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꿀 - 삼손 이야기 세계신화총서 5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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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서가 그렇지만(책에 한정하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소설이나 영화라면 누구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누구의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따라갈 것인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신화총서에서는 다섯번째에 이르러 구약의 인물인 삼손을 다루고 있다. (가능한) 삼손의 관점에서. 마치 이제라도 그를 누군가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독법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모든 가혹한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따르는 인물이야말로 성경에서 칭송하는 인물이다. 여튼,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주안점을 두는 곳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최근 성경을 다시 읽고 있기 때문에 졸음을 참아가며(대체 왜 11시30분부터 잠이 오는 건데!) <사자의 꿀>을 읽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흥미로웠다. <사자의 꿀>은 성경 독법과 다른 방식으로, 지리적인 문제와 성경 원문에 쓰인 단어를 들먹어가며 삼손의 이야기를 해석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삼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으며(어렸을 때 영화로 삼손의 일대기를 본 뒤 너무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며칠전에 끝낸 성경은 욥기였다. 하지만 삼손의 이야기를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자세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 그로스먼은 성경에서 자주 벌어지는 단절과 비약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가 서술된 방식에 집중해서 삼손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종종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삼손에 대한 현대적인 평가는 그가 난삽하도록 폭력적이며, 그 도가 지나치다는 것 정도다. 자폭테러의 원조라는 말에도 한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가끔 설교에서 삼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지 못했던 건 그가 상당히 시적인 언어를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삼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사사기(혹은 카톨릭식으로는 판관)의 필자가 삼손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거나 우대하는 태도의 서술법을 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말이 시적으로 적힌 것은 상당히 기묘한 이질감을 안겨준다.

성당에서 삼손의 이야기가 인용되는 경우는 인간의 우둔함,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딱함,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간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대중문화에서 반복적으로 차용되는 삼손의 이미지는, 이 책에서 몇번 인용해 들려준 바와 같이 그의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고독이라면. 영웅의 고독에 대해서라면 이미 많은 책들이 세상의 수많은 영웅들에 대해 분석한 바가 있지만, 삼손처럼 무지하게만 해석되던 인물이라면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시적으로 말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개그처럼 느껴진다. 결국,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경 속에서도 다른 많은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오해되어 읽히고 타인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계시를 받고 태어났으나 그는 살육을 저지른 뒤 목이 타 죽을 지경이 되거나 마지막 복수를 기원할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다. 성경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윗이나 욥처럼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을 증명하기 위한 인간으로 존재해왔다.

유대 전통에서는 그 호전성과 건달 같은 행동과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짓 때문에 삼손을 가끔 경멸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유대인의 의식 속에 삼손은 민족적 영웅이자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의 구조 깊은 곳에서는 삼손이 진정 '유대적인 특질을 표현하고 함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과 고립, 자신의 분리된 상태와 신비를 보존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 동시에 이방인과 섞이고 동화되고자 하는 가없는 욕망이라는 면에서. -114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점이며(혹은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식인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믿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혹은 권세나 영광)을 위해 어떤 쓰임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해 달라는 소망이다. 자신의 달란트(talent, 즉 현대 영어에서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그 단어)가 무엇인지 깨닫고 쓰임받게 해 달라는 소망. 그런데 그 달란트가, 삼손의 경우에는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여느 기적의 인물들처럼) 출생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내의 임신에 대해 불만어린 시선, 혹은 의심을 쉬이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간통의 증거물로서 인식되는 인물이었고, 부모에게서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거론당한 삼손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도망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끝없이 토해내면서 살아간다. 폭행을 저지를 이유를 만들어 살육에 나서고, 굳이 적의 땅에 있는 창녀를 찾아간다. 그는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을 갈구하지만, 그런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낯선 자들 사이에 몰아넣기도 한다.

선택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자신이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달라는 듯이. 그와 동시에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여받은 쓰임새가 아니어도 존재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증명받고 싶어한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은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래서다. 사랑에 빠진 일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하지만 그의 탄생의 목적이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그가 애초에 왜인지 모르겠는 이유로 블레셋 처녀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했던 이유는 주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필요한 일이었다. 삼손이 자유의지로 행한 유일한 일인 동시에 그가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쓰임을 명받은 그 이유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했던 일. 주어진 운명에 상관없는 동시에 주어진 운명 그 자체로 그를 이끌 수 있는 일.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인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고 신일숙은 말했지만(웃음), 삶은 언제나 가야만 하는 그 길로 가기 때문에 인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
삼손이 눈을 뽑힌 뒤 성노리개로 살았다는 해석은, 확실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문열의 <익명의 섬>에 사는 깨철이와 삼손이 다를 바가 무언가. 그는 앞이 보이지 않으며, 건장하고, 건장함은 번식과 그 외의 갖은 쾌락을 함의하는 전형적 코드다. 게다가 그는 노예다. 어렸을 때 본 삼손 영화(대체 제목이 뭐였고 그걸 왜 봤을지 상상하기 힘들지만)에서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장면은 그가 연자맷돌에 묶여 그것을 돌리는 장면이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그 주변에서 야유하고 조롱하던 블레셋인들은 삼손의 머리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등등.

성경에서는 섹스가 무척 많은 용도로 활용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섹스 혹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인물의 출산 역시 섹스에서 시작된다.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의 인물들조차, (자칭 유일한) 하나님의 민족조차 믿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기이한 탄생은 오해와 수군거림의 시작이 된다.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쿠도가 해석한 것처럼 이상한 탄생을 한 자들이 영웅이 된다기보다는 영웅의 특이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탄생의 신화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흥미로운 일이다. 무려 다윗조차 간통죄를 저지르지 않던가. 죄를 짓는 일은 신앙을 갖고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최초의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원죄를 지은 몸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게임은 끝나 있다.

무려 욥기에서는, 욥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악마의 말을 따라 욥을 온갖 시험에 들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클수록, 절망이 깊을수록 신실해져야 구원받을 수 있다. 여튼, 도망갈 구석이 없는 순환논리다.

많은 신화들이 그렇지만, 성경 역시 독해하는데는 보다 많은 상상력, 그리고 더 많은 지식과 구조적인 눈이 필요하다. 이른바 믿음이라는 것이 없이 성경을 읽자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지만, 믿음으로 읽으면 모두 당연한 일 투성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주인공들조차 알아서 운명의 수레바퀴에 몸을 맡기고 부서져간다. 우연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인간이 종교를 발명해냈기 때문에, 신화는 필연적으로 운명론을 강조한다.

삼손은 애초에 명받은 쓰임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려는 인물이다. 그 운명이 아니어도 자신에게 존재가치가 있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운명으로 회귀하지만, 그의 투쟁은 의미심장한데가 있다. 재능으로부터 도망가는 일이, 재능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더 간절할 수 있다. 결국 생애 마지막 순간의 삼손처럼, 재능을 빼앗긴 뒤의 무력함과 공포, 조롱을 모두 맛본 뒤에 아무런 확신 없이 기도만 가지고 덤벼야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운명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망가고자 하는 충동이, 그의 삶을 자포하기한 것으로, 자기파괴적으로 만들었다. 자기 인정은 자기 혐오보다 힘들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에게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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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기복)신앙으로 돌아간다. 삼손의 최후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보여달라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또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라는 말은 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통성기도다. 확실히 구약의 하나님은 강렬한 복수의지의 수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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