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변이 -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봄날의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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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요즘 종이를 찢는 행위에 재미를 붙여 자기 방 안에 꽂아 둔 그림책이란 책은 다 찢어버리는데, 어느 날 식탁 위에 올라온 엄마의 책을 발견했고 책 표지가 종이로 되어 있어 힘을 크게 주지 않아도 쭉 잘 찢어졌는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아온 엄마는 반쯤 찢어진 표지를 보고 크게 화를 냈고 아이는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는데, 그렇게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집 [불안의 변이]는 불안한 표지를 불안하게 달고 제목과 어우러진 리미티드 에디션이 되어버렸는데.


리디아 데이비스라면 자신의 작품집 표지가 찢어진 일련의 사건만으로 글 한 편을 뚝딱 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툰 번역투로 평전을 쓴다는 아이디어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마리 퀴리, 너무나 고결한 여인), 초등학생들이 병으로 입원한 같은 반 친구에게 쓴 위문 편지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글을 쓰는 흥미로운 사람이기에(보고 싶다: 4학년 어느 반 학생들의 위문 편지 연구), 보통의 단편소설부터 단 한 줄로 된 작품까지(새뮤얼 존슨은 분개한다: 는 딱 한 줄이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리디아 데이비스 뿐. 그는 세상 모든 것으로 글을 쓴다. 그의 글은 세상 그 자체다.


우리가 어떤 사상가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것을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미 생각하고 있던 것을 더욱 명료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리가 이제 막 생각하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지면 우리가 머지않아 생각하려는 것을, 또는 우리가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훨씬 나중에 생각할 것을, 또는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또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었을 테지만 지금 그를 읽지 않았다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디아 데이비스, 친밀감 전문, [불안의 변이], 봄날의 책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는 우리를 당황시킨다. '이게 뭐야?' 작가에게 최고의 찬사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게 뭐야?'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면서 한 편의 철학적 성찰에 이를 수 있는 글쓰기(당신이 아기에 대해 배우는 것), 광고 이메일 한 줄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 이게 글이야? 이것도 글이다. 나는 방금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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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샬럿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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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쪽, 그러나 여전히 굴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거야. 고독하고 벗도 없고 의지할 데가 없을수록 더욱더 나 자신을 존중할 거야. 하느님이 내려 주시고 인간이 인정한 법을 지킬 거야. 지금처럼 미친 때가 아니고 제정신일 때 옳다고 생각했던 원칙을 지키며 살 거야. 법이나 원칙은 유혹이 없는 때를 위한 게 아니야. 지금처럼 몸과 영혼이 그 엄격함에 반란을 일으키는 그런 때를 위한 거야. 법과 원칙은 엄격해야 하고 절대로 어겨서는 안 돼. 나 편한 대로 어겨도 되는 것이라면 법과 원칙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 법과 원칙은 가치 있는 것이야. 항상 그렇게 믿어 왔어. 그런데 지금 그렇게 믿지 못한다면 내가 미친 거야. 아주 미친 거야. 아주 미쳐서 혈관을 따라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심장은 맥박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고 있어. 지금 내가 기댈 것은 미리 생각해 둔 의견, 예전의 결심들이야. 꿋꿋하게 거기에 발을 딛고 서야 해.'

제인 에어, 샬롯 브론테, 을유문화사(조애리 번역)


몇 번을 읽어도 놀랍다. 읽을 때마다 독자를 끌어당기는 흡입력은 오히려 강해진다. 제인 에어라는 캐릭터에 살이 붙고 목소리가 생생하고 빛나는 두 눈이 또렷이 보인다. 제인 에어는 불멸의 이름이 될 것이다. '집 안의 천사'이미지를 강요당했던 과거 영국 빅토리아 시대, '나는 중도를 모른다'(586쪽)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녀는 특별하다. 고아에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한 자유를 그 무엇보다 중시한 제인 에어의 윤리는 결코 낡지 않는다. 

을유세계문학 전집에 포함된 작품 중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 작가의 다섯 작품을 선별해 리커버 특별판으로 출간되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도 당연히 있다. 홍지희 아티스트의 업사이클 작품이 새 표지에 실려, 얼핏 쉽게 깨질 것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단단한 강철과 같은 마음을 은유하는 작품 표지가 제인 에어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쉽게 깨질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 한 인물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내세우는 삶의 원칙을 인물의 윤리라 한다면, 제인 에어의 윤리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로체스터가 도덕에 어긋난 제안을 할 때, 이를 거부하는 제인 에어의 윤리는 순종적인 여성상과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내가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거야'로 요약 가능하다. 

-158쪽, 사람들에게 고요한 삶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다. 사람들은 행동해야 한다. 행동을 찾을 수 없다면 행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 정지된 생활을 할 운명이고,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침묵 속에 반항하고 있다. 이 지구 상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치적인 반항 말고도 얼마나 많은 반항이 들끓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으레 매우 차분하려니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느끼며 남자 형제와 똑같이 능력을 기르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 분야를 필요로 한다. 엄격한 속박이나 너무 지나친 정체는 남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여자보다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자는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짜고, 피아노를 치고, 주머니에 수나 놓으며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속 좁은 짓이다. 관습상 여자답다고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더 배우고자 하고 더 일하고자 한다고 여자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어릴 때부터 반항적인 성격과 예쁘지 않은 외모로 비난받고 미움받던 그녀의 몸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른다. 내면의 불꽃은 그림(예술)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기 위한 선택으로 구체화된다. 제인 에어는 행동한다. 행동을 만들어 낸다. 재산도 미모도 가진 것 없는 여성이 택할 수 있었던 가정교사라는 선택지는 그 당시 자유로운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자유의 최대치였다. 제인은 선택한다. 그 선택으로 로체스터를 만나게 된다. 불꽃은 로체스터를 향한 사랑으로 체현되고, 위기가 찾아오고, 결혼 대신 정부가 되길 요구하는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녀는 자유를 선택한다.

소설 결말에서 그녀가 결국 로체스터와 결혼하는 것이 그녀의 한계, 혹은 소설 자체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당연히 둘이 결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다시 읽으면서 로체스터의 하남자스러운 전형적인 자기 연민과 여성혐오적인 태도와 발언이 눈에 들어와 이 결혼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로체스터의 부인이자 '다락방의 미친 여자'인 버사가 그의 업보가 되어 팔을 자르고 눈을 멀게 한 뒤에야 제인 에어와 동등하게 설 수 있었다는 건 작위적일지 모른다. 다만 이번에 다시 또 읽으면서 자신의 결혼을 선언하는 제인 에어의 당당한 목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독자여, 나는 그와 결혼했다.


우리는 결혼했다가 아닌, 그가 나와 결혼했다도 아닌, 자유로운 인간인 '내'가 그를 선택해 결혼했다는 그녀의 선택을 한눈에 보여주는 문장이지 않나. 로체스터와의 결혼은 그녀가 원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 소설은 '나-제인 에어'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해 둔다. 그러므로 그녀는 행복할 것이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의 윤리는 소중하다. [제인 에어]는 영원히 소중하다.

-377쪽, 그리고 죽을 때까지 천사가 안 될 거예요. 저 자신이 될 거예요. 로체스터 씨, 저를 억지로 천사로 만들지도 마시고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마세요. 제가 당신을 천사로 만들 수 없는 것만큼이나 당신도 저를 천사로 만들 수 없어요. 저는 당신께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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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단편집
듀나 지음, 이지선 북디자이너 / 읻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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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물성만으로도 기쁘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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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과 음악 말들의 흐름 10
이제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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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요한 요한슨의 <오르페>를 들으며 천천히 읽는 새벽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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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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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쪽, 영화 혹은 예술이 그들의 상상과 덜 비슷할수록, 출발점과 도달점 사이의 길이 더 길고 변덕스러울수록, 결과가 그들을 더 놀라게 할수록, 더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초기암 트룽파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이 곧 목적'인 것이다.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쓰겠다는 내 애초의 계획과 벨일의 호텔방에서 내가 타이핑 연습을 구실 삼아 짜 맞추기 시작한 것 사이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 끔찍하기까지 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또 6개월이 지났고, 책은 완성되었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열린책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다. 요가-명상에 대한 수십 가지의 정의가 등장한다. '나'는 요가를 한다. 몇십 년 동안 요가와 태극권과 각종 명상법을 섭렵하고 오랜 기간 수련해 온 숙련자다.


이것은 요가에 대한 책이 아닐 수도 있다.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양극성 장애로 인한 정신병원 입원, 그리스 섬에서 만난 시리아 난민 아이들에게 글쓰기 가르치기, 여자들, 요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라울 뒤피의 그림으로 형상화된 지옥 밑바닥으로 '나'를 등떠민다.


'나'는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 본인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에 흥미를 느껴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소설이고 소설이 아니기도 한 매력적인 책들. [나 아닌 다른 삶]과 [왕국], [리모노프]와 [러시아 소설]은 읽는 중이다. 모두 작가가 등장하여 내가 겪은 사건, 느낌, 감정, 생각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솔직하게 밝힌다.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면 그의 책은 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진실을 형상화하는 이야기라면 이건 소설이 맞다.


-215쪽, 나는 문학에 대해, 그러니까 내가 실행하는 문학에 대해 하나의 확신이, 오직 하나의 확신이 있으니, 이곳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장소라는 것이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이 소설, 혹은 문학, 한 권의 책을 즐기는 방법은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련된 요가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시작된 야심 가득한 프로젝트가 어떤 풍랑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온갖 고생스러운 모험 끝에 닿게 된 미지의 섬이 어떤 모습인지 여정 전체를 감상해 보기. 지옥의 밑바닥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 죽지 않게 되는지 끝까지 함께하기. 결국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기.


어쩌면 요가로 대표되는 명상 수행 역시 명상을 통해 어떤 인간으로 바뀔지 기대하기보다 요가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과정이 삶의 끝보다 훨씬 중요하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고, 죽지 않는 과정 자체가 삶이고, 삶이 나 자신이다.


이것은 요가에 관한 책이 맞다.


-447쪽, 우리는 계속해서 죽지 않는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계속 죽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여기에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자신의 신용 한도를 다 써버렸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무언가가 일어난다.


에마뉘엘 카레르,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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