예측 처리’ 이론만 보아도 그렇다. 저 먼 곳에서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허수아비였던 경험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열량을 워낙 많이 먹어치우다 보니,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줄이려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함께 모여 서로의 공백을 메우는 과학계조차 이론을 수시로 수정하는 마당에, 무엇의 존재 또는 부재를 무슨 수로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다는 걸까.


나는 이 한계가 바로 신앙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아주 먼 과거의 신화, 가까운 과거와 오늘날의 종교가 자리를 잡은 곳. 『집단 망상』의 저자 조 피에르는 “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 세속적 이념이 점점 더 일종의 종교적 열정 같은 걸로 대체된다”는 정치학자 샤디 하미드의 주장을 인용하며 “우리는 ‘모든 깊은 신념은 승화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의 역사』를 덮은 후에 내린 결론은 이런 것이다. 신화를 우화 취급하던 우리가 어리석었다. 과거 사람들이 신화를 통해 가치를 찾았고 그 험한 세계를 최선을 다해 살아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가치를 줄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 비극을 낳지 않는 새로운 신념,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과거의 신화, 또는 종교를 복원하자는 게 아니다. 『집단 망상』의 인용에서 보았듯, 그것은 신념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으니까. 조무래기 책스타그래머가 떠든다고 될 일은 아니므로, 『신화의 역사』 일독을 강력하게 권해야겠다. 서평으로 백날 떠들어봐야 직접 읽는 책 한 권을 따라갈 수 있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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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풍문에 따르면 영화 <오디세이>의 오디세우스는 원전의 그 인물과 달리, 현대적인 성찰을 그리는 캐릭터인 모양. 나 혼자 넘겨짚어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신념을 공유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이 짐작이 들어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결심함.


덧 2. 생각난 김에 사놓은 지 10년이 넘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도 조만간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어봄. 그렇게 마음먹고 읽지 못한 책이 500권이라는 게 문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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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서평 바로가기



어제 업로드한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서평은 사실 길게 쓴 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하고 싶었던 여러 말들이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는데도 여러 말 보태게 될 것 같아 빠뜨릴 수밖에 없었는데, 중요한 말이라 게시물을 하나 더 발행해서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그 말이란 바로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않듯, 환경도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신경과학이나 유전학 관련 모든 책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하는 메시지를 읽게 되는데, 아무래도 내 관심사가 녹아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바로 인간 본성 비판인데, 마치 인간 본성이 경쟁이라는 본성론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던 것인데, 반작용처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했던 말을 계속했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불현듯 환경 결정론에 만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유전에 관해 읽은 책 모두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말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표현형을 결정하는 인자를 잘 모른다고 말했음에도, 거의 모든 서평을 마치 환경 결정론 지지자의 글처럼 써버렸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 때문에 읽은 책에 누를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초조해지고 말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는데….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의 저자인 데이비드 무어는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지만, 글쎄, 환경 결정론의 결정체인 대치동 학원가를 보고도 아주 조금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아가 아기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성차별적 고정관념 또한 환경 결정론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텐데, 그 결과 세계 어느 곳에서든 여성은 21세기가 4분의 1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리어를 쌓기가 매우 힘들다. 이런 결과만 놓고 보면 환경 결정론이 딱히 덜 위험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후성유전학은 이를 테면 채소를 많이 먹는 건강한 식생활을 하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친구 관계를 잘 맺으며, 독소를 피하라는 등의 조언처럼 현재 나와 있는 데이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조언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다. 다른 연구자의 말처럼 지금이 후성유전학 연구의 유아기라면,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는 배아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후성유전 연구는 과학자들이 오로지 유전자와 표현형의 상관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던 단계에서 벗어나, 발달 과정들이 실제로 어떻게 표현형들을 초래하는지로 관심을 옮기고 있다고 하니, 유전과 환경이 빚는 마법을 찾는 일만 남은 듯하다. 나 같은 독자는 단언하기보다는 다른 책 열심히 읽으면서 기다리면 될 일이겠다.

 

 

진짜 결론: “그냥 결정론은 다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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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의 영향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호르몬은 당신이 믿는 가치에 따라 당신을 더 착하게 만들 수도 있고 못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우리는이기적으로 진화하지도이타적으로 진화하지도 다른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특정 조건에서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다. 맥락, 맥락, 맥락이 전부다. 

- 『행동』, 808









인간의 행동에 대한 생물학적 기원을 찾으려는 오랜 시도가 우생학의 몰락과 함께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왓슨의 호언장담과 같이 타고난 재능과 상관없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든 빚어낼 수 있는빈 서판(tabula rasa)’처럼 여기는 시각도 편협하기는 마찬가지다. 

- 『나쁜 유전자』, 210










다른 모든 복잡한 특질과 마찬가지로, 지능은 수백 가지 유전자가 상호작용한 결과이며 여러 가지 환경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런 환경 요인은 모든 사람이 학습 기회를 얻는지, 아니면 특정 집단이 학습 기회를 빼앗기거나 재정적 여유가 없는지와 같은 수많은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 『초연결 지능』, 55









신경과학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러분을 특정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두뇌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천성이라거나 앞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사실 두뇌는 일종의 움직이는 대상이다. 양쪽 두뇌의 문해력에 관한 나의 연구를 포함해, 두뇌와 행동을 관련짓는 모든 연구들은 특정 시점의 어느 한 측면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즉 두뇌의 정지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연구로는 두뇌의 특정 구조가 얼마나 잘 변하지 않는지, 혹은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

- 『나의 뇌를 찾아서』, 46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잖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발견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의심하는 저술가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정론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

-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36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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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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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분별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이 지혜로운 생각이 바뀔 이유는 없다.” (p.424-425)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 입문을 도와줄 책을 찾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곧장 구매한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① 후성유전학의 정의와 기초 메커니즘, ②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은 사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기초 지식이 많지 않은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대략의 후성유전학을 정리해보자. 정의부터 살펴보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의 염기서열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참고).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 써보자면, 유전자가 같더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전자의 표현형이 달라질 수 있으며 심지어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 그 이러저러한 이유는 바로 환경이 되겠다.


DNA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메커니즘 가운데 제일 알려진 것이 ‘DNA 메틸화’라고 한다.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마치 스파게티 접시 위에 뿌린 후추 입자가 파스타 가닥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p.84-85, 반대로 떨어지는 것 또한 가능). 그다음으로 ‘히스톤 아세틸화’가 있다. 히스톤은 DNA를 감아 압축 및 포장하는 염기성 단백질로서,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p.86).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는 DNA의 특정 분절에 영향을 미치는데, 두 메커니즘을 통해 염색질의 특정 부분이 열리거나 닫히면서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것이다(p.87).


이와 관련해 저자는 발달 심리생물학자인 마이클 미니 연구팀의 실험을 소개한다. 어미 쥐의 양육 방식에 따라 새끼 쥐에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한 실험이었는데, 다정하지 않은 개체가 출산한 새끼 쥐가 다정한 대리모 쥐의 양육을 받았을 때, 해당 새끼 쥐는 친모의 성격과 무관하게 더 다정한 개체로 자랐고, 뇌 특정 영역의 세포에서 메틸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미니의 연구는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새폴스키는 이 연구를 후성유전의 고전 연구라고 평가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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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은 이래저래 내 호기심 유발에 최적화된 신생 학문이었는데, 첫째 최근 독서 최고의 화두였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박 근거를 제공해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배웠던 옛날 사람(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에 비춰 보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매우 훌륭한 후성유전학 입문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행동’에 한정되어 있었던 궁금증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 동시에 그동안 내가 갇혀 있던 틀에서 탈출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경과학 책을 읽으면서 입이 닳도록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왔는데, 저자는 환경이 우리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세포 변형과 기억의 연관성, 나아가 그것이 후대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확인해주었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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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껏 던지지 못한 질문이 남았다. 첫째, 그럼 유전자의 역할은 대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환경의 어떤 측면이 기억 또는 다른 유전 요소에 미치는 영향에만 주목해왔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발심과 유전학 지식 부족이 일으킨 (대환장) 콜라보였는데,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는 듯 저자는 정확히 그 지점을 지적한다. 


“한 사람의 염색질은 DNA와 그에 결합한 메틸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메틸기들은 그가 아침으로 먹은 음식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DNA의 메틸화된 부분들은 DNA와 메틸기 각각이 아니라 서로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 지닌 속성에 따라 할 일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DNA와 환경 요인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p.409, 강조는 서평자)


내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유전자(DNA)와 환경(메틸기)이 따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어떤 화학적 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스타 면에 묻은 후추가 아니라, 밀가루와 후추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특수한 면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솔직히 정말 궁금했는데도 그동안 환경을 반복해 강조하느라 놓친 질문이었는데, 저자가 인용한 주장이 단서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이 후성유전학 연구의 유아기라면,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는 배아기에 해당한다.”(p.423) 다시 말해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을 만나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다만,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맞는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며, 우리는 상황이 ‘자연법칙’에 맞게 전개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발달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p.419)


저자는 위 서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한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더라도 반대편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특정 성인의 애착 부족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그 애착 부족을 엄마와의 유대 부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엄마와의 유대가 충분하더라도 애착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유대가 충분치 못하더라도 애착이 많은 성인으로 자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p.362)


실제로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의 해악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당장 “아이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많은지. 다른 한편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령대별 필수 육아법’ 같은 정보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 또한 적지 않다.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이 유전자 결정론만큼이나 무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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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후성유전학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이 새로운 분야가 ‘가능성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심지어 생애 초기의 특정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이후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특히 저자는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이나 암 치료 등에서 후성유전학의 기여 가능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데, 책을 보면 실제로 2015년 당시에도 관련 성과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ADHD에 시달리는 나에게도 반가운 가능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은데, 바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가능성 또한 열려 있을 거란 점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체념하듯 말해왔고 솔직히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이 옳다면 신념이 극과 극이어도 대화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고쳐 쓴다”는 말을 운운하며 지레 포기할 필요가 없게 된 거다.


하나 더. 최근 생물학, 특히 신경과학이나 유전학의 발견이 과학과 인문(사회)학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대로 “사회 집단의 상호작용, 가족 역학, 어머니의 보살핌”, “먹이 피라미드와 식품 보조제”, “수질, 토양, 대기 오염물질” 같은 환경이 “부분적으로는 후성유전체에 침범하여 그것을 변형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고 표현형을 바꿀 수 있다”면(p.414-415), 사회문화적 현상을 하나의 분과 학문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책을 시작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 독서를 강화하기로 결심했고, 이것만으로도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을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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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탱하는 힘 - 혁신이라는 망상을 넘어서기
리 빈셀 외 지음, 박서현 외 옮김 / 이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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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점점 빠르게 변하면서 이제 누구나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혁신의 선두주자 미국을 볼 때면 여러 이유로 놀라게 되는데, 정치가 망가지는 와중에 기술 패권을 손에 꼭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번, 동시에 기본 생활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다는 데 또 한번 놀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가 고속철도 하나 없는 게 나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 읽은 『지탱하는 힘』은 혁신 강박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기업이나 미디어, 이제는 정치권까지 입만 열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진다”고 말하다 보니, 정작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이 소개하는 지탱하는 것들에는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의료, (건물 청소 등 유지보수 및 노약자 보살핌까지 아우르는 의미의) 돌봄 등이 있다. 


그럼 생각해보자. 현재 상용화된 혁신 제품 중에서 앞서 나열한 것들보다 삶에 중요한 것들이 있을까? 가령, 폭우 때문에 지하철이 멈추거나 도로가 잠긴다면? 출퇴근을 비롯한 일상이 완전히 멈춰 설 것이다. 혁신과 비교할 때 (저자들이 혁신의 대립항으로 설정한) ‘유지보수’는 주목을 받지 못할뿐더러, 종사자들의 대우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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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들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언어’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혁신-언어’를 “혁신의 중요성을 떠들어대면서 그 단어를 남용해 유행어로 만드는 숨 가쁜 방언”으로 설명한다. 혁신-언어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이 혁신에 매몰되도록 유도하고, 이로 인해 사회 자원을 낭비하는 동시에 필수적인 유지보수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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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소자동차 회사 니콜라 파산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그럴듯한 혁신-언어만 있으면 돈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지만 유지보수는 아무리 강조해도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이런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책에 쓰인 여러 이유 중 두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맹목적인 경제 성장 추종을 들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규 수익을 창출할 필요가 발생했고, 혁신-언어가 그럴듯해 보이기만 해도 투자자는 물론, 국가 예산이나 정책까지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 눈에 띄지 않는다는 유지보수의 특성을 들 수 있겠다. 앞서 폭우의 사례를 들었지만, 극적인 재난이 아닌 한 유지보수는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고장이나 피해가 당장 눈에 띄지 않으니 유지보수 또한 우선순위에서 점점 밀려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지연이 역사학자 스콧 놀스가 제안한 ‘느린 재난’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덮친 허리케인 마리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를 64명으로 집계해 발표했지만, 이후 1,427명으로 수정했고, 최종 공식집계는 2,975명이었다. 허리케인이 파괴한 인프라, 특히 전력망 미복구 때문에 사망한 인원이 폭증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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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이런 의문이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라지만, 그 성장마저 없으면 일자리 창출은커녕 있던 일자리마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유지보수의 중요성에 충분히 공감했음에도,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저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지보수의 중요성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는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정치인과 공무원, 투자자들에게 유지보수가 얼마나 ‘돈 되는 분야’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유지보수의 가치를 계량화해보는데, 비록 실험적인 수준이었지만 출발선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권력과 진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인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혁신이 공동 번영으로 이어지려면, 기술의 방향을 함께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나는 이 주장에 십분 공감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역사에서만 찾았다는 게 다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렇게 『권력과 진보』가 남긴 질문에 『지탱하는 힘』이 유지보수라는 답을 내어놓은 것 같아 그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달까.


이 책을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를 함께 유지보수하려면 더 많은 동조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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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무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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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책의 80% 이상이 미스터리 스릴러인 데다, 조금이라도 재밌어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사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해리 보슈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 부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모두 모셔두었고, (본격 추리라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스티븐 킹의 작품도 50권은 꽂아둘 정도였다. 그 시절 미스터리 스릴러는 내 독서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만큼은 손이 가지는 않더라. 딱히 일본 작가에 대한 편견 문제도 아니었던 게, 만약 그랬다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이렇게 열심히 챙겨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에게는 없는 여백이 있었고, 그 공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와 정반대 느낌이었달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조금 달랐다. 이 소설 또한 다른 작품처럼 여백이 자주 눈에 띄었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내 마음은 말끔히 정화되었다. 이 책을 읽을 때의 사정이 이래저래 좋지 않았던 탓에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빤하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전해준 작가는 정말 드물었다.

흐릿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내 감동은 잡화점에서 쪽지를 주고받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호의를 전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걸까? 아니면, 작품의 결말에서 그들의 호의가 운명처럼 여러 사람을 하나로 이어줄 때, 나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던 희망을 보았던 것일까? 이 정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느낌만은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잡화점에서 건넸던 쪽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절벽 끝자락에서 내민 손 같았던 그것.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났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란 나는, 이내 그가 남긴 쪽지를 다시 한번 펼쳤다. 책에는 그 시절의 위로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가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야기꾼은 이곳을 떠났지만, 이야기는 오래 남아 우리를 위로할 테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미지 출처: 현대문학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hdm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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