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주년 기념 단편집 낸 김혜린
"한 편의 뮤직비디오 만든 기분"
'노래하는 돌' 등 11편 담아
만화가 김혜린이 신년 벽두 자신의 만화 이력을 중간 결산하는 의미있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북해의 별’로 시작해 ‘비천무’, ‘테르미도르’로 이어지는 걸출한 장편들을 잇따라 낸 그는 ‘순정 만화’를 그리면서도 선굵은 서사로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왔다.
1983년 데뷔, 어느덧 화력20년을 넘긴 그가 이번에 내놓은 단편집 ‘노래하는 돌’(길찾기 출판사)은 데뷔 20년을 기념하는 작품집.
김씨의 호흡은 수십 권씩 이어질 시리즈 읽기의 워밍업으로 첫 두어 권은 넘어서야 하는 유장함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530여쪽이나 되는 두툼한 작품집을 낼 만큼 단편들을 쌓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그를 다시 보게 한다.
작품집에는 1985년 무크지 ‘아홉 번째 신화’에 발표한 첫 단편 ‘그대를 위한 방문자’, 파업이 끝난 광산촌을 배경으로 작가의 사회의식과 여성관을 펼쳐보인 ‘우리들의 성모’(1987년작) 등 모두 11편을 수록했다. 1990년대 중반, “만화 잡지 시작하려면 김혜린 작품부터 확보하라”고 했을 때 ‘마인’이니 ‘이슈’ 등의 창간호에 실린 단편들도 모두 담았다. 그러나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가 4년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신작이자 이 작품집의 표제작인 ‘노래하는 돌’.
극도로 압축된 스토리·대사
공들인 그림 시화집 보는듯
“스토리를 모두 풀려면 40쪽 분량의 중편이 될 내용인데, 줄이고 줄여서 12쪽으로 만들었어요. 대사를 전부 쓰지 않고, 운율에 맞춰 노래처럼 넣었는데, 그렇게 다 쓰고 나니 무슨 뮤직 비디오같이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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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 김혜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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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장면들을 그리기 위해 작가는 한 쪽 한 쪽 마치 공들인 시화집을 만들 듯 정성을 쏟았다. 반면 줄거리는 극도로 압축했다. 두 남자가 나오고 그들 사이에 죽음이 끼어드는데, 목숨을 걸고 예술을 추구하는 치열한 분위기만 전해질 뿐 명확한 스토리 전개가 없다.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그림에 취한 독자들은 “진짜 줄거리는 뭘까” 하고 상상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야 한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비천무’에서 끈질기게 사랑의 완성을 추구했던 남녀가 결국 죽음에 이른 것처럼 그녀의 작품에는 죽음이 빈발한다. 이번 신작도 결말은 어김없이 죽음이다. 김씨는 “죽음이 구원일 수 있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그린다”더니, “내 마음이 약해서 그런지 살아있는 것이 더 잔혹하게 느껴지는 결말은 아직 그려보지 못했다”고 오히려 허를 찔렀다.
작가는 요즘 웹진 ‘we6’(www.we6.co.kr)에 ‘불의 검’을 연재하고 있다. 1992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단행본으로도 나온 작품이지만 10년 넘게 이야기를 지속하며 시리즈 번호를 높여가고 있다. 그것이 끝나면 1998년 시작했다 잠시 중단한 ‘광야’를 마저 그릴 생각이다. 아직 1부도 끝나지 않았는데, 3부까지 염두에 두고 대작을 구상 중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내놓으면 뭐든 짐이 된다”며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것은 아니라고만 말하겠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scoop87@chosun.com)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1/20040107027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