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임 - 오은 산문집
오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읽아웃의 사랑스러운 수다쟁이 포지션을 맡고있는 오은 시인님의 산문집, <다독임>을 읽었다. 책읽아웃을 통해 2주에 한번씩 목소리로 만나왔던 오은시인님에 대한 이미지는 맑고, 사랑스럽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수다러워지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함께 호들갑스러워지던 사람, 이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어졌다. 세상을 아무렇게나 되는대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은 시인, 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내가 가진 이미지는 이런 것. 유난히 남다르게 예민한 안테나로 세상의 빈곤한 삶에 온 힘을 다해 파고들어 정성껏 어루만지고 다듬어 결국 반짝이게 만드는 사람, 이라는 이미지. 그래서 그들은 유난히 남들보다 더 자주 아파하고, 더 자주 슬퍼하고, 더 자주 행복해하고, 더 자주 신나하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오은 시인님처럼 말이다. 오늘도 오은 시인님은 다독(多讀)을 통해 세상을 다독이고(p.6), 세상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p.116) 그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질문하며(p.107), 남의 일을 나의 안으로 끌어들여(p.101) 스스로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내다보기도 (p.79) 하겠지. 그리고 그러한 시선과 질문 끝에서, 단어의 외연을 넓혀가(p.30)고 계시겠지. 특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오은 시인님만의 안테나로 그렇게 포착한 다양한 생각들을 읽을수 있는 책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유난히 크게 두드린 이야기는 다름아닌 '부끄러움'과 '시행착오'에 관한 이야기였다. 두 단어 모두 나에겐 그저 부정적 말주머니 안에 담겨있던 단어였는데 오은 시인님의 글을 읽고나니 새삼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제대로 마주하려하지 않았었다. 그저 숨기고 모른척해야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어떤 일에 실패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제대로 마주해 '반성을 하고, 조금 더 떳떳하고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p.137)'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일들 앞에서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에게 더 가까워지는(p.239)'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시인님은 말하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마주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낮잠을 자다 깨어나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조카를 꼬옥 품에 안고 등을 다독다독, 다독여주었을 때 손바닥에 전해지던 그 어린 몸의 온기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엄마의 예순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프라하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내 손등을 다독다독 다독여주던 엄마 손의 온기역시,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어떤 기쁜 순간, 혹은 어떤 슬픈 순간. 많은 사람들과 다독임을 나누었다. 다독다독, 우리는 그렇게 서로 그 행복이 흩어지지 않도록 잘 다독였고, 그 슬픔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차분히 다독였다. 그 다독임의 순간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겠지. 부지런히 다독다독, 내 삶속의 모든 것을 다독이며 살아가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자유 - 김인환 산문집
김인환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 이제 같이 함께 걸어볼까요, 하며 가볍게 걸음을 슬쩍 옮기던 책이 바로 돌변하여 동학을 시작으로 불교 이론, 중세철학, 경제학, 과학과 조세법까지. 대학 강의였다면 네? 갑자기요?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하며 교재를 뒤적거렸을법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개론 수업을 들으러 왔고, 일주일의 수강 변경 기간 동안 음, 이 강의 느낌 좋은 걸, 하며 수강하기로 결심했더니 3회차 강의부터 갑자기 대학원 수업으로 강제 이동당한 느낌이었던, 그야말로 읽기에 버거웠던 책, 타인의 자유를 읽었다.


처음엔 인덱스 테이프를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나는 테이프를 포기하고 연필을 손에 쥐어야만 했다. 테이프가 하염없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연필로 도구를 바꾼 뒤 모르는 부분엔 동그라미와 물음표를 기재하고 마음을 두드리는 문장엔 짙게 밑줄을 그었다. 거의 대부분의 페이지, 거의 대부분의 문장에 연필로 메모가 덧씌워졌다. 이렇게까지 어려울 일인가, 하고 투덜대려고 할 즈음 한 꼭지가 마무리되고, 그 후엔 잠깐 쉬어갈까,라는 느낌으로 조금은 덜 난해한 글이 이어졌다. 강약의 조화 덕에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장들이지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들고자 한 편집자분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학문들이 한 사람에 의해 한 권의 책에 몽땅 담겨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결국 책 속에 있었다. "의미는 책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들이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다(p.30)"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학문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깊이의 비젼 대신 옆으로 보는 비전을 따라가며 맥락을 구성하라(p.30)"고 교수님은 말씀하신다. 책을 읽으며 서두에 말한 '맥락의 독서', '미완성의 독서', '중도의 독서', 그리고 '항상 중요한 무엇인가를 남겨 놓는 잉여의 독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갔다. 연관성 없어 보였던 학문들이 하나의 학문과 한 권의 책으로만 채워놓은 빈틈이 많은 세계 속에서 점차 비어있는 퍼즐을 완성해가며 결국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방법,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어주었다. 또한 "이성적 원리에 따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할 때 인간은 교양의 나라로 도피하게 된다.(p.126)"는 문장을 통해 학문을 학문으로만 마주하지 말고 믿고 소리 내어 말하라고, 움직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얼마나 이해했어요?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배시시 얼굴을 붉히고 뒷머리를 긁적대며 20%....?라고 답하겠지. 만약 이 책이 대학 강의였다면 기말고사 시험지엔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열심히 들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내년에 다시 뵙겠습니다,라며 눈물 젖은 긴 장문의 편지를 적고 교수님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갔으리라.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려웠고 버거웠다. 하지만 "고통을 피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도 성취하지 못한다.(p.55)". "인간은 실재하는 진리를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평생을 통해 인격을 완성해나가야 하며 이렇게 사는 것만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인간의 길이(p.98)'므로, 물음표를 잔뜩 써놓은 키워드들을 잘 정리해서 하나하나 공부하며 맥락을 구성해가야겠다. 우선은 가장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던 릴케, 부터 시작해보아야지.


이 책의 저자인 김인환 교수님은 돌아가신 황현산 선생님의 지기라고 하신다. 표지 속 숲을 걷고 있는 노신사 두 분을 황현산 선생님과 김인환 교수님이라고 생각하며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면 든든한 스승의 뒤를 따라 걷는듯한 느낌이 든다. <난다 출판사> 덕분에 황현산 선생님을 알게 되었었다. 2013년에 발간된 <밤이 선생이다>를 통해서였다. 처음 선생님의 글을 본 이후로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반갑고 감사해서 열심히 뒤를 쫓았었다. 그런 선생님이 떠나가신 자리에 선생님의 친우분이 찾아와준 느낌이다. 황현산 선생님보다는 조금 더 엄하고, 무뚝뚝하시지만 흔들림 없이 앞으로 걸어가는 또 다른 선생님의 뒷모습을, 다시 쫓아 걸어가 보아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박연준 시인님의 <소란>을 읽었다. 난다 출판사에서 새 옷을 입고 재출간되는 이 책을 향한 편집자분들의 소란스러운 애정이 담뿍 전해져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참아보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소란스러운 감정의 소리에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책을 받아보니, 단단한 커버 위에 인쇄된 조셉로루소의 그림속 연인의 뒷모습에서도, 그런 소란스러운 행복의 기운이 은은하게 전해져왔다. 그런 은은함과 잘 어울리는 톤 다운된 민트색 가름끈은 또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시인님이 쓰신 개정판 서문 속의 "진짜 삶은 '어림'이 깃든 시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어림에서 멀어집니다." 이 문장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나는 언제부터, 얼마나, 어림에서 멀어져 왔을까. 언제부터 마음속의 소란을 그저 잠재우려고만 해 왔을까. 사랑해서, 설레어서, 혹은 아파서, 슬퍼서. 소란스러워지던 마음을 침묵하게 만들어버렸던-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했던, 애써 능숙한척, 별 거 아닌 척, 괜찮은척 하며 서툴게 어른 행세를 했던 지난 시간이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너무너무 아쉬워졌다. 우리, 모든 감정 앞에서 '어림'을 잃지 말자. 그 마음의 소란 속에서 '결국 뭐라도 얻을(p.13)'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시인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사랑과 행복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의 마음들을 적어내려간 아기의 발간 볼 같은 포동포동한 행복의 문장들도 좋았지만 이상하게 슬픔의 문장들에 더 마음이 갔다.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서 결국 푸르른 잎사귀를 틔워내는 옹골진 새순같은 문장에 담긴, 슬픔속에서 끝내 긍정의 힘을 이끌어내는 강하고 단단하지만 선하고 우아한 마음을 마주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좋은 문장들 위에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고, 또 붙이다 보니 수두룩하게 오렌지빛 책갈피가 생겨버렸다.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뻐근함이 느껴질 때면 책장에서 <소란>을 꺼내어 들고 싱싱한 오렌지빛 문장들을 오물오물 씹어먹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
정용준 지음, 고지연 그림 / 난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상상하는 법을 잊어간다. 만물의 원리를 다 아는 것 마냥 더 이상 눈앞에 펼쳐진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어른에게 상상의 힘을, 호기심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 돌아온다. 그건 바로 어린 생명의 탄생. 꼬물꼬물 세상에 막 도착한 어린 생명이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문득 나도 어렸을 땐 그랬었지. 혹은 그랬었나. 하며 잃어버린 어떤 시선을 다시 되찾게 된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조카를 돌보며, 나 역시 그랬다.


그냥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에 조카는 '왜?'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붙여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지만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왜'에 대한 답을 조카와 함께 만들어내기도 했다. 언젠가 조카도 어른이 되어 그때 고모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깨닫게 될 테지만 말이 되는 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고모와 만들어낸 던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조카의 마음속에 즐거움으로 가득한 기억상자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그저, 행복해진다.


* * *


그런 조카가 조금 더 크면 소리 내어 읽어주고 싶은 정용준 작가의 동화, <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를 읽었다. 일곱 살 나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세계의 이야기이다. 물방울 비행기, 콜라 잠수함. 아이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상상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는 반짝였고,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했다. 자꾸만 우는 동생 라라를 그저 달래서 다시 재우려고만 생각했던 엄마 아빠와는 달리, 나나는 동생이 왜 우는 걸까 내가 도와줄 순 없는 걸까 고민하다 무서운 괴물의 정체를 알게(상상하게) 되었고, 무섭지만 용기를 내어 괴물을 물리치려고 달려나간다. 동물 친구들과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합을 하고, 그림자 괴물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 그를 힘껏 위로해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나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 나나의 세계 옆에 황량하고 칙칙한 아빠의 세계가 있다. 나나는 아빠의 세계가 어둡고 추워 보이는 것이, 그 세계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이 슬픈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아빠와 또다시 꿈 여행을 떠난다.


모든 사람의 꿈의 세계에는 기억의 바다가 있어요.

옛날 기억과 감정, 느낌과 마음을 보관하거나 감추는 곳이죠.

엄마가 만들어줬던 빵의 냄새.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 기분.

무서울 때 엄마 아빠가 걱정 말라고 꼭 안아줬던 포근한 느낌 같은 것들은 

다 기억의 바다에 저장돼요.

(...)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 서 있으면 

옛날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이지요.

때론 바다가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옛날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답니다.

P76-78


나나는 아빠의 바다에서,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의 기억 상자를 하나씩 뜯는다. 상자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아빠의 세계에선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색색의 폭죽이 터지고, 초록 풀이 자라났다. 아빠가 아빠가 되기까지의 기억들, 슬픔에서부터 기쁨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돌아와, 아빠는 나나와 함께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나나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른이 되기 위해, 단단해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나나의 아빠처럼 상자에 밀봉하여 기억의 바다로 던져버렸을까. 슬프고 힘든 기억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그 옆에 함께 있던 소소하고 아름다운 행복들까지 나는, 그 상자에 넣어 던져버렸을 테지. 


나나의 아빠처럼, 나 역시 조카를 통해 그 잊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올 때가 있다. 아직 한글도 모르면서 골똘하게 그림책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마루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친구가 놀자고 부르는 소리에, 책이 더 읽고 싶었던 내가 엄마에게 소곤소곤 나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했던 어느 한낮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 책상 위, 제주도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라 껍데기를 보고 이게 뭐야아? 하고 묻기에 이 안에 바다가 들어있어!라며 귓가에 소라 껍데기를 대주자 귀 기울여 소리를 듣다가 눈이 동그래지며 우와아! 하고 깜짝 놀라던 조카의 모습에, 거실에 있던 항아리 입구에 귀를 대고 동굴 소리가 들린다고 놀라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카는 나나처럼, 잊고 있던 내 기억 상자를 하나하나 풀어내어 추억을 다시 내 곁으로 데려와주겠지.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주겠지. 앞으로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가거나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 폴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괜스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아련히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어준 이 책이, 참 고맙다.


* * *


결혼할 생각도, 그러므로 당연히 출산할 생각도 없는 나이지만, 조카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을, 잃어버린 호기심을 조금씩 다시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카가 참 보고 싶어졌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있다. 흑흑) 아빠와 엄마, 고모와 할머니를 요리조리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우리 서연이도 매일매일 나름대로 힘겹게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먹기 싫은 밥을 먹어야 해서, 얼른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데 꼼꼼히 내용을 읽어주느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미워서,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해서, 힘들고 화나는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이사이 엄마와 함께 물놀이를 하고 고모가 사 준 새 신발을 신코 콩콩 뛰어보며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고, 또 기억하게 될 테다. 아무튼 조카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다채로운 꿈과 상상의 세계에서 행복하기를. 책장을 덮으며 바라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김승희 외 지음, 호원숙 엮음 / 달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곳에선 평안하신지요. 오늘은 처음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려봅니다. 선생님. 부끄럽지만 책과 거리가 멀었던 어린이, 아니 청소년, 아니, 청년 시절까지도. 정말 책과 먼 인생을 보낸 덕분에, 그나마 책과 조금 가까워진 후에도 경성의 작가들이나 일본 작가들에게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부끄럽게도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그것도 작가님의 소설 작품이 아닌, 선생님의 마지막 산문집인 <세상에 예쁜것>을 통해서 말이죠. 그 후에 부러, 몇 권 열심히 찾아 읽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 대한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지난 기록을 되짚어보니 <친절한 복희씨>와 제 1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있던 <그리움을 위하여>가 제가 읽은 선생님의 작품의 전부더군요. 감히 이런 제가 '우리'에 끼어도 되는걸까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작품을, 그리고 인간 박완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읽으며, 선생님은 한결같은 분이셨을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과 문학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인터뷰어와의 대화이던간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한결 같음으로 써내려가셨을 선생님의 작품들을 아직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점이, 저는 지금 참 부끄럽습니다. 서둘러 애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선생님의 성함으로 검색을 해 보았는데,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어떤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할지 막막함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문학동네와 세계사에서 각각 출간해 놓은 산문 전집가 소설 전집을 사야할까, 아니면 선생님의 작품이 태어난 시간을 따라 <나목>에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아직까지 고민만 수 없이 하며 선생님의 작품읽기를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초등학생 때, 전업주부셨던 엄마는, 책을 자주 읽으셨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직장에 다니고 나서부터는 통, 책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엔 한가하실 때면 뿅뿅대는 핸드폰 게임에만 몰두하시곤 합니다. 그런 엄마에게 함께 책 읽기를 권해보았습니다. 어떤 책을 함께 읽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엄마가 읽어서 좋았던 책이 뭐냐 묻자, 박경리 선생님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과 선생님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말씀하시더군요. (물론 완벽한 제목을 말씀하시진 못하셨습니다. 그 왜..... 싱아...... 라고 하셨죠.)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엄마에게서, 제가 읽지 못한 선생님의 소설이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거라고는 정말이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선생님에게로 다가서는 그 시작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로 하기로. 그리고, 선생님의 소설을 하나하나 엄마와 함께 읽어보기로 말입니다. 선생님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나의 추억거리가 또 하나 늘어나게 될 거라는 기대감, 그리고 누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재미나지도 않는 엄마와 저의 무사안일한 매일매일이 선생님의 소설을 통해 반짝이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에 가슴이 벅차옵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고통에만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해서 무기력해져버린 삶에도- 위안이 필요하고 (P201), 그렇게 말씀하신 선생님의 작품은 엄마와 저의 무기력해진 삶에 분명, 큰 위로가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소설과 수필을 하나하나 열심히 읽어가면 언젠가. 저도 선생님을 아끼는 수 많은 사람들의 등 뒤에 살짝, 줄 설 수 있게 되겠지요. 그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이 책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을 꺼내어 읽고, 선생님, 마음이 한껏 좋았어요, 만나뵈어서.라고 부끄러운 마음 없이 외쳐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