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파란눈 석학들을 스님으로서 이곳 한국으로 오게 하시는 이분에 대해 궁금했다가 지나가는 글에서 읽게 되었다. 숭산이라는 그분을 그토록 존경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내가 그분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을 도올이 써 놓았다.
도올 김용옥이 본 숭산스님!
내가 숭산의 이름을 들은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들의 대강을 하고 있을 때
내 학생중에 한국불교전공을 지망하는 어느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 부터 였다.
내 기억으로 그 여학생의 이름은 베키라 했고, 그녀는 하버드 대학 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통틀어 전체 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불교사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싼쓰님' 운운하는
것이었다. 베키의 '쑹싼쓰님'에 대한 존경은 가히 절대적인 그 무었이었다.
그러면서 베키는 나보고 자기가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하번
'쑹싼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한국의 학인이 쑹싼스님을 안 뵙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베키가 아무리 나에게 쑹싼스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어도 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어느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오셔서 달마토크를
하시니깐 그때 꼭 한번 만나라는 것이었다.
'쑹싼쓰님'의 달마토크 때는 하버드 주변의 학.박사들이 수백명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내가 사실 불교계의 인맥을 파악한 것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때만 해도 누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 나는 '쑹싼쓰님'을 순 사기꾼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인즉슨 나에게 다음의 명료한 두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저 베키를 쳐다보건대,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저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적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지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달마토크의 사기성에 있었다.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엘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도대체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시 몇 마딜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무적인 도사 김용도 하버드에 와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 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정도는 언어 속에 내재할 뿐이다.
그런데 베키의 간청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 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의 작용 속에서 집적해 왔던 객기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이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몸과 몸으로 전달될 뿐이다.
몸과 몸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
동안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거구는 아니라 해도 결코 작은 덩치도 아니다.
당시 오순 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 들고 앉아서 가끔 톡톡치며 내뱉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어 술부가 마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쉬였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사실은 영어의 도사인 이 도올이 않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시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달마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인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What is love?"
큰 스님은 내처 그 여학생에게 다음가 같이 묻는 것이었다.
"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멍하니 앉아 이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이 이상의 언어가 있을 있는가?
아마 사랑 철학의 도사인 예수도 이 짧은 시간에 이 짧은 몇 마디 속에 이렇게
많은 말을 담기에는 재치가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숭산 큰스님의 비범함을 직감했다.
그의 달마 토크는 이미 언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국경도 초월하고 있었다.
오로지 인간, 그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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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애니어그램 5유형인 내가 듣기에는 '진리 찾기'와 '사랑'이 '지금여기'에서 일치되는 순간의 묘사다. '진리'를 갈구하며 케임브리지 젠센터 한구석에 자리잡은 학생들과, 가르침을 주고 사람을 만나러 먼 길을 건너오신 스님의 만남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나아가서 모든 수업, 강의, 상담, 만남, 수만가지 직업활동(집안일을 포함해서), 책읽기 등등이 다 사랑일 수 있겠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일이 꼬여서 짜증이 나는 순간마다 그 말을 떠올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