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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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분별 있는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경험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이 지혜로운 생각이 바뀔 이유는 없다.” (p.424-425)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후성유전학 입문을 도와줄 책을 찾다가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곧장 구매한 책이었는데, 다 읽고 나니 아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① 후성유전학의 정의와 기초 메커니즘, ② 유전자가 환경의 영향을 받은 사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고, 기초 지식이 많지 않은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대략의 후성유전학을 정리해보자. 정의부터 살펴보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DNA의 염기서열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참고).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 써보자면, 유전자가 같더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전자의 표현형이 달라질 수 있으며 심지어 유전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 그 이러저러한 이유는 바로 환경이 되겠다.


DNA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메커니즘 가운데 제일 알려진 것이 ‘DNA 메틸화’라고 한다.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마치 스파게티 접시 위에 뿌린 후추 입자가 파스타 가닥에 달라붙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p.84-85, 반대로 떨어지는 것 또한 가능). 그다음으로 ‘히스톤 아세틸화’가 있다. 히스톤은 DNA를 감아 압축 및 포장하는 염기성 단백질로서,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이라고 한다(p.86).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는 DNA의 특정 분절에 영향을 미치는데, 두 메커니즘을 통해 염색질의 특정 부분이 열리거나 닫히면서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는 것이다(p.87).


이와 관련해 저자는 발달 심리생물학자인 마이클 미니 연구팀의 실험을 소개한다. 어미 쥐의 양육 방식에 따라 새끼 쥐에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한 실험이었는데, 다정하지 않은 개체가 출산한 새끼 쥐가 다정한 대리모 쥐의 양육을 받았을 때, 해당 새끼 쥐는 친모의 성격과 무관하게 더 다정한 개체로 자랐고, 뇌 특정 영역의 세포에서 메틸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미니의 연구는 로버트 새폴스키의 『행동』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새폴스키는 이 연구를 후성유전의 고전 연구라고 평가하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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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성유전학은 이래저래 내 호기심 유발에 최적화된 신생 학문이었는데, 첫째 최근 독서 최고의 화두였던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박 근거를 제공해줄 거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배웠던 옛날 사람(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에 비춰 보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매우 훌륭한 후성유전학 입문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행동’에 한정되어 있었던 궁금증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 동시에 그동안 내가 갇혀 있던 틀에서 탈출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경과학 책을 읽으면서 입이 닳도록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왔는데, 저자는 환경이 우리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세포 변형과 기억의 연관성, 나아가 그것이 후대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확인해주었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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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껏 던지지 못한 질문이 남았다. 첫째, 그럼 유전자의 역할은 대체 뭘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환경의 어떤 측면이 기억 또는 다른 유전 요소에 미치는 영향에만 주목해왔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반발심과 유전학 지식 부족이 일으킨 (대환장) 콜라보였는데,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는 듯 저자는 정확히 그 지점을 지적한다. 


“한 사람의 염색질은 DNA와 그에 결합한 메틸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메틸기들은 그가 아침으로 먹은 음식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DNA의 메틸화된 부분들은 DNA와 메틸기 각각이 아니라 서로 결합된 하나의 전체로서 지닌 속성에 따라 할 일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러니 DNA와 환경 요인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p.409, 강조는 서평자)


내가 올바로 이해했다면, 유전자(DNA)와 환경(메틸기)이 따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어떤 화학적 결합을 이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파스타 면에 묻은 후추가 아니라, 밀가루와 후추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특수한 면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어떤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솔직히 정말 궁금했는데도 그동안 환경을 반복해 강조하느라 놓친 질문이었는데, 저자가 인용한 주장이 단서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이 후성유전학 연구의 유아기라면,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는 배아기에 해당한다.”(p.423) 다시 말해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을 만나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다만,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그럭저럭 맞는 예측을 하는 것은 가능하며, 우리는 상황이 ‘자연법칙’에 맞게 전개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발달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p.419)


저자는 위 서술의 연장선상에서 한 가지 문제를 더 제기한다.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하더라도 반대편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특정 성인의 애착 부족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그 애착 부족을 엄마와의 유대 부재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엄마와의 유대가 충분하더라도 애착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유대가 충분치 못하더라도 애착이 많은 성인으로 자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두 관점 다 중요한 발달 과정들이 전개되기도 전인 삶의 초기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결정된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으며, 똑같이 근거가 없다.” (p.362)


실제로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의 해악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당장 “아이 옆에는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많은지. 다른 한편으로는, 소셜 미디어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연령대별 필수 육아법’ 같은 정보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 또한 적지 않다. 후성유전학적 결정론이 유전자 결정론만큼이나 무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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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후성유전학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이 새로운 분야가 ‘가능성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심지어 생애 초기의 특정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이후에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특히 저자는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이나 암 치료 등에서 후성유전학의 기여 가능성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데, 책을 보면 실제로 2015년 당시에도 관련 성과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ADHD에 시달리는 나에게도 반가운 가능성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은데, 바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가능성 또한 열려 있을 거란 점이다. 너무 많은 이들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체념하듯 말해왔고 솔직히 나 또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성유전학이 옳다면 신념이 극과 극이어도 대화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고쳐 쓴다”는 말을 운운하며 지레 포기할 필요가 없게 된 거다.


하나 더. 최근 생물학, 특히 신경과학이나 유전학의 발견이 과학과 인문(사회)학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다. 저자가 인용한 대로 “사회 집단의 상호작용, 가족 역학, 어머니의 보살핌”, “먹이 피라미드와 식품 보조제”, “수질, 토양, 대기 오염물질” 같은 환경이 “부분적으로는 후성유전체에 침범하여 그것을 변형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고 표현형을 바꿀 수 있다”면(p.414-415), 사회문화적 현상을 하나의 분과 학문이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책을 시작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 독서를 강화하기로 결심했고, 이것만으로도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의미 있는 독서 체험을 남겨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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