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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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계(關係)하고 있습니까?’ 조금 낯설게 들리는 질문입니다. 보다 일반적인 표현은 질투 어린 혹은 서운한 투의 ‘도대체 우리는 어떤 관계냐?’, ‘우리가 정말 연인(혹은 부부)이냐?’는 관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물음들이겠지요. 우리는 이미 설정된 관계를 확인하려(identify)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관계맺고 있다는 것은 니가 알고 내가 안다, 즉 ‘우리’라는 배타적 관계가 이미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쉽사리 타인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잖아!”라고 판정해버리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관계냐?’라는 질문은 안정적인 관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이)에서는 제기되지 않습니다. 관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관계의 불안과 균열을 반증하는 것이지요. 변심한 애인이나 배우자에게나 이렇게 물으니까요. 이처럼 매번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묶으려는 지배 전략이므로 그 관계는 이미 서로에게 비극일 겁니다. 유동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런 물음으로 구속하길 꿈꾸지만 알다시피 그 꿈은 이루어지기 힘들겠지요.

그런데 이런 변경 가능성이 모든 관계에 전제돼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은 지옥일까요, 아니면 매일 매일이 새로운 자극일까요? 사실 우리가 안정화된 관계를 요구하는 이유는 내 정서와 생각을 무리없이 관리할 수 있고 그것이 생활에 유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잘 참지 못하지만 자극과 파격도 일상의 지루함을 제거하는 선에서만 요구할 뿐입니다. 일상이 파괴되는 강도 높은 충격을 겪는다면 그건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지요(그것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당해야 할 뿐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안정된 관계에서 이탈한 이들이 있습니다.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우리는 고향을 떠나온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경식 선생은 재일(在日)조선인이라는 디아스포라1)적 시각으로 예술과 국민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 줄기차게 이야기해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재독(在獨)일본인 소설가 타와다 요오코와의 왕복서신 교환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 겪은 (서로 다른)고향 상실이 역설적으로 이들을 관계맺게 한 것이지요. 사실 안정된 관계를 요구하고 조절할 수 있는 나는, 그만큼 안정된 정체성을 지닌 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범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아무도 내게 시민임을, 국민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신원 확인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 나는 거주가 확실한, 곧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기저에는 거주 및 국적과 인종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고 구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누가, 끊임없이 확인하고 구분하려고 할까요? 그는 타인을, 자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특정하고 고정된 방식으로 위치시키려는 자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종, 민족, 국민, 거주 등의 소속의 경계가 분명한 자들만이 누구인지 확실합니다. 처음 만나더라도 그들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동향(同鄕) 친구, 동일한 자들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결국 소위 정체성이 불분명한 이들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는 낯선 사람, 이방인들로 구분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같은 집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서 뿌리를 내리고 편히 쉬는 사람들에게는 ‘거주(居住)’ 공간이지만 동베를린에 살고 있는 타와다씨는 ‘집이란 가족도 건물도 아니고 문화와 친구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재독일본인이라는 정체성에 더해 동베를린이라는 불안한 도시를 거처로 삼았습니다. 그 도시는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변경지대로서 불안정한 상황을 거듭했지요. 그녀가 거주하는 집 역시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집이란 안정된 거주를 위한 굳건한 건축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역사를 조망하는 전망대 같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안에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밖을 보기 위한, 밖과 관계를 맺기 위한 전망대 말입니다. 말하자면, 들어가긴 했지만 다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집이 되는 것이지요.2)

이런 식으로 자신의 거처에서 매일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을 하나의 이름(정체성)으로 붙들어 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우리는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을 평생 유지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되고 일관된 것일까요? 사실 현대인은 나고 자란 곳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흘러들어오고, 공룡같은 메트로폴리스가 벌이는 철거와 재개발로 인해 다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나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타국의 궂은일을 찾아 이주 노동자로 모국을 떠나야 합니다. 원치 않는 이동과 내쫓김 가운데 디아스포라의 삶은 자본의 논리와 이방인을 배제하는 동일성의 폭력이 가한 상처 가운데 재구성될 뿐입니다. 안정된 정체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이름도 내적 균열을 거치겠지요.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나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름은 “역사가 할퀴어놓은 상처 같은 것”이 되고, 이 상처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쩌면 나 아니었던 것들, 나의 정체성 바깥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입니다. 즉, “그 상처를 응시하고 있으면 어떤 국가나 일정한 언어권 내부에 갇혀버린 역사가 아닌, 또 하나의 역사가 조금씩 보이”게 되는 그런 과정 말입니다.

이렇게 떠나온 자들, 경계를 벗어나 상처입은 자들에게 거주란, 이제 여행(旅行)과 구분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집으로 되돌아갈 때마다 거주를 확인받아야 하는 서경식 선생의 처지는 본질적으로 ‘난민’ 상태와 다름없지요. 선생에 비해 우리의 처지가 크게 다를까요? 우리 역시 고향을 떠나왔거나 이미 안정된 거주가 파괴됐습니다. 고향은 때로 벗어나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만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려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 곳에서 계속 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들과 떠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나누고, 같은 도시에서도 계급에 따라 다른 생활공간을 영위함으로써 없는 사람들을 주변인, 국외자를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의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삶과 의미란 그 시스템이 한정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디아스포라의 불안정한 주변적 상황이 또 다른 관계를 발생시키는 계기이듯이 말입니다. 타와다씨의 ‘말놀이’가 그 사례로 보입니다. 말놀이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 줍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호명하는 사회의 논리는 사실 우리를 삶의 방식에서나 생각의 차원에서나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부여하는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면 우리는 화석화되고 시스템에 포획돼 버립니다. 타와다씨가 제의하는 말놀이는 그런 시스템을 벗어나는 하나의 대안으로 보입니다. 즉 제도적 언어가 의미를 가두고 생각을 차단한다면, 말놀이는 “그것을 흔들고 풀어내어 손에 들고 바라보고 던져올리고 응시하면서, 씩씩하고 밝고 건방지게, 영리하게, 자유롭게 생각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런 말놀이는 놀이지만 상처받은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언어의 방식을 벗어나서 다른 의미들과 접속할 수 언어적 감수성이 없다면 우리는 상투성에 지배돼 버리지요. 결국 나를 상처 입힌 언어들로 나를 표현하는 기이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입장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삶과 놀이의 구분을 벗어나 경계에서 놀이하는 마음으로 언어를 춤추게 하면서 삶의 낡은 틀을 깨어버려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서경식 선생과 타와다씨의 왕복서신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정주자/이민자라는 이분법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됩니다. 물론 이민자로서의 그들의 처지는 그대로지만, 그들은 그런 정체성과 관계에 구속돼 있지 않기에 고정된 호명에서 비껴 있습니다. 고향, 혈연공동체(가족), 국가라는 특정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의식은 한편으로는 취향과 정서의 일체감이라는 안정된 관계망을 형성시켜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닌 타인을 구분하고 배제함으로써만 성립하는 폭력적인 시스템입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선택 앞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왕복서신이 모아지지 않고 반향하면서 여러 결로 흩어지듯이 우리 각자의 삶도 완결되지 않고 성찰을 거듭하는 가운데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니까요.  


  1)  디아스포라(Diasphora)는 보통 ‘이산자(離散)’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거의 번역하지 않는다. 원래는 초기 기독교 박해 때 떠나온 유대인 난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현재는 고향을 상실한 민족 집단은 물론이고 개인들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이런 맥락에서 보면 거주의 근본 특성을 자신을 평화롭게 보살펴주는 안정된 울타리로 보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어떤 정체성에 근거하는지 드러난다. 그는 거주를 건축된 사물과 함께 사유하는데 여기서 건축은 구획되고 배치되지 않던 이질적인 풍경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다리는 강, 강가 그리고 토지를 서로 이웃이게끔 엮어준다. 다리는 강주변의 풍경으로서의 땅을 결집하며 모아들인다.” 그래서 결국 하이데거는 거주할 능력과 곧 건축할 수 있음을 등치시킨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과 낯선 것들을 자신과 관련시키고 동일시하는 가운데,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운데 하이데거는 상실된 고향을 본질적으로 되찾는다. 마르틴 하이데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강연과 논문󰡕(신상희 외 옮김, 이학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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