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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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현재의 존재라는 사실을 길-게 증명하는 소설이다.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인연이 닿은 사람들로 이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민, 그는 과거에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인기 드라마에 아역 진구로 출연했었고, 남편을 일찍이 잃은 어머니 손에 키워졌고, 어른이 되어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드라마 출연 당시 함께 연기했던 연기자들과 재회하고, 녹화 도중 형민은 스튜디오를 뛰쳐나가고, 계속 달리면서 자신의 아내 상현과 딸 하영을 생각하고, 상현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 이야기, 하영의 친구 이야기, 형민이 근무하는 회사 박대리와 강차장 이야기, 프로그램 사회자 이야기, 사회자의 부모 이야기...익숙한 윤성희 소설의 전개 방식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긴밀하게 연결된 뇌세포처럼 서로 이어지면서 저마다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을 읽는 방법 중 하나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왜인지 마음이 자꾸 끌리는 인물을 선정하여 과연 어떤 사람인지, 왜 신경이 쓰이는지 정리해 보는 것이다. 나는 주인공 형민을 제외하고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사회자가 가장 눈길이 갔다. 불미스러운 일로 공중파 방송국에서 퇴출당하고, 시청률이 미미한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되고, 형민과 녹화 중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끝내 유서 한 장 남기고 떠난. 유서의 내용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211쪽) 형민은 사회자의 장례식장 앞을 서성이다 다시 한 번 더 도망친다.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를 하면서. 


그 미안하다는 말의 뜻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을지? [상냥한 사람]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보통 우리는 서로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 들어주는 이 없이 공허하게 버려지는 말들.

윤성희 소설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는 소중하게 다뤄진다. 형민은 아파트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아파트 공원을 배회하고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 상현과 이혼 후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퇴사 후 폐교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운영하는 강 차장의 이야기를 막걸리를 마시며 귀담아 듣는다. 


[상냥한 사람]에서 큰 갈등은 이 '듣기'의 활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 회사 횡령 사건에 휘말린 박대리가 형민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형민은 들어주지 않았고 박대리는 차도에 뛰어든다. 딸 하영은 친구 은주를 다른 친구가 괴롭힐 때 방관했고 형민은 하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서움을 느낀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이 형민의 돌발행동으로 녹화가 끊기지 않고 진행되었다면 사회자는 무사했을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중간한 녀석들뿐이네. 그는 반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어중간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간이라는 말 앞에 붙은 '어'자는 무엇인가. 어중간, 어정쩡, 어수룩...어로 시작되는 말들을 찾아보다가 그 모든 단어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86쪽)


타인에게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어쩌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할 줄 아는 마음. 형민은 '미안하다'고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설픈 내가 미안합니다.


제목의 '상냥한 사람'이라는 뜻은,

내 눈 앞의 사람이 낯선 타자가 아닌 가느다란 선이라도 이어진 인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하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슬프다는 말 대신 예뻤어, 좋았어, 기뻤어, 행복했어, 그런 말(302쪽)을 할 줄 아는 사람.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소설 본문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상냥하다'는 단어를

반복해서 불러 본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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