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린은 1962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83년 『북해의 별』로 데뷔했는데, 만화가 생활 10년이 넘는 중견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장편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 작품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그의 완벽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북해의 별』, 『비천무』, 『테르미도르』, 『불의 검』, 『광야』 등 대개 사극의 형태를 취하지만,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인물의 심리가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바로 ‘인간’이며, 모든 작품에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엿보인다. 그것은 서구에 의해 왜곡된 ‘휴머니즘’과는 분명히 다르며, 더 나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불의 검』 서문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매일 온갖 잡다한 일속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만화가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살이의 喜怒哀樂이란 몇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미래나 모두 비슷한 것이 아닐까…?“
그의 작품에는 모든 인물이 살아 있다. 주인공만 부각되는 게 아니라 독특한 개성과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가지는 조연들이 대거 등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휘두르는 칼날에 죽어 넘어가는 엑스트라를 그릴 때도 그 사람이 고향에 처자식을 두고 온 ‘인간’임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이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나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그의 작품엔 악인이 없다. 그는 이분법적인 선/악이나 흑/백의 극명한 대립을 배제하며, 악인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을, 그에 따르는 괴로움과 번민이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독자들은 악역에 속하는 『북해의 별』 비요른이나 『불의 검』 수하이 바토르에게도 연민을 품게 된다.
김혜린은 평화로운 시대보다는 ‘역사적인 변환기’에 놓여진 인물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경험(고생!)과 고민들을 실재감 있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북해의 별』은 가상의 왕국 보드니아에서 벌어진 시민혁명, 『비천무』는 중국의 원?명 교체기,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 『불의 검』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에 아무르와 카르마키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최신작 [광야]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역사를 좋아한다. 역사를 보면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사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장치로 ‘역사적인 변환기’를 도입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격랑을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아직도 그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한편, 공간적인 배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북해의 별』)에서 출발해 중국 대륙(『비천무』), 만주 벌판(『불의 검』)을 거쳐 한반도(광야)로 귀착되었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특히 우리 민족에게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그려서 좋고 그냥 편한 것. (중략) 욕구가 자연스럽게 흘러온 거고, 맞는 옷을 찾는 거니까. 내가 그려서 더 좋은 쪽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불편하지만 저 옷이 필요해서 입어야겠다 이건 아니구요.”
그의 캐릭터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북해의 별』에서는 남자 주인공 유리핀 멤피스가 완벽한 영웅상을 보여주는 데 반해, 여자 주인공 에델라이드는 가련하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다. 하지만 『비천무』, 『테르미도르』,『불의 검』을 거치면서 남자 주인공은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띄면서 부드러운(때로는 유약한) 심성으로 바뀌어갔고, 여자 주인공은 훨씬 더 당차고 자의식이 강한 쪽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소녀 취향의 스토리나 캐릭터가 확실하게 ‘성인 취향’의 스토리나 캐릭터로 성장했음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성장’하고 있으며,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