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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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초겨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나와 직접적으로 가까운 이의 부고는 처음이었다. 출산을 두 달 앞둔 나는 무거운 몸을 끌고 KTX를 탔다. 같은 해 추석에 찾아뵌 게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다. 절을 올린 뒤 내가 임신한 걸 알리자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셨다. 내가 품은 생명이 잠시나마 할아버지께 가닿은 순간이었다.


영정사진 속 할아버지께 두 번의 절을 올리고 상주인 아버지를 보는데 깜짝 놀랐다. 아빠 얼굴에 이렇게 주름이 많았나? 아빠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가 드셨구나, 언제나 그 자리에 영원히 계실 것 같았던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죽음과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건 처음이었고 그 가까움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26쪽


우리는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할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다. 현대사회는 죽음을 꽁꽁 숨긴다. 장례식장과 납골당, 무덤을 도시 외곽으로 밀어내고 의도적으로 망각한다. '향수, 모피, 속옷, 보석, 죽음에게 내어 줄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뿜어내는 호화로운 거만함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의 이면에 죽음이 숨겨져 있었다. 개인 병원, 종합 병원, 그리고 닫힌 병실이 간직하고 있는 침울한 비밀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었다.(같은 책, 111쪽)' 내 주변 사람들도, 나 자신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렇게 방심한 우리 앞을 죽음이 예고 없이 막아선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 눈앞에 등장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당황한다.


보부아르도 병든 어머니의 무력한 육체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충격을 받는다. 5주 전만 해도 건강해 보였던 어머니가 집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식사를 잘 못하는 것을 본 의사의 제안으로 방사선 검사를 하다 말기 암에 걸린 것을 발견한다. 길어야 하루이틀이라는 의사의 말에 충격받은 보부아르와 여동생은 엄마에게 복막염이라 둘러대고 개복수술을 감행해 4주의 시간을 얻는다. 엄마와 함께하는 생애 마지막 시간, 그 속에서 보부아르는 그저 엄마였던 그녀 안에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유일무이한 존재를 새롭게 발견한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거의 없는, 잊힌 여인에 불과했던 엄마가 한 명의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같은 책, 146쪽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을 쉽게 한다. 충고는 쉽고 실행은 어렵다. 돌아가시기 전에 좀 더 자주 할아버지를 찾아 뵐 걸, 후회는 쉽고 이미 늦었다. 장례식장과 멀지 않은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몇 년 전부터 정신이 흐릿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모르셨다. 부푼 내 배를 쓸어내리며 할아버지와 같은 환한 미소로 웃으셨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와 친척 어른들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처음 만나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었다. 서울과 장흥과 제주도를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호명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두 달 뒤에 할머니는 '밥 해 줘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같은 책, 153쪽


큰 병 없이 노환으로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님께 호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두 분의 죽음은 여전히 충격이고 나를 보고 웃으시던 마지막 미소를 반복해서 되새긴다. 죽음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같은 말은 죽음이 코앞에 닥친 엄마를 돌보는 보부아르에게 전혀 쓸모가 없다. 나의 진짜 생활은 엄마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엄마를 지키는 것, 그것만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같은 책, 103쪽)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인지하고, 억누르며 살아 온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빠르게 무너져가는 육체와 극심한 고통과 그럼에도 반짝이는 순간들, 연장된 4주 간의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돌본 뒤 한 권의 책으로 애도하는 과정.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작가는 엄마의 죽음에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제목을 달 수 있었다. 엄마의 죽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건 아니지만, 좋은 죽음 따위는 없지만, 최소한 편안한 죽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같은 책, 137쪽


타인의 애도의 과정을 따라가며 슬쩍 나의 슬픔을 얹는다. 가장 가까운 이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애도의 글쓰기, 인간의 죽음이 운명인 이상 절대 끊기지 않을 슬픔의 형상화 작업.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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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단편소설 전집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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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는 또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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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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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독서의 역사, 문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만의 사적인 '소설의 역사'를 서술하자면 연대기의 시작에 자리한 이름이 은희경이다. 중2의 나는 국어선생님이 재미있는 소설이니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신 [새의 선물]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소설은 어린 나를 매료시켰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결이 달랐다. 시작부터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1쪽) 같은 문장이 튀어나왔다. 사춘기를 통과 중인 내게 은희경의 냉소는 삶이라는 미궁을 인도하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은희경 [새의 선물] 그녀의 냉소를 한 손에 쥐고 이후 출간되는 작품들을 성실하게 따라 읽었다. 감탄하고, 의아해하고, 때로는 실망하며 은희경이란 이름이 하나의 장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태연한 인생] 이후 새 장편소설이 나온다는 소식에 알라딘 인터넷서점 '새로나올 책' 카테고리를 계속해서 새로고침했다. 1970년대 여대 기숙사가 배경이라고 했다. 1960년대의 진희가 자라 여대에 가게 된다면? 소설 속 '나'인 김유경의 목소리를 빌려, 2017년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은희경 [빛의 과거] 181쪽 이제 냉소는 삶의 성실성이 아닌 무력함의 표현이라고, 자신의 삶은 상처받기 싫어 끊임없이 회피하고 수긍하며 이를 변명하는 데 급급하다 조금씩 '인생의 포물선이 하강하는 것을'(325쪽) 지켜봐야 했음을 덤덤하게 고백한다. 그 고백의 계기가 된 건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 77년 같은 기숙사에서 만났고 우연이 겹쳐 관계가 이어지게 된 김희진과 김희진이 쓴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은희경 [빛의 과거] 18쪽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김희진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 소설인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에 쓰인, 김유경을 포함해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양애란, 곽주아, 최성옥, 이재숙 등의 인물들을 '공주'라 부르며 희화화하는 소설 전략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나'(김희진)를 통찰력 가진 성숙한 주인공으로 형상화하는 의도가 빤하지 않나. 소설을 한 번 더 반복해 읽으면서 이 [빛의 과거] 소설 자체가 '나'(김유경)의 또 다른 편집된 과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별적인 다름이 필연적으로 섞이는(28쪽)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공유된 과거를 아예 폐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우고 싶은 과거라도 인간은 오롯이 혼자서만 살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필연적으로 뒤섞인다. 김유경은 말더듬이라는 약점을 핑계로 삶과 대면하는 순간마다 도망치기 바빴고, 김희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를 편집했다.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13쪽)

서로가 서로의 문제집 답지이자, 상대방의 알리바이인 관같은 창문이라도 유리의 두께나 창문의 방향, 각도에 따라 빛의 색이 달라지듯이 같은 과거의 시간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적힌다. 김희진과 김유경이 되살려 내는 1977년도의 여자 기숙사생들, 여학생이란 '조강지처, 애인, 첩, 식모' 네 가지로만 평가되던(26쪽) 시대 어떤 카테고리로도 설명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었던 개별적인 여자들. 최성옥과 송선미, 양애란, 이재숙, 오현수, 곽주아, 이경혜의 이름들.

훈육과 세뇌가 기본인 가학적인 카드 섹션 연습으로 형상화된 개성의 말살이 당연시되던 군부 독재의 시대 각자의 방식으로 '다름'을 추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약간의 슬픔을 남겼다. 소설 막바지 김유경이 덤덤하게 토로하는 독백의 여운 때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쪽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인다. 불변하는 과거나 유동적인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 소설은 회고록에 가깝고 2017년의 현재 역시 반쯤 굳은 콘크리트처럼 극적인 변화가 거의 없는 시간대라 이 독백이 슬프게 다가오면서도 이야기로 생생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독 힘겹게 완성하셨다는 이번 소설의 다음이 있다면 이 문장을 예고편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편집되거나 유기된 과거가 현재를 덮치는 이야기, 또 한 번 기다림이 시작된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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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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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현재의 존재라는 사실을 길-게 증명하는 소설이다.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인연이 닿은 사람들로 이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민, 그는 과거에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인기 드라마에 아역 진구로 출연했었고, 남편을 일찍이 잃은 어머니 손에 키워졌고, 어른이 되어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드라마 출연 당시 함께 연기했던 연기자들과 재회하고, 녹화 도중 형민은 스튜디오를 뛰쳐나가고, 계속 달리면서 자신의 아내 상현과 딸 하영을 생각하고, 상현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 이야기, 하영의 친구 이야기, 형민이 근무하는 회사 박대리와 강차장 이야기, 프로그램 사회자 이야기, 사회자의 부모 이야기...익숙한 윤성희 소설의 전개 방식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긴밀하게 연결된 뇌세포처럼 서로 이어지면서 저마다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을 읽는 방법 중 하나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왜인지 마음이 자꾸 끌리는 인물을 선정하여 과연 어떤 사람인지, 왜 신경이 쓰이는지 정리해 보는 것이다. 나는 주인공 형민을 제외하고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사회자가 가장 눈길이 갔다. 불미스러운 일로 공중파 방송국에서 퇴출당하고, 시청률이 미미한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되고, 형민과 녹화 중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끝내 유서 한 장 남기고 떠난. 유서의 내용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211쪽) 형민은 사회자의 장례식장 앞을 서성이다 다시 한 번 더 도망친다.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를 하면서. 


그 미안하다는 말의 뜻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을지? [상냥한 사람]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보통 우리는 서로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 들어주는 이 없이 공허하게 버려지는 말들.

윤성희 소설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는 소중하게 다뤄진다. 형민은 아파트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아파트 공원을 배회하고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 상현과 이혼 후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퇴사 후 폐교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운영하는 강 차장의 이야기를 막걸리를 마시며 귀담아 듣는다. 


[상냥한 사람]에서 큰 갈등은 이 '듣기'의 활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 회사 횡령 사건에 휘말린 박대리가 형민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형민은 들어주지 않았고 박대리는 차도에 뛰어든다. 딸 하영은 친구 은주를 다른 친구가 괴롭힐 때 방관했고 형민은 하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서움을 느낀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이 형민의 돌발행동으로 녹화가 끊기지 않고 진행되었다면 사회자는 무사했을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중간한 녀석들뿐이네. 그는 반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어중간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간이라는 말 앞에 붙은 '어'자는 무엇인가. 어중간, 어정쩡, 어수룩...어로 시작되는 말들을 찾아보다가 그 모든 단어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86쪽)


타인에게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어쩌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할 줄 아는 마음. 형민은 '미안하다'고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설픈 내가 미안합니다.


제목의 '상냥한 사람'이라는 뜻은,

내 눈 앞의 사람이 낯선 타자가 아닌 가느다란 선이라도 이어진 인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하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슬프다는 말 대신 예뻤어, 좋았어, 기뻤어, 행복했어, 그런 말(302쪽)을 할 줄 아는 사람.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소설 본문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상냥하다'는 단어를

반복해서 불러 본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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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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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으로 떠밀려 와 서성거릴 때 슬며시 붙잡은 것이 '사람 공부'다. 지반 침하로 무너지는 삶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신의 짓궂음이 초래한 이 절망과 고독을 타고 넘어가고 싶었다.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이 아닌가?" 나는 일자나 무한이 아닌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서문)




호젓한, 고요하고 쓸쓸한 시간의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에서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에서 책은 시작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너무나 뻔하고, 지극히 어렵고, 그러나 중요한 질문. 


인간이란...생각하는 존재야!

인간이란...먹는 존재다!

인간이란...인간 아냐?


질문의 범위가 바다의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인간은 하나의 프로그램만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다. 모래알 같이 무수한 다름과 복잡성을 품고 흩어져 있(10쪽)는 인간이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간을 정의하기보다 정리한다. 27가지의 관점으로. 


이 책은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서문을 읽고, 목차를 훑으며 수많은 인간의 정의 중 마음에 드는 것, 호기심이 생기는 챕터를 골라 읽으면 재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다. 슬쩍 나만의 정의를 끼워넣기도 하면서.


나는 가장 먼저 '그토록 많은 방들-호모 로쿠시어스Homo Locusius'부터 읽었다. 오래 전 방을 화자로 한 어설픈 단편소설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59쪽, 방이 없다면 삶도 없다.


'먹어야 산다-호모 쿠커스Homo cookus'도 흥미롭게 읽었다. 사람들의 '언제 한 번 밥 같이 먹자!'가 당연한 인사법이 되고, 영화 속 유행어가 된 '밥은 먹고 다니냐?'에 담긴 밥의 중요성.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먹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건 당연하지만, 최근 쏟아지는 먹방 컨텐츠들은 먹는다는 행위가 어떤 선을 넘어서 집착에 가까운 유행으로 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라고 쓰는 나 역시 매일 먹는 음식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일기에 꼭 쓰고 있으니,

역시 인간은 '먹는 존재' 


-227쪽, 아는 사람에게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을 가볍게 던지지만, 우리는 이 말의 깊고 무거운 함의를 다 헤아리지 못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할 수 있다."라고 장앙텔므 브리야사바랭이 말했을 때 음식이 존재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고, 정체성의 기반이라는 것을 떠올려야 마땅하다. 내가 먹는 음식으로 내가 누구인지 세상에 드러난다.


장석주 작가님의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로, 책 속에 인용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받고 알아가는 데 있다. 이번 책 역시 수십 권의 책들이 언급되고 풋내기 독자는 제목을 받아적느라 바쁘다.

인간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지만, 나는 나라는 인간을 '책 읽는 인간-호모 부커스Homo bookus'라 칭하겠다. 아침에 눈을 떠 아침식사 하면서 책 읽고, 외출할 때 책 한 권은 반드시 챙기고, 잠을 청하며 또 책 읽고, 숨 쉬듯이 읽는 일상. 


-242쪽,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주변에 늘어놓고 읽는다. 내 손에 들린 책과 그 주변에 놓인 책들은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같은 분야에서 선택된 책이 아니라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끌리는 책들이다. 질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하나의 표준이나 엄격한 분류법에 따라 계통화된 수목적 위계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제멋대로인 '리좀'형이다. 나는 아무 매임 없이 다소 무질서한 반계보적이고, 비분류적인 책 읽기를 선호한다.


숨 쉬듯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촘촘하고 밀도 높은 이번 책도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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