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인의 일본견문록 - 해유록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5
신유한 지음, 이효원 편역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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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의 일본 견문록 (우리고전 100선 15_해유록)

-----이효원 편역/돌베개/2011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 잠과 휴식의 여유를 쪼개 책을 읽는 빠듯한 일상에서 선뜻 고전을 접한다는 건 여간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책 중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게 되는 놈이 있고, 크게 작심을 하고서야 펼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고전은 후자에 속한다. 쏙쏙 귀에 잘 들어오는 동시대의 언어가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오래된 언어와 깊이를 모를 함의로 가득한 고전은 역시 까다롭고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시대를 거슬러 올라 고전이 ‘현대물’이었던 시절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소심한 편견인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몰이해’다. 분단된 남북의 민중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같은 언어이되 다른 언어를 구사하게 된 것, 그로 인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폭이 더 많이 좁아진 현실과 일맥상통한다.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마음, 너른 폭을 뛰어넘어 저편에 있는 사람과 생각에 닿으려는 뜻과 노력 안에서 비로소 고전은 온전히 읽힐 수 있다.


<조선 문인의 일본 견문록>은 나에게 묵은 편견을 버리고 고전을 끌어안게끔 도와주는 책이 되어 주었다. 조선 선비 신유한이 300년 전에 쓴 <해유록>을 옮긴 글인데, 통신사로서 일본에 건너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외국의 풍광과 문물을 기록한 우리 고전은 여럿 있지만 <해유록>에 대해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나는 이 책에 충분한 흥미를 느낀 터였다. 이십 대 후반부터 약 팔 년 동안 일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개인적인 정황 때문이다. 신 선비와 내가 느낀 일본은 얼마나 다른 곳일까, 또 얼마나 닮아 있을까. 자못 궁금함과 아련한 향수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사실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의 덕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을 통해 신 선비와 나는 실로 엄청난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나는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의 풍경과 분위기와 사람들의 감정을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웅장하고 신비로운 풍모의 후지산에 대한 감상이라든가, 화려하고 복잡하고 다소 천박스러운 오사카의 거리 풍경,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음식 문화라든가, 남창과 같은 독특한 문화 유행에 대한 감상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적극적으로 동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고 살짝 머릿속으로 반론을 펼쳐보기도 했다. 신 선비의 생각이나 글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했지만 조선 시대의 유학자답게 일본 문화에 대한 조선 문화의 우월의식을 뚜렷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뉘앙스의 구절이 나올 때마다 나는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런 불편함조차 이 책과 내가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니 한편 흡족한 기분이 든다.


<해유록>은 어디까지나 기행문이다. 비단 나처럼 일본에서 몇 년을 생활해 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신유한이 전달하고자 하는 견문을 충분히 읽어냈을 것이다. 그만큼 섬세하고 알기 쉽고 감정이 잘 드러난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이만큼 ‘남이 한 여행을 내가 한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글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력이 남다른 조선 선비 신유한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3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그의 글에서 오늘날 못지않은 감수성을 발견하고 길어 올린 기획자와 편역자의 안목과 능력도 높이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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