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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탱하는 힘 - 혁신이라는 망상을 넘어서기
리 빈셀 외 지음, 박서현 외 옮김 / 이음 / 2026년 3월
평점 :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점점 빠르게 변하면서 이제 누구나 혁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혁신의 선두주자 미국을 볼 때면 여러 이유로 놀라게 되는데, 정치가 망가지는 와중에 기술 패권을 손에 꼭 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번, 동시에 기본 생활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다는 데 또 한번 놀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나라가 고속철도 하나 없는 게 나에게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 읽은 『지탱하는 힘』은 혁신 강박이 낳은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기업이나 미디어, 이제는 정치권까지 입만 열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뒤처진다”고 말하다 보니, 정작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이 소개하는 지탱하는 것들에는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의료, (건물 청소 등 유지보수 및 노약자 보살핌까지 아우르는 의미의) 돌봄 등이 있다.
그럼 생각해보자. 현재 상용화된 혁신 제품 중에서 앞서 나열한 것들보다 삶에 중요한 것들이 있을까? 가령, 폭우 때문에 지하철이 멈추거나 도로가 잠긴다면? 출퇴근을 비롯한 일상이 완전히 멈춰 설 것이다. 혁신과 비교할 때 (저자들이 혁신의 대립항으로 설정한) ‘유지보수’는 주목을 받지 못할뿐더러, 종사자들의 대우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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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들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언어’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혁신-언어’를 “혁신의 중요성을 떠들어대면서 그 단어를 남용해 유행어로 만드는 숨 가쁜 방언”으로 설명한다. 혁신-언어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이 혁신에 매몰되도록 유도하고, 이로 인해 사회 자원을 낭비하는 동시에 필수적인 유지보수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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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소자동차 회사 니콜라 파산 사태에서 알 수 있듯, 그럴듯한 혁신-언어만 있으면 돈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지만 유지보수는 아무리 강조해도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이런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 책에 쓰인 여러 이유 중 두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맹목적인 경제 성장 추종을 들 수 있겠다. 시간이 갈수록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규 수익을 창출할 필요가 발생했고, 혁신-언어가 그럴듯해 보이기만 해도 투자자는 물론, 국가 예산이나 정책까지 빨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 눈에 띄지 않는다는 유지보수의 특성을 들 수 있겠다. 앞서 폭우의 사례를 들었지만, 극적인 재난이 아닌 한 유지보수는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고장이나 피해가 당장 눈에 띄지 않으니 유지보수 또한 우선순위에서 점점 밀려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지연이 역사학자 스콧 놀스가 제안한 ‘느린 재난’을 유발한다고 하는데,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덮친 허리케인 마리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당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를 64명으로 집계해 발표했지만, 이후 1,427명으로 수정했고, 최종 공식집계는 2,975명이었다. 허리케인이 파괴한 인프라, 특히 전력망 미복구 때문에 사망한 인원이 폭증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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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이런 의문이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지? 그림이 그려지질 않았다. 성장 없는 경제 체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라지만, 그 성장마저 없으면 일자리 창출은커녕 있던 일자리마저 사라질 수 있으니까. 유지보수의 중요성에 충분히 공감했음에도,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저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지보수의 중요성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는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정치인과 공무원, 투자자들에게 유지보수가 얼마나 ‘돈 되는 분야’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유지보수의 가치를 계량화해보는데, 비록 실험적인 수준이었지만 출발선으로 삼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으면서 『권력과 진보』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인 대런 애쓰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혁신이 공동 번영으로 이어지려면, 기술의 방향을 함께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나는 이 주장에 십분 공감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역사에서만 찾았다는 게 다소 아쉬웠던 것 같다. 그렇게 『권력과 진보』가 남긴 질문에 『지탱하는 힘』이 유지보수라는 답을 내어놓은 것 같아 그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달까.
이 책을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를 함께 유지보수하려면 더 많은 동조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