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뇌를 찾아서 - 가장 유쾌하고 지적이며 자극적인 신경과학 가이드
샨텔 프랫 지음, 김동규 옮김 / 까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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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를 찾아서』는 좀 특이한 과학책이다.  대개 과학 서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를 전해주는 것과 비교할 때, 저자인 신경과학자 샨텔 프랫은 “여러분 각자의 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는지 잘 알려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하는데(p.20), 그러니까 개개인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뇌과학 책 한 권을 썼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집필 동기는 매우 간명한데, “모든 두뇌는 그야말로 독특하고 유일”하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p.20).


저자는 차이가 발생하는 원리, 그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거나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본다. 여기에서는 1장에서 다루는 편향성에 대해서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책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뇌는 체계적으로 기능을 분담한다고 한다(창의력과 분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것). 좌뇌가 구체적 사실(나무)에 더 주목하는 편이라면, 우뇌의 경우 전체적인 윤곽(숲)에 특화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뇌를 활용하는 수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좌뇌를 자주 활용한다면 디테일에, 우뇌를 자주 활용한다면 큰 그림에 주목한다는 뜻이다(참고로, 좌우 뇌 가운데 더 자주 활용하는 쪽은 더 큰 반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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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차이의 발생 영역을 여덟 가지로 정리해 소개하지만, 여기에서 파생된 행동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책이 담지 못한 부분까지 따지면, 세상에 존재하는 뇌의 개수만큼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책 제목을 빌려서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일전에 『뇌 과학의 모든 역사』의 서평에서도 썼지만, “지금 과학의 방식으로는 우리 뇌, 나아가 인간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과학이 뇌와 행동의 이러저러한 경향을 관찰할 수는 있겠지만, 이 경향이 특정 개인에게 온전히 적용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들었던 생각은 과학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과학적’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공산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과학’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팩트’로 통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팩트’에서 벗어난 현상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덧씌워졌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차별을 양산해내지 않는지. 『나의 뇌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러한 차이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프랫이 책에 쓴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적용되는 방식이란 사실 아무에게도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p.20~21) 


이 책을 통해 개별 사람의 차이를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더 큰 과제를 남겨줬다고 생각한다. 세계와 사람을 진실과 거짓, 옳음과 틀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연습이 그것이다. 이 연습을 혼자 한다면 딱히 무슨 의미가 있겠나. 더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읽기 만만한 책은 아니지만, 다 읽으면 그만큼 보람이 큰 책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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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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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우리는 문화, 사상, 도덕, 의례, 예술 등 우리 인간에게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대체로) 고유한 활동을 하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 대화를 나누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림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든다. 윤리적 판단을 고민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협상한다. 사원이나 교회, 성스러운 숲에서 신을 숭배하기도 하고 추억을 물려주기도 한다. 가르치고 음악을 만들고 농담하고 타인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성적인 설명을 하려고 애쓰기도 하며 대체로 인간다운 일을 한다. 이 영역이 바로 온갖 휴머니스트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다.” p.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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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책이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실망했느냐면,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대와 달라서 오히려 좋았다고, 읽는 내내 페이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행복했다고 말해야겠다. 인문서와 영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식견이 좁았던 모양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은 휴머니즘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휴머니즘? 인간 중심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마당에, 휴머니즘? 이런 의문(을 가장한 사실상의 힐난)이 떠올랐고, 또 이 이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단일한 이념으로 간주하기에 휴머니즘은다소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관성 있는, 공유된 휴머니즘 전통이 있으며 이 모든 휴머니스트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채롭지만 뜻깊은 실로 엮여 있다. 이 책에서 바로 그 여러 가닥의 실을 따라가보려고 한다.”(p.15) 그러니까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휴머니스트인 줄도 모른 채 휴머니즘을 실천해온 여러 시대 다양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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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의 인용문은 인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정치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부터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남긴 다양한 결과물을 추적하며 저자가 길어낸 휴머니스트의 특징이다. 때때로 목숨까지 바쳐가며 앎에 대한 호기심을 채웠으며, 새로운 책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먼 길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후대에 적극적으로 전하려 했던 사람들. 종교나 이념의 독단을 항상 경계하면서 진실을 위해 끊임없이 동료와 소통하던 사람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아름다운 문장과 농담을 끊임없이 고민했던, 사람다운 삶을 위한 윤리를 함께 토론했던 이들. 이 책에서 만난 그들이 곧 휴머니스트였고, 그들의 실천이 휴머니즘이었다.

 

또 하나, “오직 연결.”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1879~1970)가 자신의 소설 『하워즈 엔드』에서 반복하는 문구. 세라 베이크웰은 휴머니즘 전통을 세우기 위해 이 말을 길잡이로 삼는다. 실제로 2026년의 나는 이 책을 통해 7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전통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지식, 더 나은 글을 열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과 나는 숙고, 기록, 읽기처럼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해 연결된것이다. 휴머니즘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인 셈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누가 뭐래도 어쩔 수 없는 그들의 후배였다는 사실을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 나 또한 위대한 휴머니스트의 후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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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한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문학, 윤리, 연결 등을 이뤄냈지만, 차원이 다른 악행과 비극 또한 인간 인지 능력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오래전 제국주의자들은 지적 능력의 차이에서 이민족, 생물종, 지구 환경 정복의 정당성을 찾았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생물종은 꿈도 꾸지 못할 규모의 학살이 지금도 일어나는 중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간다움 또한 양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자가 한데 모은 휴머니즘(적 전통)이 인간다움의 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에게는 인간다움의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동족과 다른 동물종, 나아가 지구를 파괴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이기에 그것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설령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휴머니즘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오늘날의 휴머니스트들이 고쳐가면 될 일이다. 함께 고민하면서 더 나은 세계를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과 함께 휴머니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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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상상력 - 영웅과 우상의 시대를 넘어서
심용환 지음 / 사계절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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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며 생활하는 세계의 대부분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14대, 15대 대통령을 역임한 10년간 만들어졌다. 공직자의 재산 형성 과정을 검증하는 일은 물론이요,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 제도, 미국식 기업 경영 방식과 IT 산업의 발전, 그리고 남북 관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문제의 해결책까지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경제와 생활 일반에는 두 전임 대통령의 흔적이 깊고 넓게 남아 있다.”(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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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역사』에 이어 같은 작가의 책 『리더의 상상력』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은, 두 책이 다룬 소재는 달라도 문제의식과 해법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신화의 역사』 서평에서 과거 사람들이 신화를 통해 가치를 공유한 것과 달리 현대인들은 가치의 부재 속에 도리어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리더의 상상력』에서 우리가 기꺼이 따랐던 가치를 제시한 두 명의 정치인을 만났다. 바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그 주인공이다.

『리더의 상상력』에서 심용환 작가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의 통치를 2020년대 한국 사회의 출발로 꼽는다. 극단화된 양극화와 그로 인한 갈등 때문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 유산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가령 부당한 권력을 탄핵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 의식과 민주 제도, 여전히 최상위권 경쟁력을 보여주는 다양한 산업 포트폴리오, 케이팝과 영화 등 소프트 파워까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공직자 재산 공개와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같은 김영삼의 정치개혁, 그리고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실행한 산업 구조조정, 과감한 IT 산업 도입, “지원하되 간섭은 않는다”로 대표되는 김대중의 비전이 크게 기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는 독재와의 투쟁이라는 배경과 두 사람의 성격(추진력의 김영삼, 숙고의 김대중) 등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 이력에서 그들이 제시하고 일부는 성취한 정치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비전이 특별했던 것은, 저자의 말대로 두 사람이 2020년대 한국을 있게 한 첫걸음인 동시에, 비전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권력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세운 기초 위에서 우리는 세계적인 민주국가이자 산업국가가 되었고, 자랑할 만한 소프트 파워를 보유하게 됐다. 정치에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한편 나는 두 사람의 비전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각자의 비전을 통해 정치의 소중함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신화의 역사』 서평에서 나는 세속적 이념이 종교를 대체한다는 정치학자 샤디 하미드의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자리를 가장 크게 차지한 것은 정체성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극한의 갈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치철학자 수전 니먼의 말대로 정치는 부족화되었고, 정체성 바깥의 문제는 외면하게 되었다는 것. 한국 정치 최대의 이벤트인 대통령 선거가 “상대편 정파를 청산할 우리 편 대통령 선출 과정”이 되어가는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김대중 이후로 정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강렬해졌고 이제는 정체성이 사회적 과제를 압도한다. 이 분열이 더 나은 사회로 이어질까?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바로 지금 김영삼과 김대중의 비전과 리더십을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흔들리는 와중에, 공동체에 던져진 과제는 어느 때보다 무거워진 요즘이다. 두 정치인이 제시하고 시민들이 공유했던 비전이 절실해졌다.




덧. 정치적 리더십과 비전의 관점에서 복기할 만한 대목 위주로 정리하다 보니 김영삼과 김대중의 한계를 다루지 못했는데, 심용환 작가는 두 정치인의 한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나 또한 격하게 동의한다. 다만, 분량이 한없이 길어질 테므로 그 한계는 책을 통해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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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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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분별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이 지혜로운 생각이 바뀔 이유는 없다.” (p.424-425)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 입문을 도와줄 책을 찾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곧장 구매한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① 후성유전학의 정의와 기초 메커니즘, ②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은 사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기초 지식이 많지 않은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대략의 후성유전학을 정리해보자. 정의부터 살펴보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의 염기서열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참고).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 써보자면, 유전자가 같더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전자의 표현형이 달라질 수 있으며 심지어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 그 이러저러한 이유는 바로 환경이 되겠다.


DNA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메커니즘 가운데 제일 알려진 것이 ‘DNA 메틸화’라고 한다.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마치 스파게티 접시 위에 뿌린 후추 입자가 파스타 가닥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p.84-85, 반대로 떨어지는 것 또한 가능). 그다음으로 ‘히스톤 아세틸화’가 있다. 히스톤은 DNA를 감아 압축 및 포장하는 염기성 단백질로서,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p.86).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는 DNA의 특정 분절에 영향을 미치는데, 두 메커니즘을 통해 염색질의 특정 부분이 열리거나 닫히면서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것이다(p.87).


이와 관련해 저자는 발달 심리생물학자인 마이클 미니 연구팀의 실험을 소개한다. 어미 쥐의 양육 방식에 따라 새끼 쥐에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한 실험이었는데, 다정하지 않은 개체가 출산한 새끼 쥐가 다정한 대리모 쥐의 양육을 받았을 때, 해당 새끼 쥐는 친모의 성격과 무관하게 더 다정한 개체로 자랐고, 뇌 특정 영역의 세포에서 메틸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미니의 연구는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새폴스키는 이 연구를 후성유전의 고전 연구라고 평가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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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은 이래저래 내 호기심 유발에 최적화된 신생 학문이었는데, 첫째 최근 독서 최고의 화두였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박 근거를 제공해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배웠던 옛날 사람(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에 비춰 보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매우 훌륭한 후성유전학 입문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행동’에 한정되어 있었던 궁금증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 동시에 그동안 내가 갇혀 있던 틀에서 탈출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경과학 책을 읽으면서 입이 닳도록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왔는데, 저자는 환경이 우리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세포 변형과 기억의 연관성, 나아가 그것이 후대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확인해주었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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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껏 던지지 못한 질문이 남았다. 첫째, 그럼 유전자의 역할은 대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환경의 어떤 측면이 기억 또는 다른 유전 요소에 미치는 영향에만 주목해왔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발심과 유전학 지식 부족이 일으킨 (대환장) 콜라보였는데,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는 듯 저자는 정확히 그 지점을 지적한다. 


“한 사람의 염색질은 DNA와 그에 결합한 메틸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메틸기들은 그가 아침으로 먹은 음식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DNA의 메틸화된 부분들은 DNA와 메틸기 각각이 아니라 서로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 지닌 속성에 따라 할 일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DNA와 환경 요인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p.409, 강조는 서평자)


내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유전자(DNA)와 환경(메틸기)이 따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어떤 화학적 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스타 면에 묻은 후추가 아니라, 밀가루와 후추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특수한 면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솔직히 정말 궁금했는데도 그동안 환경을 반복해 강조하느라 놓친 질문이었는데, 저자가 인용한 주장이 단서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이 후성유전학 연구의 유아기라면,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는 배아기에 해당한다.”(p.423) 다시 말해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을 만나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다만,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맞는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며, 우리는 상황이 ‘자연법칙’에 맞게 전개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발달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p.419)


저자는 위 서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한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더라도 반대편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특정 성인의 애착 부족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그 애착 부족을 엄마와의 유대 부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엄마와의 유대가 충분하더라도 애착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유대가 충분치 못하더라도 애착이 많은 성인으로 자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p.362)


실제로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의 해악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당장 “아이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많은지. 다른 한편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령대별 필수 육아법’ 같은 정보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 또한 적지 않다.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이 유전자 결정론만큼이나 무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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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후성유전학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이 새로운 분야가 ‘가능성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심지어 생애 초기의 특정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이후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특히 저자는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이나 암 치료 등에서 후성유전학의 기여 가능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데, 책을 보면 실제로 2015년 당시에도 관련 성과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ADHD에 시달리는 나에게도 반가운 가능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은데, 바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가능성 또한 열려 있을 거란 점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체념하듯 말해왔고 솔직히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이 옳다면 신념이 극과 극이어도 대화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고쳐 쓴다”는 말을 운운하며 지레 포기할 필요가 없게 된 거다.


하나 더. 최근 생물학, 특히 신경과학이나 유전학의 발견이 과학과 인문(사회)학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대로 “사회 집단의 상호작용, 가족 역학, 어머니의 보살핌”, “먹이 피라미드와 식품 보조제”, “수질, 토양, 대기 오염물질” 같은 환경이 “부분적으로는 후성유전체에 침범하여 그것을 변형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고 표현형을 바꿀 수 있다”면(p.414-415), 사회문화적 현상을 하나의 분과 학문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책을 시작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 독서를 강화하기로 결심했고, 이것만으로도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을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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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탱하는 힘 - 혁신이라는 망상을 넘어서기
리 빈셀 외 지음, 박서현 외 옮김 / 이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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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점점 빠르게 변하면서 이제 누구나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혁신의 선두주자 미국을 볼 때면 여러 이유로 놀라게 되는데, 정치가 망가지는 와중에 기술 패권을 손에 꼭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번, 동시에 기본 생활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다는 데 또 한번 놀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가 고속철도 하나 없는 게 나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 읽은 『지탱하는 힘』은 혁신 강박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기업이나 미디어, 이제는 정치권까지 입만 열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진다”고 말하다 보니, 정작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이 소개하는 지탱하는 것들에는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의료, (건물 청소 등 유지보수 및 노약자 보살핌까지 아우르는 의미의) 돌봄 등이 있다. 


그럼 생각해보자. 현재 상용화된 혁신 제품 중에서 앞서 나열한 것들보다 삶에 중요한 것들이 있을까? 가령, 폭우 때문에 지하철이 멈추거나 도로가 잠긴다면? 출퇴근을 비롯한 일상이 완전히 멈춰 설 것이다. 혁신과 비교할 때 (저자들이 혁신의 대립항으로 설정한) ‘유지보수’는 주목을 받지 못할뿐더러, 종사자들의 대우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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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들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언어’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혁신-언어’를 “혁신의 중요성을 떠들어대면서 그 단어를 남용해 유행어로 만드는 숨 가쁜 방언”으로 설명한다. 혁신-언어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이 혁신에 매몰되도록 유도하고, 이로 인해 사회 자원을 낭비하는 동시에 필수적인 유지보수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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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소자동차 회사 니콜라 파산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그럴듯한 혁신-언어만 있으면 돈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지만 유지보수는 아무리 강조해도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이런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책에 쓰인 여러 이유 중 두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맹목적인 경제 성장 추종을 들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규 수익을 창출할 필요가 발생했고, 혁신-언어가 그럴듯해 보이기만 해도 투자자는 물론, 국가 예산이나 정책까지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 눈에 띄지 않는다는 유지보수의 특성을 들 수 있겠다. 앞서 폭우의 사례를 들었지만, 극적인 재난이 아닌 한 유지보수는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고장이나 피해가 당장 눈에 띄지 않으니 유지보수 또한 우선순위에서 점점 밀려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지연이 역사학자 스콧 놀스가 제안한 ‘느린 재난’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덮친 허리케인 마리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를 64명으로 집계해 발표했지만, 이후 1,427명으로 수정했고, 최종 공식집계는 2,975명이었다. 허리케인이 파괴한 인프라, 특히 전력망 미복구 때문에 사망한 인원이 폭증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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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이런 의문이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라지만, 그 성장마저 없으면 일자리 창출은커녕 있던 일자리마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유지보수의 중요성에 충분히 공감했음에도,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저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지보수의 중요성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는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정치인과 공무원, 투자자들에게 유지보수가 얼마나 ‘돈 되는 분야’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유지보수의 가치를 계량화해보는데, 비록 실험적인 수준이었지만 출발선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권력과 진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인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혁신이 공동 번영으로 이어지려면, 기술의 방향을 함께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나는 이 주장에 십분 공감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역사에서만 찾았다는 게 다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렇게 『권력과 진보』가 남긴 질문에 『지탱하는 힘』이 유지보수라는 답을 내어놓은 것 같아 그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달까.


이 책을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를 함께 유지보수하려면 더 많은 동조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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