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로또 - DNA가 사회적 평등에 중요한 이유
캐스린 페이지 하든 지음, 이동근 옮김 / 에코리브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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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나는 서평을 통해 결정론의 오류에 대해 여러 차례 말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령 중국의 전 농구선수 야오밍의 신장은 229cm이고, 신체 스펙 덕분에 그는 NBA에 진출하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짐작건대 환경이 그의 신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읽은 『유전자 로또』의 주제를 짧게 요약하자면, 유전의 영향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사회적 격차를 제도적으로 메우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에 대한 핵심 전제를 하나 증명하는데, 바로 ‘유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차이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여러 영역 가운데 행동유전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소득(또는 사회적) 격차다. 이는 대개 환경 요인이 영향을 미친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저자는 유전적 차이가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지 능력, 그중에서도 수학 실력이 격차 발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저자도 인정하듯, 이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유전적 차이에 따른 격차를 인정한다면 그에 따른 결과 또한 인정받을 수밖에 없을 거란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잘 아는 그것, 바로 우생학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다. 많은 이들이 선천적인 부분에 대해 관대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유전적 차이에 따른 소득 격차 또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는지. 


그렇다고 존재하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오늘날 부의 격차는 과학을 인정하지 않아서 일정 부분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쁜 이들에게는 안경이라는 도구를 통해 격차를 보정하며,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인지 능력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개입이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격차 해소가 가능할 터. 책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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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자가 펼치는 논지에 전반적으로 공감하며 책을 읽었다. 특히 인지 능력의 선천적 성격을 학창 시절 내내 실감하면서도 내 형편없는 성적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까 봐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는데, 사실 이게 다 변명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읽는 내내 따라다닌 의문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접근이 부활한 우생학의 망령을 막아낼 수 있을까? 아,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발생 가능한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저자가 근거로 제시한 과학적 디테일이 우생학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 가운데 인지 능력의 대물림 가능성을 들 수 있겠다. 사람들은 대개 부모의 인지 능력이 높다면 자녀 또한 높아진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단호하게 부인한다. 기존의 선입견대로라면 형제의 격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전설적인 축구 선수였던 지네딘 지단의 첫째 아들인 엔조 지단의 경우, 프로 축구 선수로서 아버지의 명성을 전혀 이어가지 못했으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역시나 아버지와 달리 머리숱이 매우 풍성하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자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70조 가지 유전자 조합 가운데 하나다. 심지어 생식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전적 변화, 즉 돌연변이는 감안하지 않은 수치다. 즉, 현대사회에서 주목받는 인지 능력은 책의 제목 그대로 ‘유전자 로또’인 셈이다. 저자가 안경을 씌우듯 인지 격차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연히 발생한 유전적 차이가 격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기반한다(격하게 동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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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생학의 일차적 기반(좋은 부모-좋은 자녀)을 허물었음에도 덮기 어려웠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유전자 정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특히 이 책이 출간된 2021년(원서 기준)과 달리, 세계는 극우의 파도에 휩쓸리는 중이고 다 죽은 줄 알았던 우생학까지 활개치고 있다(자신의 우월한 유전자를 널리 퍼뜨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일론 머스크가 있다). 이들은 유전 정보에 새겨진 인지 격차를 보완하려 들까? 반대로 우월한 인지 능력을 가진 이들을 줄 세우려 들지는 않을까? 내가 아는 우생학은 극단적으로 후자를 선호해왔다. 저자의 바람과 달리 ‘우생학의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저자의 논의를 무시하기 어려운 것은, 빤히 존재하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격차를 해소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유전의 영향과 유전 변화의 가능성까지 함께 인정하는 것이기에 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유전자 결정론을 극복하려는 과학적 시도이자 정치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인지 능력의 유전 가능성을 인정하는 책은 읽는 거라, 이 주장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사회 격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가 한국 사회에서도 공론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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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유전자 편집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하지만, 분량상의 문제로 건너뛰기로 함.


덧2. 편집과 관련해 한 마디 더. 고도의 인지 능력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최고선처럼 여겨지지만, 그만큼 정신 질환의 위험 또한 덩달아 높아진다고 함. 설령 편집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저자는 꿈도 꾸지 말라고 당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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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내게 오시네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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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극적인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설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부터 이런 말이 현실의 놀라움을 썩 잘 담아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옛말처럼, 인간의 상상은 결국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현실은 인간의 상식을 자주, 가볍게 뛰어넘는다. 자연을 남보다 깊게 이해하는 과학자들조차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하고 있듯이. 인도의 소설가이자 활동가인 아룬다티 로이의 자전적 에세이 『어머니 내게 오시네』는 불가해한 현실을 담은 책이었다. 근 몇 년 사이에 읽었던 어떤 소설도 이 에세이보다 강렬하지는 않았다.


책의 제목 속 그 ‘어머니’ 메리 로이는 인도의 전설적인 교육자였다. 영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는 이후 학교를 설립해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고, 인도 전역에 이름을 알린 학교로 성장시켰다. 그는 또한 전설적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인도의 트라반코르 기독교 상속법에 이의를 제기했고, 지난 1986년 승소하면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을 인정받게 된다. 그가 없었더라면, 뿌리 깊은 인도의 가부장제는 오늘날 더욱 힘이 셌을 것이다.


위대한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그러나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아니,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엄마였다. 딸에게 평생 “개 같은 년” “널 고아원에 버렸어야 했어” 같은 폭언을 쏟아내던 이에게는 ‘엄마’라는 말조차 과분해 보일 지경이다. 폭언의 뒤쪽에 한 톨의 애정이라도 감춰두었다면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부모라면 자녀에게 느낄 법한 애정이 이 책에는 단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고아원에 버리고 싶었던 딸에게 아들과 동등한 교육을 제공하고, 기어코 건축대학에 입학시키면서 이 아이러니는 절정을 맞는다. 메리 여사의 이런 행보는 오늘날 입시로 인한 부모의 등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 오로지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그 일념 때문이었다. 70~80년대 인도에서 여성이 이런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책에도 쓰여 있듯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폭력에 가둬둔 존재에게 사람다운 삶을 안겨주는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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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여기에서 멈췄더라도 충분히 강렬했겠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평생 엄마의 욕받이로 살아왔던 아룬다티 로이는 건축대학에 입학한 후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 후에 인권운동가가 되어 인도의 모순과 싸워간다.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받았던 찬사는 훗날 매국노라는 비난으로 돌변하고, 끊임없는 추방과 투옥, 살해 위협에 시달리지만 인도 사회의 병폐를 들춰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어머니는 딸의 전부였다고 고백한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그 딸이라는 말이 함께 떠오르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내 상식으로 폭력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아야만 했다. 선한 사람이 훗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자주 보아왔어도, 폭력과 선함이 한 인간에게 동시에 공존하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이 공존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 같다”는 수식을 초라하게 만든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 내게 오시네』가 전한 강렬함은 이 책에 담긴 불가해한 모든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어쩌면 이 에세이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라고.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지성을 동원해도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신념을 강요하는 일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그러니까 『어머니 내게 오시네』는 상상에나 있을 법한 아이러니를 현실 속 실재로 빚어내는 텍스트였다. 위대한 인권운동가 어머니와 소설가 딸이 함께 만든 이야기는 이렇듯, 세계의 본질, 그리고 겸손함을 알려주었다.





덧. 실패하면 장난감을 주겠다던 작가의 외삼촌 G. 아이작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이야기를 빛내는 인물이었다. 존재 자체로 위안을 주는 사람을 얼마 만에 만나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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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 진지한 민주주의자를 위한 선언
수전 니먼 지음, 홍기빈 옮김 / 생각의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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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를 24년 9월에 다 읽었으니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많은 대목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인데, 그만큼 인상이 깊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아니, 단순히 인상 깊었던 수준을 넘어, 내가 끌어올 수 있는 공감을 모두 보낸 후에 남의 공감을 빌려 보내고 싶을 정도로 잘 읽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저자인 수전 니먼의 주장은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 그대로 “워크(woke)는 좌파가 아니”라는 것. 여기에서 워크란 정체성과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최근 좌파의 화두로 여겨져왔던 것들이 사실은 좌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책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가령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하면서 이름을 알린 미국의 젊은 흑인 시인 아만다 고먼은 네덜란드어 번역본의 번역자로 논 바이너리 백인 작가를 추천했다. 하지만 한 흑인 패션 블로거가 고먼의 작품을 흑인 여성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해당 번역가는 번역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인종차별에 맞선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워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답했겠지만, 수전 니먼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특정 인종의 정체성만 남았을 뿐, 조건 없는 보편적 평등이라는 좌파의 가치가 구현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조르자 멜로니가 이탈리아의 첫 여성 총리로 취임했을 때, ‘여성 총리’라는 사실에 찬사를 보내면서 멜로니의 이념이 전후 역대 이탈리아의 어떤 지도자보다 파시즘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무시한 점을 비판한다.


그래서 니먼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보편주의의 복원이다. 인종, 성별, 성적지향, 계급 이 모든 걸 아우를 때,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이 주장에 매우 깊이 공감했고 또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특정 소셜미디어에서 펼쳐지는 몇몇 정체성 집단의 주장에서 평등보다는 특정 집단의 우월주의와 반대편 집단에 대한 혐오를 자주 목격하다 보니, 그의 주장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가 정체성 정치의 귀결처럼 보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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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은 지 2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가령 니먼은 정체성 정치로 인한 공백을 들춰냄으로써 보편주의의 필요성을 구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현상인데, 옳고 그름만을 따져 물으며 보편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러 정치가와 비평가가 극우가 나쁘다는 사실을 수없이 논증했지만 극우화라는 현상 혹은 그 지지자들을 소거하지 못했듯이,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논증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문화적 조건을 따져 묻지 않은 대목 또한 무척 아쉽게 다가왔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한 개인에게 덧씌워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그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니먼은 인종/성별/성적지향 등을 언급하지만, 이제는 연령, 성별, 직업, 뇌 발달 스펙트럼, 재직회사의 매출 규모, 거주 아파트까지, 심지어 계급 내에서도 수많은 정체성이 파생되었고, 몇몇은 강제된 정체성 때문에 사회적인 불이익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니먼의 정체성 비판이 그들을 얼마나 설득해낼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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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의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해보자. 정치학 박사이자 외교전문가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에서 “자유주의의 합리적 사고방식은 (...) 신에 대한 경이로운 믿음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한편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에서 많은 문화권에서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 행동, 물체를 신성하고 순수하고 숭고한 존재로 지각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인 조 피에르는 『집단 망상』에서  “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면 세속적 이념이 점점 더 일종의 종교적 열정 같은 걸로 대체”된다는 정치학자 샤디 하미드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때문에 “모든 깊은 신념은 승화된 종교”로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세 저자의 주장을 모아놓고 보니, 가설 하나를 세워보고 싶어졌다. 신이든 신념이든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갈망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체성이 우리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많은 나라에서 정파 간 정체성 대결에서 비롯된 사회 갈등이 심각해지는 것에서 종교적 헌신을 엿본다면 근거 없는 비약일까? 자카리아는 위와 같은 책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가 국가의 구조적 쇠퇴에 대응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를 활용했다고 말한다. 정체성에 대한 헌신을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서였을 터. 그렇다면 내 짐작이 아주 큰 비약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수전 니먼의 보편주의, 그리고 보편주의의 기원으로서 계몽주의를 신뢰한다. 그러나 ‘신’의 자리를 차지한 정체성을 수전 니먼의 정체성 비판 논증으로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너선 하이트가 『바른 마음』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마음으로 먼저 판단하고, 이성은 판단을 뒷받침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휴머니즘의 복원을 시도한 세라 베이크웰의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읽으면서 설렘을 느꼈더랬다. 인간적인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바치고, 결국 동료 인간을 존중하게 된 휴머니스트들을 뒤따르고 싶어졌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를 읽은 직후 니먼의 논설에 동의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고 다른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움직인 것은 설렘이라는 결론을 다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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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를 찾아서 - 가장 유쾌하고 지적이며 자극적인 신경과학 가이드
샨텔 프랫 지음, 김동규 옮김 / 까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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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를 찾아서』는 좀 특이한 과학책이다.  대개 과학 서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를 전해주는 것과 비교할 때, 저자인 신경과학자 샨텔 프랫은 “여러분 각자의 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는지 잘 알려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하는데(p.20), 그러니까 개개인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뇌과학 책 한 권을 썼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집필 동기는 매우 간명한데, “모든 두뇌는 그야말로 독특하고 유일”하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p.20).


저자는 차이가 발생하는 원리, 그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거나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1장에서 다루는 편향성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책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뇌는 체계적으로 기능을 분담한다고 한다(창의력과 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 좌뇌가 구체적 사실(나무)에 더 주목하는 편이라면, 우뇌의 경우 전체적인 윤곽(숲)에 특화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뇌를 활용하는 수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좌뇌를 자주 활용한다면 디테일에, 우뇌를 자주 활용한다면 큰 그림에 주목한다는 뜻이다(참고로, 좌우 뇌 가운데 더 자주 활용하는 쪽은 더 큰 반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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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차이의 발생 영역을 여덟 가지로 정리해 소개하지만, 여기에서 파생된 행동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책이 담지 못한 부분까지 따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뇌의 개수만큼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책 제목을 빌려서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일전에 『뇌 과학의 모든 역사』의 서평에서도 썼지만, “지금 과학의 방식으로는 우리 뇌, 나아가 인간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과학이 뇌와 행동의 이러저러한 경향을 관찰할 수는 있겠지만, 이 경향이 특정 개인에게 온전히 적용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들었던 생각은 과학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과학적’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공산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과학’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팩트’로 통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팩트’에서 벗어난 현상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덧씌워졌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차별을 양산해내지 않는지. 『나의 뇌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러한 차이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프랫이 책에 쓴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적용되는 방식이란 사실 아무에게도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p.20~21) 


이 책을 통해 개별 사람의 차이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더 큰 과제를 남겨줬다고 생각한다. 세계와 사람을 진실과 거짓, 옳음과 틀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연습이 그것이다. 이 연습을 혼자 한다면 딱히 무슨 의미가 있겠나. 더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읽기 만만한 책은 아니지만, 다 읽으면 그만큼 보람이 큰 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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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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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는 문화, 사상, 도덕, 의례, 예술 등 우리 인간에게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대체로) 고유한 활동을 하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든다. 윤리적 판단을 고민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한다. 사원이나 교회, 성스러운 숲에서 신을 숭배하기도 하고 추억을 물려주기도 한다. 가르치고 음악을 만들고 농담하고 타인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성적인 설명을 하려고 애쓰기도 하며 대체로 인간다운 일을 한다. 이 영역이 바로 온갖 휴머니스트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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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책이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실망했느냐면,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대와 달라서 오히려 좋았다고, 읽는 내내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해야겠다. 인문서와 영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식견이 좁았던 모양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휴머니즘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휴머니즘? 인간 중심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마당에, 휴머니즘? 이런 의문(을 가장한 사실상의 힐난)이 떠올랐고, 또 이 이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단일한 이념으로 간주하기에 휴머니즘은다소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관성 있는, 공유된 휴머니즘 전통이 있으며 이 모든 휴머니스트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채롭지만 뜻깊은 실로 엮여 있다. 이 책에서 바로 그 여러 가닥의 실을 따라가보려고 한다.”(p.15) 그러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휴머니스트인 줄도 모른 채 휴머니즘을 실천해온 여러 시대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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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의 인용문은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부터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남긴 다양한 결과물을 추적하며 저자가 길어낸 휴머니스트의 특징이다. 때때로 목숨까지 바쳐가며 앎에 대한 호기심을 채웠으며, 새로운 책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먼 길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후대에 적극적으로 전하려 했던 사람들. 종교나 이념의 독단을 항상 경계하면서 진실을 위해 끊임없이 동료와 소통하던 사람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농담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사람다운 삶을 위한 윤리를 함께 토론했던 이들. 이 책에서 만난 그들이 곧 휴머니스트였고, 그들의 실천이 휴머니즘이었다.

 

또 하나, “오직 연결.”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1879~1970)가 자신의 소설 『하워즈 엔드』에서 반복하는 문구. 세라 베이크웰은 휴머니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이 말을 길잡이로 삼는다. 실제로 2026년의 나는 이 책을 통해 7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전통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지식, 더 나은 글을 열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과 나는 숙고, 기록, 읽기처럼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해 연결된것이다. 휴머니즘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인 셈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누가 뭐래도 어쩔 수 없는 그들의 후배였다는 사실을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 나 또한 위대한 휴머니스트의 후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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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한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문학, 윤리, 연결 등을 이뤄냈지만, 차원이 다른 악행과 비극 또한 인간 인지 능력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오래전 제국주의자들은 지적 능력의 차이에서 이민족, 생물종, 지구 환경 정복의 정당성을 찾았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생물종은 꿈도 꾸지 못할 규모의 학살이 지금도 일어나는 중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간다움 또한 양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한데 모은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에게는 인간다움의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동족과 다른 동물종, 나아가 지구를 파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이기에 그것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설령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휴머니즘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오늘날의 휴머니스트들이 고쳐가면 될 일이다. 함께 고민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과 함께 휴머니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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