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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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분별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이 지혜로운 생각이 바뀔 이유는 없다.” (p.424-425)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 입문을 도와줄 책을 찾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곧장 구매한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① 후성유전학의 정의와 기초 메커니즘, ②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은 사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기초 지식이 많지 않은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대략의 후성유전학을 정리해보자. 정의부터 살펴보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의 염기서열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참고).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 써보자면, 유전자가 같더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전자의 표현형이 달라질 수 있으며 심지어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 그 이러저러한 이유는 바로 환경이 되겠다.


DNA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메커니즘 가운데 제일 알려진 것이 ‘DNA 메틸화’라고 한다.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마치 스파게티 접시 위에 뿌린 후추 입자가 파스타 가닥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p.84-85, 반대로 떨어지는 것 또한 가능). 그다음으로 ‘히스톤 아세틸화’가 있다. 히스톤은 DNA를 감아 압축 및 포장하는 염기성 단백질로서,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p.86).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는 DNA의 특정 분절에 영향을 미치는데, 두 메커니즘을 통해 염색질의 특정 부분이 열리거나 닫히면서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것이다(p.87).


이와 관련해 저자는 발달 심리생물학자인 마이클 미니 연구팀의 실험을 소개한다. 어미 쥐의 양육 방식에 따라 새끼 쥐에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한 실험이었는데, 다정하지 않은 개체가 출산한 새끼 쥐가 다정한 대리모 쥐의 양육을 받았을 때, 해당 새끼 쥐는 친모의 성격과 무관하게 더 다정한 개체로 자랐고, 뇌 특정 영역의 세포에서 메틸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미니의 연구는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새폴스키는 이 연구를 후성유전의 고전 연구라고 평가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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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은 이래저래 내 호기심 유발에 최적화된 신생 학문이었는데, 첫째 최근 독서 최고의 화두였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박 근거를 제공해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배웠던 옛날 사람(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에 비춰 보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매우 훌륭한 후성유전학 입문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행동’에 한정되어 있었던 궁금증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 동시에 그동안 내가 갇혀 있던 틀에서 탈출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경과학 책을 읽으면서 입이 닳도록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왔는데, 저자는 환경이 우리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세포 변형과 기억의 연관성, 나아가 그것이 후대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확인해주었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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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껏 던지지 못한 질문이 남았다. 첫째, 그럼 유전자의 역할은 대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환경의 어떤 측면이 기억 또는 다른 유전 요소에 미치는 영향에만 주목해왔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발심과 유전학 지식 부족이 일으킨 (대환장) 콜라보였는데,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는 듯 저자는 정확히 그 지점을 지적한다. 


“한 사람의 염색질은 DNA와 그에 결합한 메틸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메틸기들은 그가 아침으로 먹은 음식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DNA의 메틸화된 부분들은 DNA와 메틸기 각각이 아니라 서로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 지닌 속성에 따라 할 일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DNA와 환경 요인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p.409, 강조는 서평자)


내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유전자(DNA)와 환경(메틸기)이 따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어떤 화학적 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스타 면에 묻은 후추가 아니라, 밀가루와 후추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특수한 면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솔직히 정말 궁금했는데도 그동안 환경을 반복해 강조하느라 놓친 질문이었는데, 저자가 인용한 주장이 단서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이 후성유전학 연구의 유아기라면,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는 배아기에 해당한다.”(p.423) 다시 말해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을 만나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다만,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맞는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며, 우리는 상황이 ‘자연법칙’에 맞게 전개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발달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p.419)


저자는 위 서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한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더라도 반대편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특정 성인의 애착 부족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그 애착 부족을 엄마와의 유대 부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엄마와의 유대가 충분하더라도 애착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유대가 충분치 못하더라도 애착이 많은 성인으로 자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p.362)


실제로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의 해악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당장 “아이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많은지. 다른 한편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령대별 필수 육아법’ 같은 정보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 또한 적지 않다.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이 유전자 결정론만큼이나 무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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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후성유전학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이 새로운 분야가 ‘가능성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심지어 생애 초기의 특정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이후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특히 저자는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이나 암 치료 등에서 후성유전학의 기여 가능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데, 책을 보면 실제로 2015년 당시에도 관련 성과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ADHD에 시달리는 나에게도 반가운 가능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은데, 바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가능성 또한 열려 있을 거란 점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체념하듯 말해왔고 솔직히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이 옳다면 신념이 극과 극이어도 대화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고쳐 쓴다”는 말을 운운하며 지레 포기할 필요가 없게 된 거다.


하나 더. 최근 생물학, 특히 신경과학이나 유전학의 발견이 과학과 인문(사회)학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대로 “사회 집단의 상호작용, 가족 역학, 어머니의 보살핌”, “먹이 피라미드와 식품 보조제”, “수질, 토양, 대기 오염물질” 같은 환경이 “부분적으로는 후성유전체에 침범하여 그것을 변형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고 표현형을 바꿀 수 있다”면(p.414-415), 사회문화적 현상을 하나의 분과 학문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책을 시작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 독서를 강화하기로 결심했고, 이것만으로도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을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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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탱하는 힘 - 혁신이라는 망상을 넘어서기
리 빈셀 외 지음, 박서현 외 옮김 / 이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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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점점 빠르게 변하면서 이제 누구나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혁신의 선두주자 미국을 볼 때면 여러 이유로 놀라게 되는데, 정치가 망가지는 와중에 기술 패권을 손에 꼭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번, 동시에 기본 생활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다는 데 또 한번 놀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가 고속철도 하나 없는 게 나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 읽은 『지탱하는 힘』은 혁신 강박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기업이나 미디어, 이제는 정치권까지 입만 열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진다”고 말하다 보니, 정작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이 소개하는 지탱하는 것들에는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의료, (건물 청소 등 유지보수 및 노약자 보살핌까지 아우르는 의미의) 돌봄 등이 있다. 


그럼 생각해보자. 현재 상용화된 혁신 제품 중에서 앞서 나열한 것들보다 삶에 중요한 것들이 있을까? 가령, 폭우 때문에 지하철이 멈추거나 도로가 잠긴다면? 출퇴근을 비롯한 일상이 완전히 멈춰 설 것이다. 혁신과 비교할 때 (저자들이 혁신의 대립항으로 설정한) ‘유지보수’는 주목을 받지 못할뿐더러, 종사자들의 대우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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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들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언어’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혁신-언어’를 “혁신의 중요성을 떠들어대면서 그 단어를 남용해 유행어로 만드는 숨 가쁜 방언”으로 설명한다. 혁신-언어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이 혁신에 매몰되도록 유도하고, 이로 인해 사회 자원을 낭비하는 동시에 필수적인 유지보수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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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소자동차 회사 니콜라 파산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그럴듯한 혁신-언어만 있으면 돈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지만 유지보수는 아무리 강조해도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이런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책에 쓰인 여러 이유 중 두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맹목적인 경제 성장 추종을 들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규 수익을 창출할 필요가 발생했고, 혁신-언어가 그럴듯해 보이기만 해도 투자자는 물론, 국가 예산이나 정책까지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 눈에 띄지 않는다는 유지보수의 특성을 들 수 있겠다. 앞서 폭우의 사례를 들었지만, 극적인 재난이 아닌 한 유지보수는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고장이나 피해가 당장 눈에 띄지 않으니 유지보수 또한 우선순위에서 점점 밀려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지연이 역사학자 스콧 놀스가 제안한 ‘느린 재난’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덮친 허리케인 마리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를 64명으로 집계해 발표했지만, 이후 1,427명으로 수정했고, 최종 공식집계는 2,975명이었다. 허리케인이 파괴한 인프라, 특히 전력망 미복구 때문에 사망한 인원이 폭증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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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이런 의문이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라지만, 그 성장마저 없으면 일자리 창출은커녕 있던 일자리마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유지보수의 중요성에 충분히 공감했음에도,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저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지보수의 중요성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는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정치인과 공무원, 투자자들에게 유지보수가 얼마나 ‘돈 되는 분야’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유지보수의 가치를 계량화해보는데, 비록 실험적인 수준이었지만 출발선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권력과 진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인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혁신이 공동 번영으로 이어지려면, 기술의 방향을 함께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나는 이 주장에 십분 공감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역사에서만 찾았다는 게 다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렇게 『권력과 진보』가 남긴 질문에 『지탱하는 힘』이 유지보수라는 답을 내어놓은 것 같아 그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달까.


이 책을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를 함께 유지보수하려면 더 많은 동조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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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무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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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책의 80% 이상이 미스터리 스릴러인 데다, 조금이라도 재밌어 보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사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해리 보슈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 부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모두 모셔두었고, (본격 추리라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스티븐 킹의 작품도 50권은 꽂아둘 정도였다. 그 시절 미스터리 스릴러는 내 독서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만큼은 손이 가지는 않더라. 딱히 일본 작가에 대한 편견 문제도 아니었던 게, 만약 그랬다면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을 이렇게 열심히 챙겨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에게는 없는 여백이 있었고, 그 공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와 정반대 느낌이었달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조금 달랐다. 이 소설 또한 다른 작품처럼 여백이 자주 눈에 띄었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내 마음은 말끔히 정화되었다. 이 책을 읽을 때의 사정이 이래저래 좋지 않았던 탓에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빤하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전해준 작가는 정말 드물었다.

흐릿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내 감동은 잡화점에서 쪽지를 주고받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호의를 전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걸까? 아니면, 작품의 결말에서 그들의 호의가 운명처럼 여러 사람을 하나로 이어줄 때, 나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던 희망을 보았던 것일까? 이 정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느낌만은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잡화점에서 건넸던 쪽지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절벽 끝자락에서 내민 손 같았던 그것.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났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놀란 나는, 이내 그가 남긴 쪽지를 다시 한번 펼쳤다. 책에는 그 시절의 위로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가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야기꾼은 이곳을 떠났지만, 이야기는 오래 남아 우리를 위로할 테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미지 출처: 현대문학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hdmh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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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는 꿈 (리커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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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내 지루하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울림을 주는 소설이 있다. 읽는 내내 무얼 느껴야 할지 몰라 허둥댔는데, 구름 한 점 없던 날 갑자기 비를 쏟아내는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깨달음을 주는 소설. 최진영의 『내가 되는 꿈』이 꼭 그랬다. 


『내가 되는 꿈』은 서울에서 작은 회사를 다니는 태희와 청소년 시절을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 댁에서 보내는 태희, 두 사람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배경과 시간은 다르지만, 꼭 같은 마음을 함께 가진 채 살아간다. 자기 삶에서 소외된 듯한 느낌. 회사원 태희는 일과 시간 동안 동료들 앞에서 상사의 모욕 섞인 질책을 받아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외도한 애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자 괴로워한다. 청소년 태희는 자세한 사정도 듣지 못한 채 할머니 댁에 맡겨졌고, 이후 엄마와 (특히) 아빠는 딸을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듯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이 소설을 수월하게 읽지 못했던 이유는, 작가가 극적인 사건보다는 두 사람의 마음을 그리는 데 집중한 탓이었다. 그 묘사가 내게는 마치 한때 유행하던 실험 소설처럼 다가왔는데, 나는 솔직히 그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명확한 줄거리, 뚜렷한 인과가 녹아 있는 서사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마음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과 같았고, 가뜩이나 내 의식만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 흐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반부 청소년 태희는 편지 한 통을 받아 읽게 되는데, 그 편지의 발신인이 태희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혼란은 절정에 다다랐다. 가뜩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묘사로 가득 찬 소설에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까지 더해진 탓이다. 그리고 청소년 태희의 답장을 읽는 회사원 태희에 의해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이라는 게 밝혀질 때에야 이 소설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부모님께 버려진 채 아무런 자유가 없었던, 그렇지만 그것을 견뎌야 했던 청소년 태희. 그는 모욕 섞인 질책을 견디는 미래를 꿈꾸지는 않았으리라. 답장을 펼쳐 읽은 회사원 태희는 그제야 자신이 왜 삶에서 소외되었는지 깨달았고, 견디기만 하는 삶 바깥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소설의 마음 묘사를 지루하고 혼란스럽게 느꼈던 것은, 두 사람의 마음이 일상에서 내가 느꼈던 소외감과 똑같은 것이었기 때문은 아닐지. 


『내가 되는 꿈』을 읽으면서 느낀 충격과 감동은 ‘내 삶에서 소외된 나’, 나아가 소설의 형식에 대한 다른 생각을 안겨주었다. 삶에서 소외된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는 사실 언제든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 입장에서는) 낯선 형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앞으로 소설을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깨달음은 왠지 이 소설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처럼 느껴진다.



➕ 덧. 표지가 너무 예쁘고 좋았음. 특히 표지 그림이 소설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 더 그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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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 - 1600년부터 오늘까지, 진보와 반동의 세계사
파리드 자카리아 지음, 김종수 옮김 / 부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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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극찬이 들려오던 그 책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를 나도 이제야  읽었고, 그 독자들을 따라 극찬 대열에 합류했다. 최근 읽었던 역사책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했고, 개인적으로는 강력한 올해의 책 후보에 올려두기에 손색이 없었고, 추천이나 소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망상처럼 보였을 제목 또한 책을 훌륭하게 아울렀다.


저자인 파리드 자카리아가 역사의 진보와 퇴보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온 소재는 자유주의*️⃣ 혁명이다. 대략 500년 전 네덜란드에서 태동한 자유주의가 어떤 발전과 부침을 겪으며 오늘날 세계 질서에 이르렀고 지금은 왜 쇠퇴하고 있는지 역사적 사실에 더해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맥락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자유주의는 '비군주제 정치와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종교적 다원주의 등 자유주의적 사상과 관행'(p.82)을 의미한다. 즉, 저자에게 자유주의 질서란 정치 체제와 경제 질서, 나아가 세계 질서까지 모두 아우르는 이념이다.



📚 역사는 왜 진보하고 퇴보할까


그래서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 걸까? 저자가 긴 책을 쓰면서 밝힌 이유를 내 나름대로 과감하게 요약해 보자면, ‘관용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반대파(보수파)를 ‘살려는 드렸던’ 온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숙청하기에 바빴던 급진파는 결국 반동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책에서 소개한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혁명이다. 명예혁명과 함께 출범한 입헌군주제 체제 안에서 왕당파(보수파)와의 갈등을 해결했던 영국의 온건파와 달리, 프랑스의 급진파는 혁명 이후 반대 세력을 반동으로 몰아세우고 단두대에 세우기 바빴고, 타협 없는 혁명은 반동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이다(여기에 자유주의 정치 체제 성립을 가능케 했던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해서도 설명하지만, 이 서평에서는 건너뛰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기를).


저자는 자유주의의 쇠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세계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유주의가 이미 60년대에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특히 68혁명 이후 (새로운) 정체성 정치의 부상과 함께 정치는 양극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양극화는 누구 하나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듯 격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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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 정치란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 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특정 성별(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출처: Oxford Living Dictionaries) 


정체성 정치는 여러 맥락에서 비판을 받아왔는데, 자카리아의 경우 정체성 기반 갈등이 가장 격렬했었던 역사적 사례를 들었다. 실제로 가짜뉴스와 양극화를 다룬 『집단 망상』에서도 “정체성 기반 양극화는 단순한 감정적 반감뿐 아니라 혐오와 반감 같은 신체적 반응까지 포함”하는 갈등을 부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정치나 철학에서는 특정 정체성에 매몰되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같은 보편적 모순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데, 특히 이 문제를 좌파 몰락의 기원으로 여겼던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루게릭병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 구술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라는 책을 쓰며 정체성 정치를 비판했다(이미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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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


자유주의의 시대는 세계 체제로서든 인권 사상으로서든 저물어가면서 새로운 혼란의 시대가 다가온다고 한다. 세계는 전쟁 때문에 몸살을 앓는 중이고(아직 몸살 수준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국가들은 반으로 나뉘어 내전 수준의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과연 해결할 가능성이 있기나 한 걸까?


저자는 물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나는 공감과 의문을 동시에 떠올렸지만, 이미 지나치게 긴 글을 써버렸으므로 그에 대한 판단은 다른 독자에게 맡기는 것으로 한다. 다만, 그가 언급한 인간 특성에 대해서는 지극히 공감했다는 사실만은 기록해둬야겠다. 인간에게 자유가 중요한 만큼 좋은(또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열망 또한 크고 중요하다는 것, 모두가 가치 있는 삶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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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앞서 언급한 책,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수전 니먼, 홍기빈 옮김, 생각의힘, 2024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 김일년 옮김, 플래닛, 2012(절판 😢)

『혁명을 팝니다』,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마티, 2006(절판 😢)

▶️ 이 책은 정체성 정치를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정체성 정치가 자본에게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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