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같은 딸…재즈의 길 同行…이정식·이발차 부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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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43)은 올해 초 자신이 이끄는 밴드 ‘서울재즈퀄텟’의 피아니스트로 큰 딸 이발차(22)를 맞아 들였다. 2년 전부터 가끔씩 아버지 공연에서 피아노를 쳤던 딸은 이제 아버지 밴드의 정식멤버가 됐다. 부녀가 한 밴드에서 연주하는 경우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이발차’란 이름이 참 독특하다고 했더니 이정식이 사연을 설명해줬다. “얘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너무 촌스럽다고 해서 그동안 ‘이예숙’이란 예명을 써왔어요. 그러다가 얘가 연주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발차란 본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개성이 중요하니까요.”
나란히 옆에 앉으니 부녀는 오누이처럼 보였다. 이정식이 일찍 결혼한 탓에 부녀의 나이 차는 21년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정식의 차림이며 얼굴은 또래보다 젊은 편이었고,정장을 차려입은 딸은 꽤 성숙한 느낌을 줬다.
딸이 재즈 피아니스트로 나서면서 부녀는 재즈의 길을 함께 가게 됐다. 그러나 한 세대도 못되는 세월을 앞뒤로 재즈에 닿기까지 둘이 걸어온 길은 너무나 달랐다. 아버지가 자갈 가득한 길을 맨발로 걸어왔다면,딸은 잘 닦인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려왔다고 할까.
이정식은 중학교 때 브라스밴드에서 처음 색소폰을 입에 물었다. 그 후 색소폰은 이정식의 분신이 되었지만,이 악기로 밥을 먹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군악대를 거쳐 사회에 나온 20대 초반부터 밤무대 연주 생활을 시작했어요. 카바레는 물론이고 유랑극단,심지어 서커스단 아래서도 색소폰을 불었죠. 아마 나처럼 다양한 무대에서 공연한 사람도 드물껄요,허허허.”
20대 그 시절,이정식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유랑극단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던 시절은 말 그대로 자장면 한 끼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어요. 집사람과 갓 태어난 딸을 지방의 월셋방에 떼어놓고 다녔는데 나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집에 부쳐줄 돈이 있었겠어요? 애는 눈에 황달이 들고,마누라는 빈혈기가 돌았죠.”
아버지의 눈물겨운 고생담을 들은 딸의 반응은 뜻밖에도 “참 낭만적이예요”였다. “가끔 아버지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는데 그때마다 낭만적으로 느껴져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음악가들의 얘기 같잖아요. 사실 전 모든 게 너무 쉬웠어요. 배를 곯아본 적도 없구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에 비해 음악에 대한 애착이 약하고 또 열심히 안하는 것 같아요.”
고생 고생하며 대중가요를 불던 이정식이 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꿈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배 고프고 생활이 어렵다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우리같은 ‘딴따라’들에게는 비전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 당시 연주자라고 하면 거의 밑바닥 인생 취급을 받았죠. 아무도 딸을 주려 하지지 않았고,어디 가서 음악 한다고 얘기하는 게 창피했어요.” 내일이 없는 삶을 이어가며 주변의 많은 연주인들은 술이나 여자에 빠져 인생을 소진했다. 젊은 이정식은 이대로 살 수 없다고 결심한다. “어차피 평생 딴따라로 살아갈 팔자라면 이 바닥에서 최고의 음악을 해보자고 결심했죠.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재즈였어요. 재즈를 하려고 하니까 주변에선 돈이 안된다며 다 말리더군요.”
오기로 시작해 독학으로 재즈를 공부한 아버지와 달리 딸은 어릴 때부터 집 안에 넘쳐나는 음반들을 들으며 자연스레 재즈를 익혔다. 집 안의 피아노는 어릴 적부터 그녀의 장난감이었다. 이발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재즈를 한 번 배워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정식은 무척 기뻤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재즈라면 내가 좀 힘이 돼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제 우리나라도 재즈한다고 굶어죽는 시절은 벗어났구요.”
이정식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서민적’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시절의 고생과 경험은 고스란히 그의 음악에 양분이 됐다. “다양한 경험들이 내 몸 안에 녹아 있어요. 그래서 내가 풀어내는 재즈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회한에 맞닿을 수 있다고 봅니다. 거칠고 촌스럽기도 하지만 뚝배기 맛이 나는 재즈,난 그걸 ‘서민적 재즈’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정식을 곁에서 오래 지켜봐온 이발차는 아버지에게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으로 열정을 꼽았다. “연주할 때 뿜어져 나오는 아버지의 열정적인 모습을 닮고 싶어요. 저는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음악적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그게 음악만으로는 되는 게 아닌가 봐요. 아버지는 늘 경험이 많고 생각이 깊어야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죠.”
국내 재즈계에서 이정식의 존재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까지 7장의 색소폰 연주음반을 낸 실력파 뮤지션,인기 재즈밴드 서울재즈퀄텟의 리더,5년이 넘게 수원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음악 교수,국내 유일의 재즈 프로그램인 CBS ‘0시의 재즈’ 진행자. 이 모든 타이틀은 유학파들이 넘쳐나는 국내 재즈계에서 이정식이 독학으로 획득한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이정식을 아버지로 둔 덕에 이발차의 음악 인생은 남들보다 쉽게 출발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이상,이정식이란 이름은 그녀에게 무엇보다 높은 장벽이다. “어딜 가나 ‘이정식의 딸’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녀요. 이정식의 딸이 아니라 재즈 피아니스트 이발차가 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지 몰라요.”
이정식은 요즘 해외 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 출반한 ‘원더풀 피스(Wonderful Peace)’의 해외 판로를 모색하는 한편 다음달 1일 LG아트센터에서 ‘아시안 스피리츠(Asian Spirits)’ 공연을 올린다. 이정식 주도로 일본,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 연주자들이 참여한 ‘아시안 스피리츠’ 밴드는 아시아의 재즈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담고 아시아 각 국에서 공연일정을 잡고 있다.
이발차는 당분간 아버지 밴드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밴드에서 연주 경험을 쌓는 한편 내년 졸업 후에는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제 이름을 단 밴드를 만들 거예요. 그래서 연주와 함께 작곡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누가 알아요? 나중엔 제 팀이 아버지 밴드를 치고 올라갈 지,호호.”
김남중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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