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는 아빠의 바다에서,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의 기억 상자를 하나씩 뜯는다. 상자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아빠의 세계에선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색색의 폭죽이 터지고, 초록 풀이 자라났다. 아빠가 아빠가 되기까지의 기억들, 슬픔에서부터 기쁨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돌아와, 아빠는 나나와 함께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나나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른이 되기 위해, 단단해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나나의 아빠처럼 상자에 밀봉하여 기억의 바다로 던져버렸을까. 슬프고 힘든 기억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그 옆에 함께 있던 소소하고 아름다운 행복들까지 나는, 그 상자에 넣어 던져버렸을 테지.
나나의 아빠처럼, 나 역시 조카를 통해 그 잊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올 때가 있다. 아직 한글도 모르면서 골똘하게 그림책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마루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친구가 놀자고 부르는 소리에, 책이 더 읽고 싶었던 내가 엄마에게 소곤소곤 나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했던 어느 한낮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 책상 위, 제주도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라 껍데기를 보고 이게 뭐야아? 하고 묻기에 이 안에 바다가 들어있어!라며 귓가에 소라 껍데기를 대주자 귀 기울여 소리를 듣다가 눈이 동그래지며 우와아! 하고 깜짝 놀라던 조카의 모습에, 거실에 있던 항아리 입구에 귀를 대고 동굴 소리가 들린다고 놀라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카는 나나처럼, 잊고 있던 내 기억 상자를 하나하나 풀어내어 추억을 다시 내 곁으로 데려와주겠지.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주겠지. 앞으로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가거나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 폴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괜스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아련히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어준 이 책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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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생각도, 그러므로 당연히 출산할 생각도 없는 나이지만, 조카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을, 잃어버린 호기심을 조금씩 다시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카가 참 보고 싶어졌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있다. 흑흑) 아빠와 엄마, 고모와 할머니를 요리조리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우리 서연이도 매일매일 나름대로 힘겹게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먹기 싫은 밥을 먹어야 해서, 얼른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데 꼼꼼히 내용을 읽어주느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미워서,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해서, 힘들고 화나는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이사이 엄마와 함께 물놀이를 하고 고모가 사 준 새 신발을 신코 콩콩 뛰어보며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고, 또 기억하게 될 테다. 아무튼 조카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다채로운 꿈과 상상의 세계에서 행복하기를. 책장을 덮으며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