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Under the Sky of My Africa
날짜로는 어제가 되겠지만 '오늘' 오전엔 강의가 있었고 오후엔 전시회 관람이 있었다. 그리고는 성적처리하는 데 나머지 시간을 꼬박 쏟아부었다. 별다른 개성이나 성의가 없는 답안지/리포트들을 읽는 일은 나름대로 고역이다. 그나마 잠시 마음을 달래준 것은 한꺼번에 들이닥친 책들인데, 학교에 가보니 얼마전 미국과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에 주문한 책들과 해외도서관에 주문한 자료, 그리고 복사를 맡긴 책들과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까지 모두 합해 15권의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번달 북매거진 '텍스트'까지 포함하면 16권이다). 책을 많이 구해보는 편이긴 하나 이 15권은 올해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해마다 나의 장서는 4-500권씩 불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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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록'을 기록해두기 위해서 집에 들고 온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한권을 집어든다. 푸슈킨 연구논문집인 <나의 아프리카 하늘 아래서(Under the Sky of My Africa)>가 그것인데, 노스웨스턴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나온 책이다(이 대학에선 '러시아 문학과 이론 연구 총서'가 출간된다). 제목에 걸맞게 표지는 까만색이고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초상화가 박혀 있다. 그런데, 어인 아프리카?
![](http://feb-web.ru/feb/pushkin/pictures/V93-164.jpg)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푸슈킨의 외증조부가 표트르 대제의 총신이었던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1696-1781) 장군이었고 그가 아프리카 노예 출신의 흑인이었다. 족보를 따지자면 러시아 최고 시인에겐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 푸슈킨의 그의 조상을 모델로 <표트르 대제의 흑인>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다.
![](http://greal.binghamton.edu/russian/images/pushkin.jpg)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던질 수 있는 질문. "푸슈킨은 흑인이었고 그게 정말 중요한가?" 이 연구논문집은 러시아와 미국의 정상급 학자들이 그러한 물음에 답한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앤솔로지로서는 최고의 책이다. 분류하자면, 이런 게 나의 '전공서적'이며 이런 류의 책이나 논문들을 읽고 그와 유사한 성격의 논문들을 쓰는 게 나의 '전공공부'이다(아직도 간혹 당신의 전공이 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있다).
이미 지난 1999년에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어로 된 푸슈킨 선집이 2종 출간된 바 있다. 그것만으로도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의 체면은 얼마간 유지된다. 단, 아쉽게 생각하는 건 푸슈킨에 관한 국내 출간 단행본 연구서나 논문모음집이 단 한권도 없다는 것(놀라운 일이지만 이건 톨스토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출간되는 탐나는 연구서들을 구해볼 때마다 마음 한켠에서는 매번 그런 비교를 하게 된다. 2009년에는 사정이 좀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나 자신에게도 분발의 채찍질을 가한다.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서'.(점차 인문학은 '니그로의 학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06.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