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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페이지의 재미, 김혜린 단편집 <노래하는 돌>
<불의 검> 완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떡하니 새로운 선물이 도착했다. 총 12편의 알짜배기 단편을 모아놓은 이 책은 500조각의 퍼즐과 함께 포장되어 나에게 배달되었다. 이 단편집에는 20년에 가까운 작가의 작품생활을 갈무리하는 단편들이 선정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1985년 <아홉번째 신화>에 발표된 <그대를 위한 방문자>가 놓이고, 마지막에는 미발표 신작인 <노래하는 돌>이 있다. 1985년에서 2003년, 세기가 바뀌는 시간 속에 놓여진 작가의 스펙트럼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김혜린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작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복판에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창작의 원칙을 충실하게 지킨다. <그대를 위한 방문자>는 지금 보면 다소 낯선 연출법들이 등장한다. 내적 자아와 대화,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 과도한 독백과 내레이션까지. 하지만 이 작품은 솔직한 그대로 80년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경험해야 하는 갈등의 크기다.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단편이다.

<우리들의 성모님> 역시 80년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광산, 도피수배자, 시골 술집여자, 농촌문제 등 매우 복잡한 모순과 갈등이 중첩되어 있지만, 보살처럼 보이는 난주의 모습 하나로 작가의 메시지를 확연하게 전달한다.

1995년작인 <샤만의 바위>와 1996년작인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는 <불의 검>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된 고대 동아시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실 <불의 검>이 보여주는 여러 인물의 구도 중 독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주인공은 붉은 꽃 바리가 아닐까. 두 단편에서 모두 바리의 슬픈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작품은 <히스꽃 필 때에는…>과 <11월의 초상> <붉은 돌의 왕자> <아만테스> 〈XX〉가 있다.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환생과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 SF, 여성성의 연대를 다룬 작품으로 소재와 주제, 연출의 방법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이들 작품 모두에서 20여년 동안 성실하게 만화에 임해온 작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툼하게 잘 만들어진 책의 모양새도 만점.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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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연작 ‘피플’ 한데 묶어 나왔다

순정만화가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를 가진 주인공들이 펼치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이진경(33)씨의 만화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이 30대 여성 만화가는 정통 미술을 전공한 이답게 개성이 강하고 힘이 넘치는 그림체와 짙은 색감의 유화 그림을 구사하지만 전형적인 순정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여성, 비주류 예술가, 동성애자 등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인들로, 순정만화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리얼리즘을 들이댄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주의 만화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작가 이진경씨의 연작 〈피플〉(길찾기 펴냄·각 9800원)이 단행본 두 권으로 묶여 나왔다.

1995년에 첫선을 보인 〈피플〉 시리즈는 2002년 마지막 에피소드가 발표될 때까지 〈윙크〉, 〈믹스〉, 〈나인〉, 〈나〉 등 여러 곳의 만화잡지를 옮겨다니며 연재됐다. 이런 사정으로 독자들이 그 전모를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하게 소화할 매체가 없다는 만화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준다.

〈피플〉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여성들의 공동체인 가상의 ‘시타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남자의 사랑이 식을까봐 다이어트를 하다가 목숨을 잃고, 임신으로 몸이 불어나는 것을 두려워해 중절수술을 받다 숨지며, 남성의 ‘묻지마’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들의 모습이 현실처럼 재현된다. 이런 속에서도 작가는 부제 ‘여성적인 에너지를 품은 세대를 위하여’처럼, 다양한 제한이 존재하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 창의력과 재능을 자유분방하게 표출하는 여성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이런 주제의식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긴 대표작 〈사춘기〉로 이어진다.

이진경씨는 지난 94년 〈게토잼〉으로 데뷔했으며 현재 격월간 만화잡지 〈오후〉에 ‘새’라는 필명으로 〈저기 도깨비가 간다〉를 연재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4/2004/01/0091000042004011601251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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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프레소] 나윤선 새 앨범 'Down By Love'
2003년 12월 17일 (수) 17:15
어쩐지 상당히 정감 있게 다가 온다 싶었는데,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나윤선의 새 앨범 ‘Down By Love’는 전작들에 비해 확연히 다른 질감이다. 소문난 화려한 보컬로 듣는 이를 압도하기 보다는 나지막이 말을 걸어오듯 낮은 포복으로, 어느새 이만치 들어 와 있다.

제목에서 앨범의 전체적 분위기가 충분히 우러난다. 사랑 때문에, 좀 더정확히 말하자면 실연의 상처로 인해 가라 앉은 여인의 마음을 그린 곡들을 모았다. 그녀의 창법 역시 가라 앉았다. 자신만만한 스캣은 뒤로 숨고, 콜로라투라의 아리아를 듣는 듯 정제됐다. 색소폰보다는 기타를 전면에내세운 악기 편성은 이번 작품은 이성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등 3개 국어에 한국어 노래로 이뤄진 이번 3집 앨범은 노래란 결국 언어의 예술이라는 기본적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1995년 파리로 떠나 유럽 최초의 재즈 학교 CIM에 유학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한 자연스런 결실이다. 유려한 발음 덕택에, 그의 재즈에서는 이물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2000년 이래 현지에서 열린 각종 재즈 페스티벌에서 그녀의 정통 재즈는 현지의 고급스런 귀를 매료시켰다.

이번 앨범의 자연미는 철저히 수공업적인 작업 방식을 택한 결과이다. 마치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릿이 자기 집의 작은 녹음기로 취입해 만든 솔로 앨범 ‘Melody At Night With You’를 들었을 때와 같은 아늑함과 친밀감이 전편에 가득하다.

“지난 여름 한달 내내 올리비에 오드(기타리스트)의 집에서 녹음한 거죠.” 윤순나(프랑스에서는 ‘Youn Sun Nah’로 알려져 있다) 퀸텟의 리더로서 하는 말이다. 소편성 악단의 녹음은 하루나 이틀이면 끝나는 게 상례다. 스튜디오 대여료뿐 아니라, 순서를 기다리는 뮤지션 때문에 작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편성을 바꿔서 녹음해 보는 등 실험은 다 해 보았다. 광고음악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드의 발랄한 감성이 한껏 빛을 발한 건 물론이다. 이번 타이틀 곡의 작자이기도 하다.2년 전 프랑스에서 음악일을 하던 친구가 들려 줬던 ‘Into Dust’를 수록한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긴다. “기타로만 구축하는 몽환적이고 넉넉한 느낌이 좋아요.” 유일한 한국 곡 ‘아름다운 사람’에서는 그녀 특유의 청아한 감성은 더욱 빛나는 느낌이다.“중고 시절 교회 다닐 때 대학생 오빠들이 즐겨 부르던 곡이예요.” 제작 당시 동료들은 “왜 분위기를 가라앉히느냐”며 말렸지만, 그녀는 1994년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서 주연인 선녀로 나왔던 인연을소중히 하기로 했다.

그녀의 화려한 재즈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왜 재즈쪽을 억눌렀나’라는. “정말 색다른 스타일의 음악을 해 보고싶었어요.” 에지 그녀는 재즈 스타일리스트란 익숙한 이미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고 있다.

그녀는 머무르지 않는다. 재즈를 본령으로 하되, 자신을 재즈와 동격화시켜 두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는 프랑스 친구의 제안으로 트립합 계열의 곡도 한 번 녹음해 보았다. “재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 재미스러움을 알기에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을생각이다.

1년 내내 재즈 페스티벌이 있고 각지의 재즈 클럽이 자신에게 손을 뻗쳐오는 프랑스에서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내년 2월말까지는 프랑스에서머무르기로 돼 있다. 자신의 그룹과 신보 레퍼터리를 위주로 공연해 나갈생각이다. “일종의 프로모션 투어인 셈이죠.”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한상 미진한 심정이다. 국내 공연 기회가 돌아 오지않기 때문이다. 한국서는 그는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못 한 까닭이 가장 크다. 이제부터는 그녀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2004년 하반기쯤에는 지방 투어에 나서고 싶어요.” 한국의 재즈판에 불어 올 새 바람이 기대된다.

<주간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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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ven 2004-01-23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앨범 참 좋답니다. 전 12월에 열린 나윤선 공연도 갔었는데 두번의 공연으로 그녀의 팬이 되고 말았죠. 앨범도 전부 사게 되더군요. 강추입니다. ^^
 

자유를 연주하는 ‘재즈 소프라노’
2003년 12월 10일 (수) 16:15
그녀는 회피했지만, 노래는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아버지 나영수씨는 국립합창단 초대 지휘자를 역임한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이고, 어머니 김미정씨는 뮤지컬 배우다. 집에는 늘 음악인들이, 음악이 드나들었다. 대학 2학년 때이던 1989년 친구를 따라 프랑스 대사관이 주최한 샹송 대회에 가서 덜컥 1등을 했다. 이때까지도 음악은 ‘젊은 날의 추억이자 취미’였다.

그러나 95년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번데기’ ‘오션 월드’ 등에 출연해 자꾸 노래를 하게 됐다. “나는 노래를 해야 하나 보다.” 당시 갖고 있는 것으로만 부족했다. 결심이 서자 바로 짐을 쌌다. 불문과를 졸업했고, 샹송으로 불렀던 인연은 그녀를 프랑스로 이끌었다. 27살의 도전이었다.

#대학2학년때 얼떨결에 샹송대회 1등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제럴드, 사라 본 등 여성 보컬 대가들의 목소리는 굵고 나직하다. 나윤선은 곱고 가늘어 팝에 더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면 노라 존스처럼 노래 위주로만 하든지. 나윤선은 “유럽에서는 노마 윈스턴, 수잔 아뷰엘, 타미야 등 고음의 재즈 보컬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95년 10월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인 파리 ‘CIM’에 들어가 4년간 공부했다. 졸업 후 동양인 최초로 CIM에서 1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고운 음색에 세밀하고 탄탄한 기교는 유럽 감성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역만리에서 그녀는 비상했다. 학교에서 만난 기욤 노(피아노), 요니 젤닉(콘트라베이스), 데이비드 죠르줄레(드럼), 다비드 니어만(비브라폰)과 퀸텟(5인조) 밴드를 조직해 클럽,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명성을 얻었다. 98년 몽마르트 재즈 페스티벌 콩쿠르에서 2등, 99년 생-모르 재즈 페스티벌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그 해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르 콩쿠르 드 라 데팡스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지난 5월 프랑스 아르트 TV 특집프로그램 ‘파리 재즈 클럽스’는 프랑스 최고의 뮤지션 중 한명으로 그녀를 꼽았다.

“운이 좋았죠.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도 별 어려움을 몰랐고요.”

#27살때 佛로…고운 음색에 기교 입혀

겸양이다. 그녀는 지독하게 공부했다. 보베에 국립음악원 성악과 1등 졸업(96~98년), 상트르 다르 폴리포니크 재즈 보컬 앙상블 연수(96~97년), 나디아&릴리 불랑제 콘서바토리 재즈과 졸업(97~99년). 학위가 아니라 연구를 위해.

‘왜 재즈인가’. “어릴 때부터 ‘왜 악보대로 노래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재즈는 같은 곡이라도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부를 때마다 다르게 부르죠. 스스로 소화해 창조하는 겁니다.”

‘재즈는 뭔가’. “재즈는 자유이고, 포용입니다. 넉넉함이죠. 어떤 음악이든 재즈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앎에 충실했다. 2001년 첫 음반 ‘르플레(Reflet·반영)’의 ‘더 조디 그라인드’라는 곡에서 클리포드 브라운의 트럼펫 연주를 연상시키는 탁월한 스캣과 즉흥연주를 선보인다. ‘블루사이드’에서는 대리석 위에서 상아로 된 공이 튀듯 경쾌하지만, ‘유어 페이스’에서는 착 가라앉아 진중하다. 2집 ‘라이트 포 더 피플’은 유럽에서 연주하던 곡들 위주다. ‘베사메 무초’에서 그녀는 음울함을 최대한 끌어내 어둡게 칠한다. ‘섬타임스 아임 해피’는 듣는 이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다. 밴드가 가진 기량을 최대한 뽐내는 이 곡은 빈틈없는 연주 속에서 선율을 한올 한올 해체해버리는 모달 재즈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럼 이번에 낸 3집 ‘다운 바이 러브’의 정체는. 연구 과제를 잔뜩 담아놓았다.

“앞으로 어떤 가수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재즈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3집에는 쿠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월드뮤직 쪽 노래들에 도전했습니다.”

우울한 브라질 팝 ‘아 메디다 다 파이샤용’에 이어 두번째 곡이 들리기 시작하면 청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사이키델릭 밴드 ‘메이지 스타’의 노래 ‘인투 더스트’가 흐른다. 그녀의 목소리는 즉흥연주를 하는 재즈 가수가 아니라 영국 아트록 밴드 ‘커브드 에어’의 소냐 크리스티나 같은 청아한 고음이다. 스팅이 불렀던 ‘콘시더 미 곤’에서는 착착 감기는 보컬과 리듬감이 뛰어나다. 또 지미 헨드릭스의 ‘매닉 디프레션’에서는 히스테릭한 비명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화려한 연주가 아니라 절제를 통해 탄탄하고 안정된 소리를 추구한다.

#“인기에 연연않고 제 목소리 만들래요”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인 그녀는 공연과 녹음 때문에 제대로 못가르친다고 미안해한다. 내년에는 아예 사직할 생각이다.

미모와 재주를 갖춘 그녀에게는 “큰 음반사나 기획사에 들어가서 좀더 쉬운 노래를 하라”는 유혹이 많다.

“제 귀에는 그런 말이 하나도 안들립니다. 제 노래를 대중이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죠. 음악은 사는 거랑 비슷한 거 같습니다. 남의 요구에만 따라가면 자신은 소모되고 발전은 없죠. 그저 도전하고 노력하는 거죠. 오래 오래 음악하면서 제 소리를 만들고 싶어요.”

인기에 악다구니하지 않는, 쿨(Cool)한 모던 재즈 같은 답변이다.

〈경향신문, 글 최우규·사진 박민규기자 banc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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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주년 기념 단편집 낸 김혜린

"한 편의 뮤직비디오 만든 기분"
'노래하는 돌' 등 11편 담아


만화가 김혜린이 신년 벽두 자신의 만화 이력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북해의 별’로 시작해 ‘비천무’, ‘테르미도르’로 이어지는 걸출한 장편들을 잇따라 낸 그는 ‘순정 만화’를 그리면서도 선굵은 서사로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왔다.

1983년 데뷔, 어느덧 화력20년을 넘긴 그가 이번에 내놓은 단편집 ‘노래하는 돌’(길찾기 출판사)은 데뷔 20년을 기념하는 작품집.

김씨의 호흡은 수십 권씩 이어질 시리즈 읽기의 워밍업으로 첫 두어 권은 넘어서야 하는 유장함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530여쪽이나 되는 두툼한 작품집을 낼 만큼 단편들을 쌓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그를 다시 보게 한다.

작품집에는 1985년 무크지 ‘아홉 번째 신화’에 발표한 첫 단편 ‘그대를 위한 방문자’, 파업이 끝난 광산촌을 배경으로 작가의 사회의식과 여성관을 펼쳐보인 ‘우리들의 성모’(1987년작) 등 모두 11편을 수록했다. 1990년대 중반, “만화 잡지 시작하려면 김혜린 작품부터 확보하라”고 했을 때 ‘마인’이니 ‘이슈’ 등의 창간호에 실린 단편들도 모두 담았다. 그러나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가 4년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신작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노래하는 돌’.


극도로 압축된 스토리·대사
공들인 그림 시화집 보는듯

“스토리를 모두 풀려면 40쪽 분량의 중편이 될 내용인데, 줄이고 줄여서 12쪽으로 만들었어요. 대사를 전부 쓰지 않고, 운율에 맞춰 노래처럼 넣었는데, 그렇게 다 쓰고 나니 무슨 뮤직 비디오같이 됐네요.”

▲ 만화가 김혜린
작품의 장면들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한 쪽 한 쪽 마치 공들인 시화집을 만들 듯 정성을 쏟았다. 반면 줄거리는 극도로 압축했다. 두 남자가 나오고 그들 사이에 죽음이 끼어드는데, 목숨을 걸고 예술을 추구하는 치열한 분위기만 전해질 뿐 명확한 스토리 전개가 없다.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그림에 취한 독자들은 “진짜 줄거리는 뭘까” 하고 상상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야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비천무’에서 끈질기게 사랑의 완성을 추구했던 남녀가 결국 죽음에 이른 것처럼 그녀의 작품에는 죽음이 빈발한다. 이번 신작도 결말은 어김없이 죽음이다. 김씨는 “죽음이 구원일 수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그린다”더니, “내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살아있는 것이 더 잔혹하게 느껴지는 결말은 아직 그려보지 못했다”고 오히려 허를 찔렀다.

작가는 요즘 웹진 ‘we6’(www.we6.co.kr)에 ‘불의 검’을 연재하고 있다. 1992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단행본으로도 나온 작품이지만 10년 넘게 이야기를 지속하며 시리즈 번호를 높여가고 있다. 그것이 끝나면 1998년 시작했다 잠시 중단한 ‘광야’를 마저 그릴 생각이다. 아직 1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3부까지 염두에 두고 대작을 구상 중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내놓으면 뭐든 짐이 된다”며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만 말하겠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1/2004010702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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