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中,                오강남, 현암사

 

진리란

진리 자체가 무엇이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6세기 노자님이 썼다는 도덕경 첫 줄에 나오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라는 말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보통 진리라고 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적 논리에 기초한 현대 서양식 사고방식에 의하면, 진리란, 근본적으로 어떤 '주장이나 진술'이 거짓이냐 참이냐 하는 문제에 관련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이외의 다른 문화권에 속한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진리를 그렇게 '말'과 관계되는 무엇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자체, 실재(實在, reality) 자체가 진리라는 생각을 했다. 실재 자체는 항상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그 실재에 대한 인간의 견해나 이론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때그때 변한다. 중요한 것은 실재 자체를 스스로 꿰뚫어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지, 실재에 대해 주어진 어느 특정한 개념이나 교설같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길

감각으로 감지되는 현상 세계,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견, 그리고 의식 속에 박힌 '나'라는 의식 등이 결국 이 세상의 궁극적인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런 상대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향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결 조건이다.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마음의 눈이 뜨여 사물의 실재를 실제 그대로,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을 '밝아짐(enlightenment), '깨침(awakening)', '깨달음(realization)' 등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특히 이것을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하셨다. 복음의 주제가 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 중 '회개(悔改)'란 한자가 뜻하듯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메타노이아라는 그리스어 원문은 생각하고 보는 방법 자체가 바뀌는 것 혹은 새로운 의식,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근원 되시는 분으로 완전히 돌아섬,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실재에 접함으로써 가치 체계,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초청은 바로 이런 종교적 체험을 갖도록 하는 메타노이아에의 초청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 중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란, 마음속에 있는 부정한 온갖 찌꺼기를 씻어내는 대청소 작업, 헛것, 궁극적으로 진짜가 아닌 것을 위해 안간힘 쓰고, 아등바등하고, 안달복달하고, 애태우고, 집착하는 모든 우상숭배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 헛된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중심으로 하나 되는 일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마음, 헛된 나, 내 욕심, 이기심이 아니라 오로지 궁극적인 것만 앙모하는 마음, 그 앞에 먹구름, 비바람, 화나게 하는 일, 슬프게 하는 일 등 온갖 것이 지나가도 거울처럼 고요히 비추기만 할 뿐 그 때문에 그 자체가 조금도 구겨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 맑은 마음, 하늘 같은 마음, 큰마음, 거룩한 마음, 저 너머를 뚫어보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어둠의 그늘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부드러운 마음, 깨끗한 마음, 새로워진 마음을 갖는 것이 '새로 남' 혹은 '어린아이와 같이 됨'이다. 심리학 용어로는 새로운 의식, 우주의식, 변화된 의식 상태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 7장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제 16장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가나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를 이르러 제 명(命)을 찾아감이라 합니다.

제 명을 찾아감이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밝아짐(明)입니다.

 

아! 인생의 '철'이 든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입장,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을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형안이 있다면, 인생의 더 깊은 의미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면, 사물을 더 넓은 시야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식별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실재를 옳게 깨닫게 된다면, 지금 문제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실 문젯거리가 못되는 것임을 알게 될까? 이런 것 때문에 공연히 괴로워하고 기뻐 날뛰고 하던 일들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될까?

체념(諦念)의 諦는 진리나 실재라는 뜻이다. 진리나 실재를 통찰하는 마음(念), 그래서 시시하고 허망한 것에 달라붙어 울고불고 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 이것이 본래 의미의 체념이다. 그렇다해서 세상의 모든 일을 경멸하고 거들떠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현실을 더 높은 관점에서 봄으로써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그 범위 내에서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즐길 힘이 생기는 것을 뜻한다. 상대적인 것을 세상 전부로 알고 거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며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제 윤리의 행위는, 해야만 한다고 하는 '당위'나 '의무'로서의 영역을 지나 '윤리적 행위가 곧 좋은 일임'을 자각하고 저절로 선한 열매를 맺는 '저절로 됨(spontaneity)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보상이나 형벌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자각이랄까, 뼈대랄까 하는 것에 의해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위다.

진정으로 '철이 들어서' 하는 행위는 깊은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참된 의미의 선행이다. 자유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노라.'에서 나오는 참된 '함' 이다. 하는지 안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하게 되는, '안하는 것 같은 함'이다. '함이 없지만 안 됨이 하나도 없다(無爲而無不作)의 경지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행위의 영적, 종교적 차원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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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요법 강의 듣는 중에 건진 것이 있다면, 숙련상태에 대한 통찰의 이야기였다.

1단계- 무의식적 미숙련 상태

2단계- 의식적 미숙련 상태

3단계- 의식적 숙련 상태

4단계- 무의식적 숙련 상태

성인들, 고승들의 경우 4단계에 도달하심이리라.

나는 요즈음 내 본성의 밑바닥을 체험했다. 이기적이고 메마르고 냉담하며 무기력하고 때로 교만해지는... 이제 바닥을 치고 올라갈 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진심으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니까... 한때는 내 본성을 잃는 것이 아쉬워서 저항했었다. 이런 유혹을 악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다는 그 유혹이 마음속의 자아, 무의식에서 속삭이는 '니가 뭘해.편하게 즐기며 살어.(돌로 빵을 만들라.), 세상것을 추구하며 살어.(세상 모든 권세와 왕국을 주겠다.), 하느님이 어딨어.(뛰어내려 보라)'라고 하는 유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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