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연작 ‘피플’ 한데 묶어 나왔다
순정만화가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를 가진 주인공들이 펼치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이진경(33)씨의 만화가 불편할 수도 있겠다. 이 30대 여성 만화가는 정통 미술을 전공한 이답게 개성이 강하고 힘이 넘치는 그림체와 짙은 색감의 유화 그림을 구사하지만 전형적인 순정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여성, 비주류 예술가, 동성애자 등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인들로, 순정만화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리얼리즘을 들이댄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주의 만화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작가 이진경씨의 연작 〈피플〉(길찾기 펴냄·각 9800원)이 단행본 두 권으로 묶여 나왔다.
1995년에 첫선을 보인 〈피플〉 시리즈는 2002년 마지막 에피소드가 발표될 때까지 〈윙크〉, 〈믹스〉, 〈나인〉, 〈나〉 등 여러 곳의 만화잡지를 옮겨다니며 연재됐다. 이런 사정으로 독자들이 그 전모를 제대로 감상할 기회가 없었던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하게 소화할 매체가 없다는 만화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준다.
〈피플〉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여성들의 공동체인 가상의 ‘시타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남자의 사랑이 식을까봐 다이어트를 하다가 목숨을 잃고, 임신으로 몸이 불어나는 것을 두려워해 중절수술을 받다 숨지며, 남성의 ‘묻지마’ 범죄에 희생되는 여성들의 모습이 현실처럼 재현된다. 이런 속에서도 작가는 부제 ‘여성적인 에너지를 품은 세대를 위하여’처럼, 다양한 제한이 존재하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 창의력과 재능을 자유분방하게 표출하는 여성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이런 주제의식은 무대를 한국으로 옮긴 대표작 〈사춘기〉로 이어진다.
이진경씨는 지난 94년 〈게토잼〉으로 데뷔했으며 현재 격월간 만화잡지 〈오후〉에 ‘새’라는 필명으로 〈저기 도깨비가 간다〉를 연재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이호을 기자 he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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