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        이현주 , 바오로딸

 

하느님이 지으신 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사람일수록 '말'의 구체적, 물리적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구태여 증명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인간의 지식에 오염이 덜 된 사람일수록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씨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문(呪文, spell)을 다른 말로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진언에는 힘이 있다. 하느님이 주신 본성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사람의 말이 모두 진언이었고 그래서 불꽃이 열을 내듯 그들의 말에 물리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원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러니까 이른바 문명 이전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인간의 말이 눈에 보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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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상대방에게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힘이 있다. 내가 아이에게 '일어서라.'고 할 때, 듣고 싶으면 일어서고, 듣기 싫으면 들은체 만체 하기도 한다. 딴데 정신 팔려 있으면 아예 듣지도 못하고.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듣고 싶은 만큼 들리고, 따르고 싶은만큼 따르게 될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말씀이 계셨다.'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현대과학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머릿속에 이런 그림이 떠오른다. : 우주는 혼돈 상태다. 모든것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의 기운이 우주를 감싸고 있다. 그 기운이 '말씀'인 것 같다. 우주는 그 사랑의 힘으로 자리잡아 간다. 먼지덩어리들이 뭉쳐지기 시작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우주 전체에서... 별들이 생겨나고, 큰 별을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별들이 공전하게 된다. 이런 모임이 수백개 모여 있는 은하가 몇천개 우주에 생겨난다. 그 가운데에도 지구별은 유난히 아름답다. 그러나, 인류가 발달하면서부터 파괴적인 방향으로 사건들이 진행된다. 신께서는 유대 민족을 선택하셔서 모세를 통해 죄에서 구원해 내시지만, 율법에 얽매어 사람을 옭죄는 일을 신의 이름으로 행사한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도들은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가족들과 부딪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날밤, 피땀 흘리실만도 하다. 얼마나 답답한 중생들인가!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도록 몸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남을 공격하는 수단, 교만의 도구, 야망의 디딤돌, 게으름의 피난처로 삼고 있으니. 나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와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질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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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달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상담공부하던 모임을 오늘 그만두다.

지난 주만 해도 이런 날이 있을 걸 예측하지 못하고 회원가입신청서까지 새로 작성해 냈건만...

이번주 월요일 영성수련 지도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두가지 공부를 계속 병행하면 이쪽도 저쪽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한번에 한가지밖에 제대로 못하는 나로서는 두가지 공부에 가정생활까지 제대로 해내기가 버거웠던가 보다.  이왕 한우물을 팔 거,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겠다고 판단했고, 회원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주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먹는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섭식행동장애?' 습관이 다시 튀어나왔다. 소장님을 두고 떠나는게 가장 마음 무겁다. 젊지만 상담가로서 크게 성장할 재목으로 보이는, 맑고 진지하고 열의를 가진 사람인데... 내가 있을 때보다 더 잘되도록 기도해야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성령을 보내셨듯이, 내가 떠난 자리에 더 나은 사람들이 와서 도움을 주든지, 은총을 개인적으로 받든지 했으면 좋겠다.

 기도는 이제 졸음이 물러가고, 자다말고 기도해도 정신은 명료하다. 기도중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저항'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나보다. 내 본성을 잃을까봐 두려운 무의식이 작용해서, 멀쩡하다가도 기도만 하려면 졸음이 쏟아지는 현상이 계속되었나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영성수련하시는 선배들이 '악이 기도 못하게 방해하는 거다.'라고 하셨는데, 어쩌면 무의식 속에 악도 존재하고, 하느님도 존재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외부에서 작용하시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의식, 무의식 속에 있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몰아낼수록 하느님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사람의 기질에 따라 하느님이 달리 드러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용기, 어떤 사람은 온유, 또는 겸손 등등으로... 예수님은 성령의 칠은을 모두 갖추신 분으로, 종교적 인습을 따라 '바리사이'처럼, 또는 죄인으로 살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가르치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이셨던 걸텐데...  

불교에서는 마음을 닦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마음을 닦으면 하느님의 빛이 통과하는 유리창처럼 기능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능력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실제로 기를 손에서 내보내서 사람들이 쓰러지기도 하고, 투시력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의 능력은 놀라울 뿐이다. 하느님의 능력을 모아서 전해주는 역할이라고 해도...

앞으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작용하시는지 탐색해 보려 한다. 다른 책들은 가끔씩 알라딘에서 리뷰 읽으며 맛보는 정도로 만족하고 성서와 영성수련 관련 책들만 보아야겠다. 상담공부까지 접고 하는 마당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 가정에서의 내 역할도 더 열심히... 머리만 쓰면 주화입마(?)에 빠질수도...

이렇게 글로 마음을 정리하니 조금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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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님의 서재에서 퍼온 글

불가에서 여섯 단계의 수행을 이야기할 때, 첫째, 수식(호흡에 집중하는 수행), 둘째, 상수(호흡에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계), 셋째, (정, 또는 적, 사마타,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한 곳에 응집되어 고요히 안정되는 경계), 넷째, (혜 또는 조, 위빠사나, 일체 대상세계에서 실상을 보는 깨어있는 마음), 다섯째, 환(지와 관의 수행을 닦아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일체 대상 세계의 일반적 특성을 체득하는 경계), 여섯째, 정( 내면의 영적 승화인 깨달음과 초세간적인 청정한 초월의 완성)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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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中,                오강남, 현암사

 

진리란

진리 자체가 무엇이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6세기 노자님이 썼다는 도덕경 첫 줄에 나오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라는 말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진리라고 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적 논리에 기초한 현대 서양식 사고방식에 의하면, 진리란, 근본적으로 어떤 '주장이나 진술'이 거짓이냐 참이냐 하는 문제에 관련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이외의 다른 문화권에 속한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진리를 그렇게 '말'과 관계되는 무엇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자체, 실재(實在, reality) 자체가 진리라는 생각을 했다. 실재 자체는 항상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그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견해나 이론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때그때 변한다. 중요한 것은 실재 자체를 스스로 꿰뚫어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지, 실재에 대해 주어진 어느 특정한 개념이나 교설같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길

감각으로 감지되는 현상 세계,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견, 그리고 의식 속에 박힌 '나'라는 의식 등이 결국 이 세상의 궁극적인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런 상대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향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결 조건이다.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마음의 눈이 뜨여 사물의 실재를 실제 그대로,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을 '밝아짐(enlightenment), '깨침(awakening)', '깨달음(realization)' 등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특히 이것을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하셨다. 복음의 주제가 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 중 '회개(悔改)'란 한자가 뜻하듯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메타노이아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생각하고 보는 방법 자체가 바뀌는 것 혹은 새로운 의식,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근원 되시는 분으로 완전히 돌아섬,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실재에 접함으로써 가치 체계,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초청은 바로 이런 종교적 체험을 갖도록 하는 메타노이아에의 초청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 중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란, 마음속에 있는 부정한 온갖 찌꺼기를 씻어내는 대청소 작업, 헛것, 궁극적으로 진짜가 아닌 것을 위해 안간힘 쓰고, 아등바등하고, 안달복달하고, 애태우고, 집착하는 모든 우상숭배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 헛된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중심으로 하나 되는 일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마음, 헛된 나, 내 욕심, 이기심이 아니라 오로지 궁극적인 것만 앙모하는 마음, 그 앞에 먹구름, 비바람, 화나게 하는 일, 슬프게 하는 일 등 온갖 것이 지나가도 거울처럼 고요히 비추기만 할 뿐 그 때문에 그 자체가 조금도 구겨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 맑은 마음, 하늘 같은 마음, 큰마음, 거룩한 마음, 저 너머를 뚫어보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어둠의 그늘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부드러운 마음, 깨끗한 마음, 새로워진 마음을 갖는 것이 '새로 남' 혹은 '어린아이와 같이 됨'이다. 심리학 용어로는 새로운 의식, 우주의식, 변화된 의식 상태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제 16장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가나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를 이르러 제 명(命)을 찾아감이라 합니다.

제 명을 찾아감이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밝아짐(明)입니다.

 

아! 인생의 '철'이 든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입장,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을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형안이 있다면, 인생의 더 깊은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면, 사물을 더 넓은 시야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식별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실재를 옳게 깨닫게 된다면, 지금 문제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실 문젯거리가 못되는 것임을 알게 될까? 이런 것 때문에 공연히 괴로워하고 기뻐 날뛰고 하던 일들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될까?

체념(諦念)의 諦는 진리나 실재라는 뜻이다. 진리나 실재를 통찰하는 마음(念), 그래서 시시하고 허망한 것에 달라붙어 울고불고 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 이것이 본래 의미의 체념이다. 그렇다해서 세상의 모든 일을 경멸하고 거들떠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현실을 더 높은 관점에서 봄으로써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그 범위 내에서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즐길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상대적인 것을 세상 전부로 알고 거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며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제 윤리의 행위는, 해야만 한다고 하는 '당위'나 '의무'로서의 영역을 지나 '윤리적 행위가 곧 좋은 일임'을 자각하고 저절로 선한 열매를 맺는 '저절로 됨(spontaneity)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보상이나 형벌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자각이랄까, 뼈대랄까 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위다.

진정으로 '철이 들어서' 하는 행위는 깊은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참된 의미의 선행이다. 자유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노라.'에서 나오는 참된 '함' 이다. 하는지 안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하게 되는, '안하는 것 같은 함'이다. '함이 없지만 안 됨이 하나도 없다(無爲而無不作)의 경지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행위의 영적, 종교적 차원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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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요법 강의 듣는 중에 건진 것이 있다면, 숙련상태에 대한 통찰의 이야기였다.

1단계- 무의식적 미숙련 상태

2단계- 의식적 미숙련 상태

3단계- 의식적 숙련 상태

4단계- 무의식적 숙련 상태

성인들, 고승들의 경우 4단계에 도달하심이리라.

나는 요즈음 내 본성의 밑바닥을 체험했다. 이기적이고 메마르고 냉담하며 무기력하고 때로 교만해지는... 이제 바닥을 치고 올라갈 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진심으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한때는 내 본성을 잃는 것이 아쉬워서 저항했었다. 이런 유혹을 악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다는 그 유혹이 마음속의 자아, 무의식에서 속삭이는 '니가 뭘해.편하게 즐기며 살어.(돌로 빵을 만들라.), 세상것을 추구하며 살어.(세상 모든 권세와 왕국을 주겠다.), 하느님이 어딨어.(뛰어내려 보라)'라고 하는 유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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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요? (부제-모세의 소명과 열등감)]

                                                                                           이성우, 성서와 함께

...하느님의 소명은 근본적으로는 부름받는 사람의 영혼의 울림 내지 갈망 혹은 열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하느님의 소명은 완성된 형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가다듬고 연마하여 완성해 가야 하는 재료, 혹은 키우고 돌보아 열매를 맺어야 할 씨앗처럼 주어진다. 청년기에 드러나는 소명의 모습은 청년 모세의 경우처럼 거칠고 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설픈 형태의 '열정', '꿈', '소망', '에너지'로 나타난다.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분노 속에서 한 사람의 위대한 소명이 싹트고 있을 수 있다. 청년 모세의 가슴 속에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불이 지금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이집트 사람을 해치는 쪽으로 작용하지만, 나중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설익은 , 심지어 파괴적이고 위험한 청소년들의 행동을 볼 때면, 그 속에 숨어있는 동기와 그의 소명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이 진정으로 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주셨다. 우리가 어떤 꿈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도 된다. 우리 자신을 더 훌륭하고, 더 아름다운,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모세야, 네가 말재간이 없다고 주저하고 자신없어 하는데, 너를 만든 하느님은 너보다 더 훌륭하고 완벽한 모세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말을 아주 잘 하는 달변가 모세를 원하지 않는다. 너 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너를 원한단다. 자, 이제 떠나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을 것이고,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알려 주겠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알려 주시는가? 하느님께서 무슨 말을 할지 알려주시는 방법은 순간순간 우리가 느끼는 진실한 가슴을 통해서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우리 인간의 가슴과 영혼을 진동시키는 길 뿐이다.하느님은 우리의 진실한 내적 느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있으면서 영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감행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봐주신다는 느낌이 있을 때다. 우리의 소망, 열망, 두려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시다는 느낌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열망의 정당성과 명분을 제시하거나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 자기 소명을 실현할 '자격'과 '권한'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권리와 자격은 하느님으로부터 받는가 아니면 인간으로부터 받는가?

이 책에서 인용한 책;

[안젤름 그륀, '참 소중한 나', 전헌호 역, 성바오로]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 심리적 차원과 영성적 차원을 연결시켜야 한다. 심리적 차원이 도외시된 영성적 차원은 곤란하다. 오히려 나는 심리적 차원을 통해서 하느님을 발견해 나간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심리적 실상을 지나쳐 갈 수 없다. 우리의 심리적 실상을 모른 체한다면... 현실에 대한 종교적 도약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심리적 실상을 간과하고도 나아갈 수 있는 영적 우회의 길은 없다.

[안젤름 그륀,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정하돈 역, 분도출판사]

수도자 내지 구도자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광야에 대해서 -광야는 악령의 집합소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차없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대결함으로써 진리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곳이다. 동시에 광야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하느님께서 그들과 가장 가까이 계신 곳으로서 이미 체험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복된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광야를 통해 인도하셨다.... 구도자가 광야에서 겪는 시련과 유혹은 심리학적으로 무의식 속에 살아있는 심리적인 에너지들과 씨름하는 것이다. : "시련과 유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다... 수도승들은 우리를 대적하는 악령들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힘들, 우리가 의식적으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려는 그런 힘들을 뜻한다. 우리는 분명하지 못한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으로 인해 마음이 갈가리 찟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그림자로서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억압된 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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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가 겪은 것처럼, 자기부족감 때문에 구도자의 삶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 많이 치유되어 좀 살만해지니까,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유혹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머리 복잡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래야 궁극적으로 마음 편해지는'  사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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