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견디기란 참 힘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화, 합리화, 주지화 등등의 방어기재들을 쓰게 되나보다. 이전의 나라면 아마 벌써 이런 기재들을 써서 숨어버렸을 것이다.

 엄마와 올케들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듣고 바라보고 중재하기. 마음아플 거란 생각은 못해봤는데 왠지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욕심으로 인한 어리석음에...

 명절때마다 당신 가족을 꽉 채워 놓고 한상 차려서 '화목을 위하여' 건배하면서, 그로인해 며느리들 가족은 빈자리가 생긴다는 사실은 무시하려는 엄마와, 항상 엄마 행동을 방관하시는 아버지. '집어삼키는 모성'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괴롭다. 이런 모습이 어디 엄마 뿐이랴. 나에게도, 이웃에게도, 우리들 중생들에게 다 있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 때문일 것을...  아이들 나무랄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요즈음 더 자주 든다. 어른들도 아이들과 똑같이, '나좀 봐 주세요.', '내 거야',  '나만', '나는 안그래.' 등등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이들은 power가 미약하니까 악영향이 크지 않지만, 어른들은 얼마나 위험한 power를 가지고 있나. 생각할수록, 사는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할일은 해야지... 이제는 문제가 조금씩 보이고, 간도 조금 부었으니 갈등을 중재하는 총대를 내가 메고 돌진해 봐야겠다. 다들 나더러 하라고들 한다. 며느리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큰올케의 상담자 역할을 맡아 하다보니, 그리고 엄마의 히스테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서 방관자처럼 굴었는데, 이제는 시누이로서 해결사 역할을 할 때가 됐나보다.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결과이다." -칼 구스타프 융

 내가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잊지 않으면 성령께서 더 쉽게 도와 줄 수 있으실 것이다.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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