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안도현

  일생동안 나무가 나무인 것은 무엇보다도 그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늘의 햇빛과 땅의 어둠을 반반씩, 많지도 적지도 않게 섞어서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 저 나무가 나무인 것은

  그늘이라는 것을 그저 아래로 드리우기만 할 뿐

  그 그늘 속에 누군가 사랑하며 떨며 울며 해찰하며 놀다가도록 내버려둘 뿐

 스스로 그늘 속에서 키스를 하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닦거나 성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말과 침묵 사이, 혹은

소란과 고요 사이

 나무는 저렇게

 그냥 서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매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때로는 그늘의 평수가 좁아서

 때로는 그늘의 두께가 얇아서

 때로는 그늘의 무게가 턱없이 가벼워서

 저물녘이면 어깨부터 캄캄하게 어두워지던 아버지를

 나무,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눈 내려 세상이 적막해진다 해서 나무가 그늘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쓰러지지 않는, 어떻게든 기립 자세로 눈을 맞으려는

 저 나무가

 어느 아침에는 제일 먼저 몸 흔들어 훌훌 눈을 털고

 땅 위에 태연히 일획을 긋는 것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터

 

*이 시를 읽을 때 융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무의식으로서, 자아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아의 반대편에 생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하나씩 깨달아갈 때, 그리고 용기를 내어 수용하고  체험할 때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하면서 우리의 의식이 그만큼 넓어지고 통찰이 깊어진다는...

사람은 그림자가 있기 때문에 사람인거다. 그게 없다면 천사나 악마같은 영적인 존재겠지. 그림자를 깨달은 사람은 그 깨달음만큼, 나무그늘같은 여유와 휴식공간을 다른 이에게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가 살아온 꼭 그만큼만 그늘을 만드는'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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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현재에 충실하기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때문에 현재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하게 되지 않기. 과거의 실패나 실수는 바로바로 털어버리고 '후회'하지는 말기. 다만 '반성'하기. 그리고 실수하는 나를 다독여 주기. 미래를 '걱정'하지는 말기. 다만 '준비'하기. 약간의 불안은 견딜 줄 알기-이렇게 할수 있는 사람은 거의 도인이 아닐까? 혹은 바보거나 돈키호테거나...

 만다라 치료라는걸 해봤는데, 노랑은 아버지를, 파랑은 어머니를 상징하고, 따라서 초록은 부모를 상징한다고... 듣고보니 그럴 듯 하다. 어릴때부터 유난히 초록이 좋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을 줄은 짐작도 못했는데... 요즈음은 보라도 좋다. 보라색은 무엇을 상징할까? 고결함이나 고귀함이라면 좋겠다.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지는데...

 현재 내가 해야할 일은 기도인데... 여기에 글로 써서 하는 기도도 기도니까... 참, 그러고보니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일용할 양식'은 육체에 해당하는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도 해당한다고 듣고보니, 더욱 집중해서 그 부분을 암송하게 되었다. 오늘 내가 대하게 될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와 위로와 격려와 깨우침을 적절히 줄 수 있는 영적인 힘이 필요하니까.(또 교만! 주고 받기 위해 라고 해야 할 것을...)

   주님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이렇게 초록으로 하느님을 쓰니까 부성과 모성을 모두 지니신 하느님으로 느껴져 더욱 좋다. 에리히 프롬이 부성적 사랑은 조건부적 사랑(니가 이러이러하게 행동하면 더욱 사랑해 주겠다는...)이고, 모성적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니가 어떤 사람이라도, 어떻게 행동해도 사랑해주겠다는... )이라고 분류했었다.)

 

    성모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영광송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               

                                                                         루가1;46-5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주 가난하고 박복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이가 있다. 나도 그랬고, 가끔씩 잊고 또 그러곤 한다. 짧은 지식이지만, 불교식으로 설명한다면 '업'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하느님 뜻이라는 것이고 세속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것을 성서 여기저기서 당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도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고통스런 죽음을 맞으셨나보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온갖 고통을 겪어내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주시고,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따지고보면 예수님 시대에 살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을 바라본다면, 그분들은 정말로 가난하셨고, 남편인 요셉께서 일찍 돌아가셨다고 전해지는 걸로 봐서 성모님은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까지 젊은 나이에 십자가형으로 죽음당한 '박복한' 여인이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그분들의 삶은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것. 성모님이 그 어머니 성 안나께 잉태되실 때에 이미 하느님 은총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시어 죄에 물들지 않으심으로 해서, 원숙한 인격을 갖추셨겠고, 아기 예수님을 더없이 완전한 모성으로 양육하셨으리라. 예수님은 틀림없이 이세상 어떤 도인보다도 더 원만하고 따뜻하고 품위있는 인격을 갖추셨을 것이고, 잉태되신 순간부터 태어나 자라는 동안 요셉님과 성모님이 더욱 고귀한 인품을 갖도록 그 신성의 영향력을 행사하셨을 것이다. 

 성가정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사랑 넘치는 가족. 가끔 엉뚱하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요셉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그 분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가 이닐까 하는... 아름답고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동정을 지켜줘야 하는 괴로움이 얼마나 크셨을까 하는... 성모님은 원죄없이 잉태되셨고, 여자이고, 아들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요셉님은...

 난 요셉님이 좋다.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요셉님은 의롭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다정하고 조용한 분이셨을 것 같다. 우리 성당은 성요셉 성당이라서 요셉성인의 상이 모셔져 있어서 요셉님께 인사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우리 친정 남자들, 시댁 남자들 마음이 요셉님처럼 의롭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따뜻하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사고 청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이 결혼식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신앙생활이 잔치처럼 즐겁고 포도주처럼 달콤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시기 위해서라고도 하던데... 마치 유태인들이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들에게 꿀을 묻힌 책을 주어 핥게 한다는 이야기랑 비슷해 보인다. 배움이 이렇게 달콤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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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을 견디기란 참 힘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화, 합리화, 주지화 등등의 방어기재들을 쓰게 되나보다. 이전의 나라면 아마 벌써 이런 기재들을 써서 숨어버렸을 것이다.

 엄마와 올케들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듣고 바라보고 중재하기. 마음아플 거란 생각은 못해봤는데 왠지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욕심으로 인한 어리석음에...

 명절때마다 당신 가족을 꽉 채워 놓고 한상 차려서 '화목을 위하여' 건배하면서, 그로인해 며느리들 가족은 빈자리가 생긴다는 사실은 무시하려는 엄마와, 항상 엄마 행동을 방관하시는 아버지. '집어삼키는 모성'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괴롭다. 이런 모습이 어디 엄마 뿐이랴. 나에게도, 이웃에게도, 우리들 중생들에게 다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 때문일 것을...  아이들 나무랄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요즈음 더 자주 든다. 어른들도 아이들과 똑같이, '나좀 봐 주세요.', '내 거야',  '나만', '나는 안그래.' 등등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이들은 power가 미약하니까 악영향이 크지 않지만, 어른들은 얼마나 위험한 power를 가지고 있나. 생각할수록, 사는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할일은 해야지... 이제는 문제가 조금씩 보이고, 간도 조금 부었으니 갈등을 중재하는 총대를 내가 메고 돌진해 봐야겠다. 다들 나더러 하라고들 한다. 며느리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큰올케의 상담자 역할을 맡아 하다보니, 그리고 엄마의 히스테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방관자처럼 굴었는데, 이제는 시누이로서 해결사 역할을 할 때가 됐나보다.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결과이다." -칼 구스타프 융

 내가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잊지 않으면 성령께서 더 쉽게 도와 줄 수 있으실 것이다.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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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 앞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기 지구별에 왜 와 있는가?

 몇달 전부터 가끔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 프란치스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갈지는 내가 노력하기에 달렸을텐데, 어쩌면 그것조차도 많은 부분 타고난 운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요즈음 든다. 내가 노력할 일은 하느님께서 예뻐하실 일을 하고 싫어하실 일은 하지 않는 것일텐데 그 분별력을 갖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실체를 규정할 수 없기에 하느님 아닌 것을 없애 가는 것이 하느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아닌 것, 내가 아니어야 할 것을 없애가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 일단은 대강의 나를 알아야겠기에 여러가지 성격유형 검사들을 해본다. MBTI 성격유형 검사로는 보통때의 나는 INTP- 비현실적이고 타인의 단점을 잘 파악하고 지적 호기심을 가졌다. 우주과학, 철학, 인문학, 인류학, 심리학 등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거나 기도와 명상에 충실하게 되면 INFP가 된다. 내적 신념이 깊으며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그러다가 또 현실에서 상처받거나 내가 내마음대로 조절이 안되면 쉽게 좌절에 빠지면서 ISFP가 되는 것 같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면서 자신감과 추진력이 부족하게 되는 걸 느낀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되어라 라고 하신 것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I / E, S / N, F / T, J / P를 자유롭게 구사하도록 훈련하라고 하신 것일까? 아니면 각자의 고유함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장점을 살리라고 하신 것일까?

 나의 사명에 대해서는 점점 밝혀지고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어릴적에 땅바닥에 막대기로 이름을 새겨놓고 흙으로 살짝 덮은 뒤에 조심스럽게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귀기울여 나의 사명을 찾아가는 과정이 기대되기도 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작년 봄에 성령의 은총을 받음을 느낄 때, 나의 사명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음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 가을부터 수도자로 부름받아 hard training을 받았고, 올봄  다시금 내가 할일이 은둔 속의 기도인가, 상담인가 분별이 서지 않을 때, 상담쪽으로 인도하심을 느꼈다. 사실, 아픈 사람들 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이 똑같이 컸었다.

 오늘은 성체조배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부모는 하느님을 대리하여 자식들을 사랑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훈련시켜야 할 사명을 덧붙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내 가족을, 이웃을, 나에게 안배되는 영혼들을 사랑해주고(말과 행위와 기도를 통해) 훈련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하느님의 대리자로 이 땅에 보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 나자신을 사랑하고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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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기도

                                                                            R.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하여서도

겁을 내지 말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속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고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자유를 위해 내가 싸워서 이길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너무나 내가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 때

하느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더 깊이 사랑하여라

                                                                              J.갈로

더 깊이 사랑하여라!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 깊이 사랑하여라!

어려움에 직면하여 더 이상 그를 위해

노력하고픈 마음이 없어질 때

분발하여 장애를 더 깊이 사랑하여라!

편한 것을 찾아

이웃을 위해 좀 더 힘써야 할 내 몫을 털어 버리고 싶을 때

이러한 마음을 초월하여 더 깊이 사랑하여라

이기심에서 자신의 껍질 속에 숨어버리고 싶을 때

그 껍질을 깨뜨려 버리고 네가 먼저

상대방에게 한걸음 다가가라

부정의 희생물이 되어 항의하고 싶을 때

더 큰 사랑으로 침묵하여라

타인의 허물을 들어 말하고 싶어질 때

마음속에 사랑을 일깨워 화제를 바꾸어라

타인을 위해 희생을 치르고픈 마음이 없어질 때

더 큰 사랑으로 관대한 길을 택하여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어렵고

이에 대하여 반발을 느낄 때

핑계나 의론을 빼버리고 더 큰 사랑을 가져라

모든 것이 본연의 고요를 되찾을 것이다

사랑의 법 실천하기를 거절하고파 질 때에는

언제나 마음을 활짝 열어 더 깊이 사랑하여라!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원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 ' 이다.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는다. ......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뒤로 물러난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이 대상을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와 비교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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