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
정용준 지음, 고지연 그림 / 난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상상하는 법을 잊어간다. 만물의 원리를 다 아는 것 마냥 더 이상 눈앞에 펼쳐진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어른에게 상상의 힘을, 호기심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 돌아온다. 그건 바로 어린 생명의 탄생. 꼬물꼬물 세상에 막 도착한 어린 생명이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문득 나도 어렸을 땐 그랬었지. 혹은 그랬었나. 하며 잃어버린 어떤 시선을 다시 되찾게 된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조카를 돌보며, 나 역시 그랬다.


그냥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에 조카는 '왜?'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붙여 생각하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지만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왜'에 대한 답을 조카와 함께 만들어내기도 했다. 언젠가 조카도 어른이 되어 그때 고모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깨닫게 될 테지만 말이 되는 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고모와 만들어낸 던 말도 안 되는 세계가 조카의 마음속에 즐거움으로 가득한 기억상자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그저, 행복해진다.


* * *


그런 조카가 조금 더 크면 소리 내어 읽어주고 싶은 정용준 작가의 동화, <아빠는 일곱 살 때 안 힘들었어요?>를 읽었다. 일곱 살 나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세계의 이야기이다. 물방울 비행기, 콜라 잠수함. 아이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상상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세계는 반짝였고,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했다. 자꾸만 우는 동생 라라를 그저 달래서 다시 재우려고만 생각했던 엄마 아빠와는 달리, 나나는 동생이 왜 우는 걸까 내가 도와줄 순 없는 걸까 고민하다 무서운 괴물의 정체를 알게(상상하게) 되었고, 무섭지만 용기를 내어 괴물을 물리치려고 달려나간다. 동물 친구들과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합을 하고, 그림자 괴물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난 후 그를 힘껏 위로해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나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 나나의 세계 옆에 황량하고 칙칙한 아빠의 세계가 있다. 나나는 아빠의 세계가 어둡고 추워 보이는 것이, 그 세계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이 슬픈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아빠와 또다시 꿈 여행을 떠난다.


모든 사람의 꿈의 세계에는 기억의 바다가 있어요.

옛날 기억과 감정, 느낌과 마음을 보관하거나 감추는 곳이죠.

엄마가 만들어줬던 빵의 냄새.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 기분.

무서울 때 엄마 아빠가 걱정 말라고 꼭 안아줬던 포근한 느낌 같은 것들은 

다 기억의 바다에 저장돼요.

(...)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 서 있으면 

옛날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이지요.

때론 바다가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옛날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답니다.

P76-78


나나는 아빠의 바다에서,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의 기억 상자를 하나씩 뜯는다. 상자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아빠의 세계에선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색색의 폭죽이 터지고, 초록 풀이 자라났다. 아빠가 아빠가 되기까지의 기억들, 슬픔에서부터 기쁨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돌아와, 아빠는 나나와 함께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도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나나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른이 되기 위해, 단단해지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나나의 아빠처럼 상자에 밀봉하여 기억의 바다로 던져버렸을까. 슬프고 힘든 기억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그 옆에 함께 있던 소소하고 아름다운 행복들까지 나는, 그 상자에 넣어 던져버렸을 테지. 


나나의 아빠처럼, 나 역시 조카를 통해 그 잊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올 때가 있다. 아직 한글도 모르면서 골똘하게 그림책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조카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마루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친구가 놀자고 부르는 소리에, 책이 더 읽고 싶었던 내가 엄마에게 소곤소곤 나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했던 어느 한낮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 책상 위, 제주도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라 껍데기를 보고 이게 뭐야아? 하고 묻기에 이 안에 바다가 들어있어!라며 귓가에 소라 껍데기를 대주자 귀 기울여 소리를 듣다가 눈이 동그래지며 우와아! 하고 깜짝 놀라던 조카의 모습에, 거실에 있던 항아리 입구에 귀를 대고 동굴 소리가 들린다고 놀라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카는 나나처럼, 잊고 있던 내 기억 상자를 하나하나 풀어내어 추억을 다시 내 곁으로 데려와주겠지.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일상을 다채롭게 만들어주겠지. 앞으로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가거나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 폴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괜스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아련히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어준 이 책이, 참 고맙다.


* * *


결혼할 생각도, 그러므로 당연히 출산할 생각도 없는 나이지만, 조카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을, 잃어버린 호기심을 조금씩 다시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카가 참 보고 싶어졌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있다. 흑흑) 아빠와 엄마, 고모와 할머니를 요리조리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우리 서연이도 매일매일 나름대로 힘겹게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먹기 싫은 밥을 먹어야 해서, 얼른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데 꼼꼼히 내용을 읽어주느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미워서,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해서, 힘들고 화나는 하루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사이사이 엄마와 함께 물놀이를 하고 고모가 사 준 새 신발을 신코 콩콩 뛰어보며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고, 또 기억하게 될 테다. 아무튼 조카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다채로운 꿈과 상상의 세계에서 행복하기를. 책장을 덮으며 바라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