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파트너…양억관·김난주 부부
요즘 출판가에는 일본의 부부 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번갈아가며 써내려간 릴레이 러브 스토리 ‘냉정과 열정 사이’가 단연 화제다. 12월 들어 소설 3위,스테디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키면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은 베테랑 부부 번역가인 양억관(47),김난주(45)씨의 공동 번역으로 더욱 관심을 모았다.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에 살고 있는 양씨 부부를 찾아갔을 때 거실이며 방에 책으로 빼곡했다.

“억관씨가 6개월 전 일산쪽에 오피스텔을 마련,독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지붕 아래서 번역 일을 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서로의 번역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지요. 하지만 가끔 외부에서 전화를 걸어와 ‘사전 좀 찾아주라’는 정도의 요청은 들어주고 있는 편입니다.”(김난주)

“아다시피 일어는 한자 읽기가 가장 어렵지요. 어쩌다 전화를 하면 ‘지난 번에도 가르쳐 줬잖아’하고 좀 까다롭게 굴기도 해요.”(양억관)

그러니 이제 집은 안방 마님의 집필실이다. “솔직히 제가 번역가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92년도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번역일에 뛰어들 때만 해도 전문번역가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거든요.”(김난주)

부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로 뒤늦게 일어 전문번역가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양씨가 군에 갔을 때 김씨가 대학에 다녔으니 재학 중에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다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서로를 알게 됐다. “집사람이 저보다 한 해 이른 1984년도에 유학을 갔는데 도쿄에서 재회해 5년만에 결혼했지요. 현해탄을 건너가서야 비로소 눈을 맞췄다고나 할까요.”(양억관)

얼마전 지인들로부터 “그동안 번역한 책들을 따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 들여놓은 서가엔 350권의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양씨는 만화,건축 분야에서부터 지리학,철학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200권 가까운 일서를 번역했고,김씨는 150권 가까운 번역서 가운데 90%가 문학 관련 도서다.

“우리나라는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은 편이죠. 하지만 선진국에 비해 인구도 적고 국력도 떨어지는 우리 실정에서는 인문학,과학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번역이 많이 되어야 합니다. 10년전만 해도 번역은 대학교수의 부업 정도로 여겼었죠.”(김난주)

불쑥 번역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마디로 종합격투기가 아닐까요. 철학서는 의당 철학 전공자가 번역해야 하지만 일단 일을 맡으면 전공자 못지 않게 수많은 문헌을 참고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곤 합니다.(양억관)

“일어는 한국어에 비해 매우 폭이 넓은 언어예요. 가다카나,히라카나에 한자까지 병행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일어가 표음과 표의문자적인 세계를 둘 다 추구한다고 볼 수 있죠. 일어는 그 의미 공간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자유로운 언어입니다. 그래서 문화가 더 풍성해 질 수 있는 것 같아요.(김난주)

‘키친’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김씨는 바나나처럼 우리 문학이 세계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 했다.

“일본 소설을 번역,소개하는 입장이어서 우리 작가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일본의 경우 장기 불황이 계속되자 거리의 부랑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하는데 우리 작가들은 그런 사회적 현상을 빨리 포착하지 못하는 같더군요.”(김난주)

양씨가 말을 거들었다.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경우 오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지요. 필요하다면 화폐론부터 경제원론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끊임없이 재충전을 하고 있지요. 작가에 비해 번역쟁이는 삶이 너무 단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늘 마감에 쫓기는 시간 싸움을 해야하니까요. 한달에 한 권 이상을 번역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 매일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생활의 단조로움이야말로 번역가의 가장 큰 직업적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주가형인 양씨가 술을 벗삼아 무료한 일상의 탈출구를 찾는 반면 김씨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경제적이다. “한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지루하다 싶으면 빨래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지요. 생활을 벗삼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셈인데 이제는 억관씨에게 이 일을 좀 맡겼으면 합니다.”

양씨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방법 말고 당신이 인세로 번역계약을 해서 대박을 터뜨리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은데…”(웃음)

번역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일단 번역서가 출간되고 나면 그 책과 무관한 관계가 된다는 점이다. 책이 얼마를 팔리든 간에 일단 고료를 받는 것으로 그 책과의 관계가 사라지고 마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은 번역을 직업으로 선택한 데 후회는 없다. “번역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그 작가의 속이 들여다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저희 부부도 그런 관계라고나 할까요.” 그들은 서로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부부였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남녀 주인공인 쥰세이와 아오리를 닮은 듯 했다.

정철훈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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