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단편소설 전집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0
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 버지니아 울프 학회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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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는 또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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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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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 독서의 역사, 문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만의 사적인 '소설의 역사'를 서술하자면 연대기의 시작에 자리한 이름이 은희경이다. 중2의 나는 국어선생님이 재미있는 소설이니 읽어보라며 추천해 주신 [새의 선물]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소설은 어린 나를 매료시켰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결이 달랐다. 시작부터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1쪽) 같은 문장이 튀어나왔다. 사춘기를 통과 중인 내게 은희경의 냉소는 삶이라는 미궁을 인도하는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은희경 [새의 선물] 그녀의 냉소를 한 손에 쥐고 이후 출간되는 작품들을 성실하게 따라 읽었다. 감탄하고, 의아해하고, 때로는 실망하며 은희경이란 이름이 하나의 장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태연한 인생] 이후 새 장편소설이 나온다는 소식에 알라딘 인터넷서점 '새로나올 책' 카테고리를 계속해서 새로고침했다. 1970년대 여대 기숙사가 배경이라고 했다. 1960년대의 진희가 자라 여대에 가게 된다면? 소설 속 '나'인 김유경의 목소리를 빌려, 2017년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은희경 [빛의 과거] 181쪽 이제 냉소는 삶의 성실성이 아닌 무력함의 표현이라고, 자신의 삶은 상처받기 싫어 끊임없이 회피하고 수긍하며 이를 변명하는 데 급급하다 조금씩 '인생의 포물선이 하강하는 것을'(325쪽) 지켜봐야 했음을 덤덤하게 고백한다. 그 고백의 계기가 된 건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 77년 같은 기숙사에서 만났고 우연이 겹쳐 관계가 이어지게 된 김희진과 김희진이 쓴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라는 소설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과 공유한 시간이므로 누구도 과거의 자신을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하거나 유기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은희경 [빛의 과거] 18쪽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김희진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설 속 소설인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에 쓰인, 김유경을 포함해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양애란, 곽주아, 최성옥, 이재숙 등의 인물들을 '공주'라 부르며 희화화하는 소설 전략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나'(김희진)를 통찰력 가진 성숙한 주인공으로 형상화하는 의도가 빤하지 않나. 소설을 한 번 더 반복해 읽으면서 이 [빛의 과거] 소설 자체가 '나'(김유경)의 또 다른 편집된 과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별적인 다름이 필연적으로 섞이는(28쪽)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공유된 과거를 아예 폐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우고 싶은 과거라도 인간은 오롯이 혼자서만 살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은 필연적으로 뒤섞인다. 김유경은 말더듬이라는 약점을 핑계로 삶과 대면하는 순간마다 도망치기 바빴고, 김희진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를 편집했다.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에게서 나의 또 다른 생의 긴 알리바이를 보았던 것이다.'(13쪽)

서로가 서로의 문제집 답지이자, 상대방의 알리바이인 관같은 창문이라도 유리의 두께나 창문의 방향, 각도에 따라 빛의 색이 달라지듯이 같은 과거의 시간은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적힌다. 김희진과 김유경이 되살려 내는 1977년도의 여자 기숙사생들, 여학생이란 '조강지처, 애인, 첩, 식모' 네 가지로만 평가되던(26쪽) 시대 어떤 카테고리로도 설명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었던 개별적인 여자들. 최성옥과 송선미, 양애란, 이재숙, 오현수, 곽주아, 이경혜의 이름들.

훈육과 세뇌가 기본인 가학적인 카드 섹션 연습으로 형상화된 개성의 말살이 당연시되던 군부 독재의 시대 각자의 방식으로 '다름'을 추구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내게 약간의 슬픔을 남겼다. 소설 막바지 김유경이 덤덤하게 토로하는 독백의 여운 때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쪽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유성우의 밤은 같은 풍경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책에서 말하듯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일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진실이 현재를 움직인다. 불변하는 과거나 유동적인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 소설은 회고록에 가깝고 2017년의 현재 역시 반쯤 굳은 콘크리트처럼 극적인 변화가 거의 없는 시간대라 이 독백이 슬프게 다가오면서도 이야기로 생생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유독 힘겹게 완성하셨다는 이번 소설의 다음이 있다면 이 문장을 예고편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편집되거나 유기된 과거가 현재를 덮치는 이야기, 또 한 번 기다림이 시작된다.

은희경 [빛의 과거]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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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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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현재의 존재라는 사실을 길-게 증명하는 소설이다.

윤성희의 [상냥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과거의 인연이 닿은 사람들로 이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민, 그는 과거에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인기 드라마에 아역 진구로 출연했었고, 남편을 일찍이 잃은 어머니 손에 키워졌고, 어른이 되어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드라마 출연 당시 함께 연기했던 연기자들과 재회하고, 녹화 도중 형민은 스튜디오를 뛰쳐나가고, 계속 달리면서 자신의 아내 상현과 딸 하영을 생각하고, 상현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 이야기, 하영의 친구 이야기, 형민이 근무하는 회사 박대리와 강차장 이야기, 프로그램 사회자 이야기, 사회자의 부모 이야기...익숙한 윤성희 소설의 전개 방식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긴밀하게 연결된 뇌세포처럼 서로 이어지면서 저마다 빛을 발한다.


이 소설을 읽는 방법 중 하나로 수많은 등장인물 중, 왜인지 마음이 자꾸 끌리는 인물을 선정하여 과연 어떤 사람인지, 왜 신경이 쓰이는지 정리해 보는 것이다. 나는 주인공 형민을 제외하고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사회자가 가장 눈길이 갔다. 불미스러운 일로 공중파 방송국에서 퇴출당하고, 시청률이 미미한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되고, 형민과 녹화 중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끝내 유서 한 장 남기고 떠난. 유서의 내용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211쪽) 형민은 사회자의 장례식장 앞을 서성이다 다시 한 번 더 도망친다.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를 하면서. 


그 미안하다는 말의 뜻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을지? [상냥한 사람]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보통 우리는 서로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 들어주는 이 없이 공허하게 버려지는 말들.

윤성희 소설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는 소중하게 다뤄진다. 형민은 아파트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아파트 공원을 배회하고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아내 상현과 이혼 후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퇴사 후 폐교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운영하는 강 차장의 이야기를 막걸리를 마시며 귀담아 듣는다. 


[상냥한 사람]에서 큰 갈등은 이 '듣기'의 활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 회사 횡령 사건에 휘말린 박대리가 형민에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형민은 들어주지 않았고 박대리는 차도에 뛰어든다. 딸 하영은 친구 은주를 다른 친구가 괴롭힐 때 방관했고 형민은 하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서움을 느낀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이 형민의 돌발행동으로 녹화가 끊기지 않고 진행되었다면 사회자는 무사했을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중간한 녀석들뿐이네. 그는 반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어중간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중간이라는 말 앞에 붙은 '어'자는 무엇인가. 어중간, 어정쩡, 어수룩...어로 시작되는 말들을 찾아보다가 그 모든 단어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86쪽)


타인에게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어쩌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할 줄 아는 마음. 형민은 '미안하다'고 외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어설픈 내가 미안합니다.


제목의 '상냥한 사람'이라는 뜻은,

내 눈 앞의 사람이 낯선 타자가 아닌 가느다란 선이라도 이어진 인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반성하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슬프다는 말 대신 예뻤어, 좋았어, 기뻤어, 행복했어, 그런 말(302쪽)을 할 줄 아는 사람.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소설 본문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상냥하다'는 단어를

반복해서 불러 본다.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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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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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주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나의 희망은 어느정도는 충족되었는데, 곳에 따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해변 안쪽 지역을 몇시간씩, 때로는 며칠씩 걸으면서 모처럼 기분이 아주 홀가분해졌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문장)

제발트가 쓴 [토성의 고리] 첫 문장은 우리를 가벼운 혼란 속으로 데려간다. 내가 지금 읽는 것이 소설인지, 에세인지, 여행기인지 그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써퍽 주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해변이라 하니 바닷가를 따라 도보로 여행을 하였구나, 머릿속에 정리하고 책을 읽는다.

혼란은 점점 더 심해진다. 여행 중이라는 화자의 이야기는 토머스 브라운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작가가 등장하고 써머레이턴 대저택, 아 영국엔 오래된 저택들이 많겠구나, 하고 바닷가를 따라 걷는데 청어 이야기를 하더니 잠깐 방심한 사이 보르헤스의 단편 속 거울이 불쑥 우리를 비추고 조지프 콘래드와 콩고의 비극, 태평천국의 난과 서태후에서 누에로 중심 화제가 계속해서 바뀐다.




[토성의 고리]는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고 정리된 결말을 맞이하는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 전체를 느슨하게 이어주는 중심 흐름은 존재한다.

첫문장에서 화자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지역을 홀로 걸었다는 부분에 주목하자. 이 여행 일년 뒤 그는 온몸이 마비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한다. '오랜 과거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며 느꼈던 전율의 기억이 그를 마비시킨 것이다. 병원에서 그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한다. 여행 중 어떤 파괴의 흔적들을 보았는지,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접점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쓴다. 하나씩 따로 들고 보면 독립적인 소재들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다.

별의 잔해가 모여 생성된 토성의 고리처럼.


나는 이 소설을 2011년에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어디선가 제발트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이 소설과 [아우스터리츠] 두 종이 번역 출간된 시기였다. 20대의 나는 [토성의 고리]를 한 번 읽은 뒤 독후감은 따로 남기지 않았다. 당시 나는 제발트를 제대로 감상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 줄 짜라 감상평만 남기고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다.


'토성의 아름다운 고리는 사실 가까이서 보면 별의 잔해들이 이어진 결과물'




작품의 잔해들만 주워들다 만 싱거운 평가.

8년 만에 다시 읽은 토성의 고리 속 반복되는 소재들이 눈에 띈다.

토머스 브라운은 소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등장하며 화자에게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도록 돕는다. 책 표지에 부분적으로 등장한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그림은 시신을 봐야 할 의사들의 시선이 묘하게 비껴나가 해부학 도해서를 향하고 있다. 진리를 직시하지 못하고 진리를 복제한 도해서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여기서 3장의 보르헤스 단편 <뜰뢴, 우끄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속 거울이 등장한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민음사의 [픽션들]에 실려 있는 이 단편에 토머스 브라운이 역시 언급된다. 여기서 거울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킨다'는 속성을 강조하는데, 이 단편은 복잡한 백과사전식 서술 끝에 '세계는 틀뢴이 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누에. 거울은 현실을 복제하고 누에는 실이라는 현실을 끝없이 생산한다. 거울처럼 복제되는 전쟁들, 1차와 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가 저지른 학살과 파괴, 콩고의 어둠의 심연,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쉼없이 이어지는 파괴의 불꽃, 태평천국의 난과 원명원 파괴, 아일랜드 독립투쟁, 불타는 저택들, 폐허로 남은 군사기지 오퍼드니스.

우리가 고안해낸 기계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질지 아는 사람은 없다. (199쪽)

화자를 쓰러뜨린 것은 우울이다. 파괴가 반복되는 인간 문명의 어리석음이 주는 끝없는 우울. 전쟁은 계속되고 인간은 누에처럼 실을 뽑아내는 도구로 전락해 노동력을 뽑아내다 소진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트 [토성의 고리] 259쪽

진보하리라 믿었던 인간의 역사가 제자리걸음, 아니 오히려 뒤로 후퇴한다는 깨달음은 우울하다. 작품 전체적으로 흐르는 중심인 우울의 정서, 우울의 백과사전식 서술은 낯설고, 낯설기에 매혹적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이 우울의 정서에 빠져 무기력하게 손 놓고 있기보다 이것을 쓰기로 마음먹은 화자의, 제발트가 가진 강한 의지다. 입원한 병원 창틀 속 네모난 무채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작가는 쓴다. 불꽃이 휩쓸고 간 인간 역사의 폐허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토머스 브라운의 문장을 빌려 소설을 끝맺는다.

그리고 비단 상인의 아들이었으니 비단을 보는 안목이 있었을 토머스 브라운은 [널리 진실로 오인되는 견해들]의 내가 다시 찾아내지는 못한 어느 부분에서 당대의 네덜란드 습속에 대해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 그곳에서는 망자의 집에 있는 모든 거울과, 풍경이나 사람 혹은 들판의 열매가 그려진 모든 그림을 슬픔을 표현하는, 비단으로 만든 검은 베일로 덮는 풍습이 있었고, 이는 육신을 떠나는 영혼이 마지막 길을 가면서 자기 자신을 보거나 다시는 보지 못할 고향을 보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소설의 마지막 문장)

인간의 거대한 실수를 복제하는 복도 끝 거울에 검은 베일을 덮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단 한 명의 인간이라도 이 소설을 읽고 거울을 베일로 덮을 수 있도록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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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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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다’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에세이 선집,
이 기세로 [무한한 재미]까지 번역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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