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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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는 아마도 재독을 제일 많이 한 책일 거다. 고등학교 1~2학년 두 해 동안 7~8번을 읽었고 스무 살을 넘긴 후에도 적어도 2~3번은 읽었을 텐데, 이만큼 읽고 보니 조운이 조조의 강남 정벌 때 유비의 아들인 아두(유선의 아명)를 품에 안고 적진을 누비다 우연히 얻은 청명검으로 목을 벤 적장이 하후은이었다는 디테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편의점에서 신분증을 내어놓을 필요가 없을 때에도 『삼국지』는 내 기억 한 구석에 펼쳐놓은 자리를 뺄 기색이 없었다. 다만, 이때의 삼국지는 스펙터클보다는 미스터리에 가까웠는데, 이문열이 남긴 수많은 평론조차 놓친 팩트가 무수히 많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다. 그렇다고 2800페이지가 넘는 『정사 삼국지』를 읽을 여력은 없어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 오랫동안 자외선과 비바람을 번갈아 맞은 탓에 닳을 대로 닳아 버린 삼국지 미스터리를 다시 파헤친 것은 『역사 삼국지』라는 책 덕분이었다. 전자책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나는 갑자기 그 시절의 열정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고, 그 순간 대여해 다음 날 아침이 오거나 말거나 책을 새벽까지 읽었다. 그렇게 나는삼국지의 세계로 다시 한번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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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일 큰 수확은팩트체크가 체계적으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도원결의부터 시작해 조조의 여백사 살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한 세기의 미녀 초선의 존재,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전위와 허저의 낮은 존재감,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대활약 등등. 이 책에 정리된팩트 체크를 일일이 정리하려면 끝이 없을 테니 여기에서 멈춘다. 1천 페이지 넘는 벽돌책을 읽는 내내,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삼국지』만 읽어도 다른 오락이 필요 없던 그 시절 말이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 경험이었는데, 책은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 책은 『삼국지』가 비틀어놓은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것 이상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역사를 처음 배울 때부터 시작해 지겨워하는 것조차 지겨워진 그 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정사 삼국지』만으로 모든소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지 않았다는 게 반전이었달까. 저자에 따르면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책이 아니어서 논문을 쓰기에 적합한 사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p.9).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송나라 때 역사가인 배송지의 주석과 『후한서』, 『자치통감』 등을 번갈아 확인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상했다. ‘정사(正史)’라는 말을 내가 잘못 이해한 걸까? 미스터리 하나를 풀었더니 더 큰 미스터리가 날 기다리던 셈이다.

 

의문은 『정사 삼국지』 편찬 배경과 함께 스르륵 풀렸다. 정사를 집필한 진수의 목표는 서진(西晉)의 정통성 확보였고, 서진의 전신이었던 위, , 오 가운데 위나라만을 정통으로 인정했으며, 정통성 확보에 방해되는 사실은 제외하고 띄울 만한 일은 만들어서 끼워넣었는데, 특히 사마의에 관한 서술이 그랬다. 이문열은 사마의의 수비를 뚫지 못한 제갈량을 두고지략이 부족했다고 평가한 진수(『정사 삼국지』의 저자)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지만, 정작 다섯 차례 북벌 중 3차까지 제갈량과 대적한 것은 (소설에선 한끗 모자라 보이던) 조진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4~5차 북벌에서 사마의의 전적도 초라하기 짝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마의는 서진의 시조 격으로 『정사 삼국지』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제갈량 필생의 라이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정리해보면 『정사 삼국지』는 사실을 충실히 기록했다기보다는 정통성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았다는 의미에서 정사(正史)로 불리는 게 타당해 보인다. 아주 조금 과장을 더해보면 정부가 홍보를 위해 운영하는 KTV 채널에 업로드된 영상 수준의 기록물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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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쓰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 내가 책스타그램에 올릴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질 않는 걸 보니, 이거 하나는 정말 잘 알겠다. 어떤 이들은 정확한 팩트 복원을 역사학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떠들지만, 결국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것이다. 팩트 신도들조차 자신의 논거를 강화하기 위해 팩트를 선택적으로 꺼내들거나 인과를 곡예 수준으로 끼워 맞추는 이유도 이것 때문일 거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던 E.H.카 선생의 통찰력은 지금에 와서 보면 눈이 부셔서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밝게 빛나는 것 같다.

 

그리고 하나 더. 나를 포함한 『삼국지』의 독자들에게 그 시기는 영웅의 시대였을 터. 하지만 『역사 삼국지』를 읽으면서 깨달은 진실은 중국의 역사에서 흔하디흔했던 분열과 전란의 시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거다. 별다른 문화적 성취를 찾아보기도 어려운데, 서진의 건국을 주도한 사마 씨 왕조의 정통성과 비전 부재, 여기에 무능까지 더해지면서 빠져 버린 수렁의 시간이었달까. 다시 말해 이 시대는 권력 투쟁의 장이었으며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들은 그저 그런 기회주의자였을뿐. 그 시기에 감소한 인구만 헤아려 봐도 그 시대를 도저히 곱게 봐줄 수가 없다.

 

이런 시대를 붙들고 현자 놀이를 할 일은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삼국지 마니아들도 꼭 생각해보셔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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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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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교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고, 여기에서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사실 고전 자체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책 추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적으로 믿고 보는 유시민 작가가 무려 『청춘의 독서』에서 『맹자』를 ‘자신의 인생 책’으로 소개하며 긴 감상을 썼는데도 ‘뭐 그런가 보네’ 싶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출간될 숨은 책들을 읽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2,300년 전 성현의 이야기를 읽고 있을 시간은 더욱 없었다.


그러다 동양철학(주역이 아닙니다)의 매력에 흠뻑 빠지신 어머니께서 『맹자』 일독을 권하셨고, 몇 번을 거절하다가 끝내 펼쳐보게 됐다. 그리고 초반에는 괜히 읽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백성을 배부르게”, “군주는 인자하게” 같은, 좋은 말 대잔치로만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히 ‘아성(亞聖)’으로 추앙받았던 게 아니었는지, 책장을 넘길수록 내 편견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였다. 통치의 정당성,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모습에서 철학자나 사상가보다는 현실 지식인의 면모를 엿보았던 것이다. 다만, 책의 구성이 체계적이지는 않아서 해설서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렇게 『맹자 교양강의』라는 책을 함께 펼쳤고, 해설서와 함께 『맹자』를 읽었으며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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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 ‘축의 시대’의 당당한 주인공


두 책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수확은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장한 유교 사상과 함께 동북아 지역 사람들이 ‘타인과의 공존’을 체계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맹자의 경우,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마음, 나라를 바로 세우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는데, 현대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대목이 많았다는 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동서양 철학자들의 활동 시기가 큰 차이 없이 겹치는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동서양의 위대한 지성이 활동했던 약 기원전 900년~서기 200년 사이의 기간을 ‘축의 시대’로 지칭하는데, 종교적, 철학적 사고의 광범위한 전환이 이루어진 ‘위대한 시기’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실증적 증거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가설 수준의 개념이지만, 이런 현상이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 즉 ‘지혜로운 사람’이 따르게 될 역사적 경로 혹은 숙명은 아니었을지 궁금해진다. 혹시 이 가설이 타당하다면, 신경과학이나 심리학이 사상사에 개입할 여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딱히 정보값있는 의문은 아니지만 궁금해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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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상공론의 유교? 이게 다 오해입니다!


책이 내게 남긴 또 다른 메시지는 우리가 유교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망국이나 오랜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유교를 ‘탁상공론’이나 ‘권위주의의 뿌리’ 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읽은 맹자의 말 가운데 이런 오해와 교집합을 이루는 그 어떤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서양철학사』를 함께 읽은 덕분에 두 철학을 비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사상을 비교해 보면 이런 오해는 더욱 근거를 잃게 된다. 두 철학을 비교해 보자. 그리스 철학의 목표는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선 ‘완전함’이었고, 그 완전함을 형이상학✳️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렇게 완전함이란 이상을 꿈꾸며 탄생한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은 각각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철학자에 의해 ‘유일신’으로 다시 탄생했고, 지금까지도 서양을 지배하는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유럽은 천년 넘는 세월을 신학 중심의 질서 가운데 유지되어 왔다.


반면 유교의 목표는 어땠을까? 맹자에게는 당대의 혼란을 바로잡을 ‘현실의 질서’가 필요했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체계화한 결과물이 유교였다. 『맹자』에서 인(仁)이나 의(義)와 같은 구체적인 윤리 개념을 발전시켰거나, 체계적인 토지 분배법,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항산)이 없으면, 굳건한 도덕심(항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무항산 무항심, 無恒産 無恒心 – 양혜왕 상)” 같은 발언 등을 감안하면, 유교가 ‘현실의 사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유교가 고도로 사변화된 것은 송대 성리학 이후였다).


관련해서 시대 배경을 조금 더 살펴보자. 공자는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춘추시대를, 맹자는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살아갔다. 이 시기의 군주들은 더 큰 힘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착취가 이어졌다. 이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철학이 ‘탁상공론’이었다면, 오늘날 평화에 대한 모든 논의라고 다를 수 있을까?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으로 손꼽히는 세종이나 정조의 정치 이상이 ‘요순시대’였던 걸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 유교는 긍정적 유산을 남겼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남다른 역량과 열정에도 영향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민본’을 잊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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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와 망국, 그리고 권위주의


길게 글을 쓰는 김에 ‘조선의 망국’과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먼저 조선의 망국 이야기부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애쓰모글루에 따르면 “권력집단이 종종 경제 발전과 번영의 원동력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번영에 따르는 창조적 파괴로 인해 자”경제적 특혜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p.133). 구한말 조선이라고 다를까? 당시 지배계급은 번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몰두했고, 가뜩이나 열강 사이에서 시달리던 조선은 번영은 꿈조차 꿀 수도 없었다. 당시 지배계급의 행태는 맹자님 말씀과는 조선과 남아프리카공화국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권위주의는 어떨까? 최근 학계에서는 권위주의의 기원으로 유교보다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유입된 ‘군사문화’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권위주의적 통치 문화가 군사 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권위주의 또한 자리를 잡게 됐다는 것이다(「권위주의와 학연주의의 제도적 고착화 과정에 관한 연구」, 김윤호, 2020 참고). 물론 유교의 계급주의 세계관에서 권위주의를 찾을 수 있겠지만, 역사학자 심용환은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계급제도가 느슨한 편이었으며, 하위 계급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eoh7XDsVDRE&t=4777s 참고). 한 예로 정조 시대의 실학자 홍대용의 경우, 10살 연하의 선비와도 말을 놓으며 허물 없이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당대의 주목받는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검토했음에도 유교가 망국과 권위주의의 기원으로 여긴다면, 맹자님도  꽤나 억울하지 않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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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맹자와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


유교에 대한 관심이 소금 한 꼬집만큼도 없었던 내가 책 두 권 읽고 열혈 유교 신도마냥 서평을 남기는 게 썩 못미덥겠지만, 내 소신(?)이 가벼워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시대상황을 돌아보자.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학살이 일어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이제 4년이 되어간다. 선도적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에서는 ‘가짜 미국인’을 상대로 자경단이 무력을 행사한다. 정치적 갈등 때문에 반으로 나뉜 한국인들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만 간다. 지금의 시대가 공자,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 있게 ‘다르다’고 답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라고 생각했고, 밀쳐두기만 했던 유교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싶었던 맹자의 고민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루하다는 이유로 유교를 외면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 하나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물론 맹자의 유산이 완벽한 해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점은 걷어내고 좋은 점을 취한다면, 중요한 해법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동료 시민들이 편견을 거두고 맹자와 대화를 나누길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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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교양강의』의 저자가 역사상 유교 국가가 존재한 적 없는 것으로 주장한 대목에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변방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조선은 그 어떤 중국의 왕조보다 투철한 성리학 국가였으니까.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말이다.


 


✳️ 형이상학: 존재의 보편적 원리와 형식에 대한 철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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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감각 - 읽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책을 사랑하는가
정도성 지음 / 투래빗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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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했습니다.


얼마 전 『적독 생활』 서평에도 썼지만, 읽은 책이 쌓이면 책짐이 되고, 책짐이 커지면서 읽기의 바깥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나는 여전히 ‘읽기’의 비중이 압도적이지만, 책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덕분에 이제는 ‘소울메이트’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정에도 『읽는 감각』 서평단 신청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는데, ‘읽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책을 사랑하는가’라는 부제를 보면서 다른 이들이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몹시 궁금해진 것이다.

그렇게 『읽는 감각』을 읽었는데, 아, 웬걸,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나와 저자의 책 사랑 방식이 점점 멀어지는 좌우파 정치 세력의 거리보다 더 먼 느낌을 받은 탓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러나 저러나 결국 ‘읽기’ 없는 책을 상상할 수 없고, 앞서 말한 소소한 즐거움은 읽기란 큰 줄기에서 뻗어나온 잔가지 정도에 불과했는데, 『읽는 감각』이 책을 다루는 방식은 그 자체로 독립된 소품에 가까웠다. ‘좋고 싫음’이 아닌 ‘낯설음’의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황한 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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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의미 없는 독서였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시길. 어렴풋하게만 알았던 읽기 바깥 세상을 둘러본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었으니까. 정보를 담은 매체로서의 책이 아닌, 물건으로서의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거의 모든 감각을 망라한 듯한 『읽는 감각』은 지구 탐험 안내서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만난 신세계란 이런 것이다. 가령 저자에게 서점, 특히 동네서점은 ‘체험의 공간’이다. “독자가 이 책을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읽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허, 서점이 책을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구요?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현한 공간으로 세 개의 서점을 소개한다. 제일 먼저 소개된 일본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의 답은 ‘컨시어지’다. 이곳은 컨시어지가 먼저 깊이 읽고 책을 엄선해 독자에게 추천한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독자에게 뜻밖의 책을 만날 기회인 동시에 함께 책을 찾는 경험을 안겨주게 된다고. 한편, 서울 연남동의 서점 리댁션(Readaction)은 ‘Read’와 ‘Action’을 붙여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Lead Life, Read Action”, 즉 “삶을 리드하기 위해 (나 또는 책을) 읽고 실행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읽은 것을 실천하기 위한 (워크숍에 가까운) 독서모임 등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 한편, 저자가 직접 운영했던 서점 ‘서사’의 이야기도 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나만의 서사를 찾아가는 공간”으로 정의한 저자는 공간 곳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디테일(의자와 테이블 높이 등)을 심어두었다. 지금은 여러 종류의 독서 모임이 진행되면서, 책으로 연결되는 체험을 제공한다고 한다(다른 건 몰라도, ‘연결 경험’은 정말 좋은 것 같다. 나도 책 수다를 좋아한다).

사실 이런 변화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는 했다. 가령 소셜 미디어의 책 계정을 보면, 저자가 언급한 종이, 무게, 디자인 등 책을 일상의 감각으로 들여오는 모습이 확연히 늘어난 게 체감될 정도다. 리커버 에디션을 출시하는 출판사, 이제는 없으면 아쉬울 온라인 서점의 굿즈 코너 등을 볼 때, 책은 이제 생산-유통-소비 모든 단계에서 매체인 동시에 소품이 되어가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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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 서평에서 독서 경험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그 경험이란 책의 메시지를 따라가며 저자와 대화하는, 텍스트에 한정된 경험이었다. 책을 읽는 이유도 성장보다는 세계 탐구에 가까운 데다, 몰랐던 걸 알게 되었을 때 도파민이 뇌를 적시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다시 책을 읽게 하는 순환고리가 모 스포츠협회의 카르텔만큼이나 단단하다 보니, 『읽는 감각』이 펼쳐놓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담글 가능성이 그리 크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변화가 불만이냐면,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독서율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는 와중에, 책 외에도 우리가 소비하는 거의 모든 제품이 감각 경험을 제공하는 시대에, 독자 나아가 출판사들이 변하는 걸 탓해봐야 변화를 거부하다 단두대에 오른 ‘왕당파’밖에 더 되겠나. 도리어 새로운 독자 덕분에 지금까지 좋은 책이 계속 출간되고 있으니, 그분들께 감사해하면서 내 방식대로 책을 즐기면 될 일이겠지. 아니, 책을 다르게 감각해주시는 분들이 더 늘어나서 출판 시장이 “단군 이래 최초로 전년 대비 성장 기록!” 이런 뉴스를 듣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읽기의 바깥에서 책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분들이라면 『읽는 감각』은 내가 『적독 생활』에서 느꼈던 것과 흡사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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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아!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0』과 『유혹하는 글쓰기』 개정판은 사고 싶긴 했다. 구시대의 유물도 새 시대의 빛을 피할 수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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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외주 -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
홍진기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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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했습니다.

지난 6월 1일 업로드한 『뇌 과학의 모든 역사』 서평에서 말했듯이 나는 인공지능(AI)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편이다. 인간 지능(자연지능)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와중에, 인간 지능의 어떤 강약점을 뛰어넘고 보완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와중에, 어쨌든 다 해내겠다는 AI 회사들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AI의 성능 향상보다도 오히려 AI의 출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어날 변화들이 좀 걱정스럽다. 일자리 축소리든지 과제 작성 시 높아지는 AI 의존도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이런 변화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대체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AI 개발사들의 희망사항을 필터링 없이 수용하고 그들의 입지를 꾹꾹 다져주는 현상 같아 마음이 좀 꺼림칙해진다.몇몇 돈 많은 너드(Nerd)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기는 것 같아서 더 그렇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를 텐데, 나는 AI의 발전 속도보다는 쓰임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럼 또 “무엇을, 어떻게?”라고 묻는 이들이 있겠지? 그분들을 위해 내가 『사고외주』(@across_book)를 먼저 읽어봤고, 꼭 한번 같이 읽어보자고 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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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답이 빨리 나오는 시대에 우리가 왜 굳이 힘들게 생각해야 하나요?” 언뜻 그럴 듯해 보이는 질문이 『사고외주』의 문제 의식이다. 사실 무작정 답을 내놓기도 애매한 것이, 어떤 작업은 정말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운영 결과보고서를 자주 작성하는데, 며칠이 걸리던 초안을 몇 분 안에 그럴 듯하게 해내는 걸 보면, 안 쓰는 사람이 도태되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고외주』는 (‘답정너’의 뉘앙스가 또렷하게 담긴) 이 질문에 다른 답을 내어놓는데, 나는 그 답을 “이것저것 다 맡기다 보면 도태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정도로 요약해보겠다. 어떤 영역에서 AI는 분명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지만, AI에게 맡길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정작 미래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능력이 무어냐면, 저자는 정체성, 욕망, 윤리를 꼽는다. 여기에서 조금 적극적으로 행간을 읽어보면, 나는 문제 설정과 해결책의 적합성 도출에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원하는지 알아야 문제(question)를 설정할 수 있고, 그 해법이 문제(problem)를 일으키지는 않는지를 판단하는 것만큼은 AI가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자의 경우, 명시적인 문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AI의 해결 능력이 인간 대비 0.1% 수준에 불과하다는 연구가 있었으며, 후자의 경우 개발자의 성향이 알고리즘에 반영될 수 있다는 점에서(알릴레오북스 최태웅 의장 편 참고) ‘AI에게 맡겨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이미지에서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AI 답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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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답이 빨리 나오는 시대에 우리가 왜 굳이 힘들게 생각해야 할까? 저자의 답은 ‘그렇다’이고, 나도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자신 있게 답하기에는 몇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가령 AI의 활용에 따른 ‘인지적 부담 덜기’1️⃣가 비판/반성/분석 추론 능력의 저하를 유도하는 것은 대체로 입증되었으나, 도구가 AI인 경우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라는 점이다. 현재 AI 활용과 사고력 저하 사이의 인과 방향이 확인되지 않았고(현재는 상관관계까지만 확인), 상관 관계를 확인한 연구 공통으로 AI의 사용 방식에 따라 오히려 추론 능력 향상될 수 있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A근거 문헌 확인 완료).

다만, AI 시대에 필요한 인간 능력의 향상을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한 방법들은 소개한 방법들은 실제로 입증된 방법인 만큼, ‘대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하고 싶다면 『사고외주』를 꼭 읽어보는 게 좋겠다. 참고로 책에는 없지만, (비판적) 독서도 사고력 향상에 괜찮은 방법이라고 하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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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지적 부담 덜기(cognitive offloading): 외부 도구를 사용해 정보를 저장하거나 처리함으로써 내부 인지 자원을 절약하는 것

덧 1. 참고문헌을 표기해주었다면 더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책의 분량 때문인지 실리지 않은 점이 아쉽다.

덧 2. 나는 인공지능을 공부할 때 뇌과학 분야의 책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업계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살피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업계 종사자에게 투자 유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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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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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나는 니체라는 바다 한가운데 빠져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른손에는 망치를 들고서 세상의 가치를 모두 부숴버리는(써놓고 나니 얼굴을 들 수가 없네).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부끄럽긴 하지만, 그 또한 내 일부였다는 걸 애써 지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때 나는 (그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우울감이 절정에 다다랐고, 니체의 철학은 최선의 돌파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500년 가까이 세계를 억압해온 객관적 질서를 전복하는 차이의 철학, 운명을 긍정하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내는 초인(위버멘쉬)의 철학. 나를 홀려버린 니체의 철학이었다. 극에 달했던 정신적 방황을 니체의 철학과 함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완역되었던 니체 전집(책세상 판)을 사서 경전처럼 읽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다. 그동안 우울감은 현대 의학이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극복했고 방황도 그럭저럭 잠재웠지만, 여기에 니체 철학의 기여도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다. 세상 일 때문에 철학을 진지하게 파고들 겨를이 없었고, 니체가 남긴 흔적도 세월의 바람과 함께 희미해졌으니까. 그런 와중에 『니체를 쓰다』 서평을 읽었고, 문득 니체를 파고들었던 그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니체는 어떻게 다가올지, 지금의 나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들 모두는 확고하고 분명한 걸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을 나아가는 데 반해, 니체는 항상 쫓기면서 자신도 모르는 길로 접어들곤 했다. 이런 이유로 니체의 인식의 역사는(돈 후안의 모험처럼) 완전히 극적으로 형성되었고, 위험하고 놀라운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끊임없는 흥분의 도가니속에서 돌발적 급전으로부터 더 높은 단계로 뛰어 오르다가, 결국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버리는 하나의 비극이었다.” p.57

『니체를 쓰다』에서 다시 만난 니체는 여전히 서양 세계를 규정지은 질서를 깨부수며 새로움을 탐닉하던 철학자였으며, 그의 철학은 언뜻 규격 바깥의 세계(혹은 사람)를 무시하면서 생겨나는 모순을 지적한 『평균의 종말』의 메시지와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철학에 다시 한번 주목할 수도 있었겠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인식이라는 것에서 “맹안盲眼은 오류가 아니라 비겁”이고, 선한 마음은 범죄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치와 아픔을 고려하고, 알몸의 절규나 추함에 대해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종 한계까지 가지 않는 진리, 철저함이 결여된 진실성은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이 때문에 니체의 엄격함은 태만이나 소심한 사고로부터 결단을 위한 성스러운 의무를 소홀히 하던 모든 자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p.72

적어도 이 책에서 내가 읽은 니체는 더 나은 것, 더 높고 위대한 것을 갈망하는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그가 추구했던 차이는 질서에서 소외된 약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위대함을 위해 투쟁하는 개인(초인)을 위한 것이었을 뿐, 공존하는 세계를 지지하지 않는다. 니체가 ‘파시스트’였다는 일부 평론가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는 츠바이크가 그린 니체(와 그의 철학)를 강자의 언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예술의 테두리에 가둬두었다면, 이 책을 읽으며 20대 시절에 보냈던 공감을 온전히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삶이 예술보다 더 크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되었고, 초인이 될 수 없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삶 또한 긍정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때와 다른 나는 “선한 마음은 범죄”가 되고, “수치나 아픔을 고려하고” “추함에 대해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는” 그의 철학에서 더는 이정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니체를 쓰다』 속 니체와 그의 철학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격정적인 문체를 만나,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 어느 책보다 또렷한 니체를 나에게 데려다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또렷하게 내 앞에 나타난 니체의 초인 때문에 나는 니체에게서 여러 발짝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초인이 되기에는 버거운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니체를 쓰다』는 좋은 책이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작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내가 변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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