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굉장히 의존적이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도움받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순된 감정을 갖고 있다. 첫째 이유는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서이고, 두번째 이유는 어른이면서 의존적인 것 그 자체가 싫어서이고 세번째는 내가 의존하고 싶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어제는 서울 사는 동생네 집들이를 갔다가 아이들 데리고 남편이랑 롯데월드에 다저녁때 갔다가 밤 11시에 집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남편 회사는 서울에 있으니까, 내가 남편 차를 몰고 집에 내려오면 남편이 일주일간 불편하긴 하겠지만, 남편이 청주까지 내려왔다가 월요일 아침에 다시 서울로 가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내가 운전해서 가보겠다고 제안했다. 남편은 걱정스러워 했지만, 내가 운전경력 12년까지 들먹이며 자신있는 말투로 해보겠다고 하니까 네비게이션으로 우리 동네를 맞춰 주고는 고속도로 진입로까지의 경로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설명해준 길과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길이 달랐다는 데에 있었다. 거의 한시간이나 헤매며 진입로를 찾다가, 나중에는 으슥한 외곽동네 골목까지 나오는데... 어둡기는 하고, 방향감각은 원래 없고, 큰애는 걱정해주며 격려를 해주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안되고... 내 소심한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주님!'하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바로 다음 순간 아버지께서 전화하셔서 눈이 많이 오고 있으니 서울에서 그냥 자라고 권하셨다. 걱정하실까봐 사정이야기는 못하고 그러겠다고 하고선 남편한테 전화하기 위해 차를 길가에 세우자마자, 남편이 전화를 해왔다(!) 결국, 남편이 택시로 우리 차 있는 데까지 찾아와서 집으로 출발했다. 춥고도 길고도 어두웠다가 내 마음속의 어두움이 하나 스러져 조금 밝아진 은총 가득한 시련이었다. (어쩌면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일을 은총으로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은총인지도...)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돈벌어다 주는 것과 관리자라는 신념을 가진 듯이 보이는 남편에게 절망을 느끼며 우울하던 내 마음을 다독여 줄 수 있었다. 가끔씩 '남편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든지, '나같은 사람이 왜 결혼은 해가지고 이런 고민을 하며 산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우울해지곤 했는데, 며칠전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신부님 말씀에 마음을 추스리며, '하느님께서 남편을 통해 나와 아이들에게 의식주를 전해주신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자.'라고 마음먹었지만, 남편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은 사라지고 원망하는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 이런 내 마음을 남편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는 것도 나의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데, 어제 한시간 헤매다가 집으로 내려오는 동안 남편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남편도 마찬가지라는 것, 누가 먼저 도움을 주어야 할까 라고 한다면 하느님께 더 많은 걸 받은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것. 하느님을 대리해서 서로의 장점을 가지고 서로 돕도록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인연지어 주신다는 것. 그중에서 가족은 특별한 인연이라는 것. 그리고, 서로의 발전을 격려해 주는 마음맞는 친구들도...

남편과 나. 아버지가 선생님이라서 모범생이라는 공통점에 끌린 것 같은데, 알고보니 둘 다 고장난 펌프처럼, 사랑을 퍼 올리기 힘든 사람들이지만(사실, 모범생만 좋아하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그 조건화에 길들여져 사랑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런 점에서 그런 부모들은 바리사이파와 다를 게 없다. 나도 그랬고...) , 그래도 나는 이제 하느님께서 주시는 물을 퍼담아 펌프에 넣으며 삐걱거리는 펌프를 부여잡고 물을 길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금씩 나아질 거다.

가슴을 더 넓게. 상대방을 헤아려 주기. 하느님을 대리하여 상대방이 주는 사랑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그것만 제대로 되어도 사랑의 큰 흐름에 나를 맞길 수 있게 되어서 좀더 쉬워질 것이다. 마치 비상하는 새가 처음에는 날개짓을 열심히 해야 하지만,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서 상승기류를 타면 날개짓 하지 않고도 날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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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에서 퍼온 글...

 

꿈 분석(Jung을 중심으로)


1. 꿈이란 :
  융에게 있어 꿈이란 하나의 스승과 같았다. 꿈은 현실에 대한 가장 깊은 정서적 반응을 나타낸다. 꿈은 꾸는게 아니라, 꾸어지는 것으로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꿈의 기능은 보상과 조절기능이 있다. 즉, 꿈이란 의식이 무시했거나 소홀했던 삶의 불균형이 있을 때,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 주고, 개선가능한 자료를 제공하여 그에게 현 상황을 교정시키도록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보충하면 전체적인 통합, 즉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다시말해, 개인이 타고난 인생의 삶 속에 본래부터 숨겨져 있는 잠재력을 창조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 Freud : 꿈이란 유아기적 사고 방식으로 퇴행한 결과이며, 이 안에서 충동들이 환각적인 만족을 통하여 배출이다. 무의식의 표현인 꿈은 순전히 일차적인 과정(정서)이며, 이차적인 사고(인지)를 보이면, 항상 방어적인 기능을 하는 각성이 첨가된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이건 꿈이야”같은 것은 불안감소를 위한 방어이다. 꿈은 잠재몽과 발현몽으로 나누어져 우리가 보는 꿈 뒤에 숨겨진 무의식적 욕구, 충동등을 알아낼 수 있다.

2. 꿈 분석에서 중요요소
① 그림자 : 그림자는 자아의식의 반대편에 있는 정신요소로서 자아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아의 반대편에 생기게 된다. 그림자는 꿈 분석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무의식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으로 의식으로 가져오지 못한 자신의 일부이다. 그것은 유아기, 아동초기의 원시적인 측면이다. 당위성이 강할 수록, 자아의식이 강할 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하지만, 그림자가 본래부터 악하고 열등한 것은 아니다. 다만 무의식에 버려져 분화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식화되는 순간, 그 내용은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림자는 투사에 의해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투사를 인식하고 수용하면 그림자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환된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하나씩 깨달아갈 때, 그리고 용기를 내어  체험할 때,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넓어지고, 통찰은 깊어진다.  
② 페르조나 : 페르조나란 가면이란 뜻으로 바깥세상과 접촉하는 인격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또다른 측면이다. 페르조나는 진정한 자기(self)가 아닌 주위의 일반적 기대에 맞추어 사는 태도이며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편의상 생긴 콤플렉스이다. 그러므로 페르조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인 동일시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역할, 의무, 도덕규범, 예의범절 등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맹신하지 않아야 한다.
③ 아니마, 아니무스
아니마는 남성의 여성적인 측면이며, 아미무스는 여성의 남성적인 측면이다. 페르조나가 외부상황과 관련을 갖는다면, 아니마, 아니무스는 개인의 내면 세계와 관련이 있는 정신요소이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꿈에서 다른 성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남성이 꿈에서 미친 여인을 보았다면, 그것은 지금 그의 영혼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④ 자기
  인간에게는 전체로서 살 것을 요구하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다. 이것을 자기실현이라 부른다. 이 자기는 자아와 구별된다. 자아는 의식세계이지만, 자기는 통합된 정신, 즉 내안의 신을 말한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대극적인 존재이다.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나무스, 등 반대의 요소들로 구성된다. 인간의 정신구조 내에 있는, 이렇게 많은 대극의 쌍 가운데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정신적 균형은 깨어지고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간의 전인성은 의식을 통해서 인식되어져야하고, 의식적인 삶을 통해 표현되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다양한 개인의 요소들이 수용되고 표현되어질 때 비로소 자기가 태어난다.
인간은 의도적인 노력을 포기했을 때, self가 활동하게 된다(無爲). 자기실현이 되면 될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수를 안다. 그래서 그가 가야할 길을 안다.
  자기는 꿈에서 만다라로 나타난다.

3. 꿈 분석과정

① 꿈 기록 : 꿈을 꾸면 깨어나 기록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깨어나면 생각나는 것을 모두 기록한다. 그리고 비고란에 자유스럽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적는다.

 내용-꿈의 모든 내용을 기록

비고-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제목-중요한 감정이나, 장면

주제-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핵심

감정-꿈속에서 경험한 감정 나열

질문-이 꿈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② 꿈 체험 : 명상상태에서 그 꿈의 장면으로 들어가 생생하게 체험한다.

* 많이 나오는 정서적 주제 : 독립성, 의존성, 적개심 및 공격성, 무력감, 권위자에 대한 반응, 양가감정, 배척감, 우울 및 고독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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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님의 서재에서... 

감사의 마음을 키우세요.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짬을 내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세요.

단순하게 만드세요. 정리 정돈을 잘 하세요.

무리한 시간 계획을 잡지 마세요.

최종 기한을 현실적으로 잡고 거기에 최선을 다 하세요.

매사에 30분 정도 여유를 두세요.

일주일에 한 번은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드세요.

언제나 흥미있는 읽을 거리를 갖고 다니세요.

호흡은 깊게 자주 하세요.

걷고, 춤추고, 달리고 즐길 만한 스포츠 하나쯤은 개발해 두세요.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는 일과를 비워 두세요.

좀더 자주 깔깔거리며 웃으세요.

자연의 품에 자신을 맡기세요. 이제 그만 두세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자신을 기쁘게 만드세요.

부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시간, 창조적인 힘, 감성 등 소중한 자원들을 낭비하지 마세요.

우정을 키우세요.

문제에 접근하는 걸 도전으로 생각하세요.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게 사세요.


 ..............................

위로가 되는 글. 밝은 글을 대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부정적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는 조금 어렵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내 시각이 삐딱한가?)  때로 마음이 밝아지는 글을 읽고, 때로 좋은 책을 읽으며 긍적적인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마음으로 묵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오늘 고해성사를 보았는데, 한달간 사람들을 부담스러워 하고 판단하고 원망했던 잘못을 고백했다. 털어버리고 나니 시원하다. 사람들의 의도에 대한 의혹, 내가 원하는 걸 주지 않는데 대한 원망,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판단들... 지혜를 구한답시고 자꾸 머리만 커져가고 마음은 작아져 간다. 정말 지혜로운 삶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밥이 되는 삶일 거다. 하지만, 나같이 에너지를 조금밖에 못 가진 사람은 큰 실천은 꿈꿀 수 없고, 더욱 겸손해지는 것 외에 다른 덕을 닦을 수 없을 것 같다.

젊은 신부님 말씀 ; " 죄가 있는 곳에 은총도 함께 있다고 하지요. 어려움이 있을 때 조금 시각을 달리 하면 그 일이 바로 은총의 원천이 되지요. 혼자서 기도 할 때 은총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을 통해서 은총이 전해집니다."

맞는 말씀이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왜?'라는 질문을 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그리고 조금 시각을 달리 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자. 이냐시오 영성의 핵심이라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자.' 그리고 감사하고, 덕에 이르지 못하는 나를 또 그냥 바라보며 겸손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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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정규한, 성서와 함께

-많은 돈과 명예를 바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아침 해 뜰 무렵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 있으면 지나가는 헐렁한 수도승이 있을 터이니 그에게 무조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주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당신은 그 보물을 얻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산신령의 말대로 그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자니 정말로 웬 허름해 보이는 수도승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신령이 시킨대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 했더니, "이것 말이오? 가지시오. 나도 어디서 얻은 것이니까요." 하면서 주먹만한 큰 다이아몬드를 바랑에서 꺼내 선뜻 내주었습니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한 기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걷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가던 길을 되돌아 그 수도승의 뒤를 따라가서 수도승이 쉬고 있는 여관을 찾아내어 수도승에게 보물을 돌려주며, "이 다이아몬드를 도로 받으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 말고, 이렇게 귀한 보물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는 당신의 그 '부요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의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보다 못한 만큼만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즉, 내가 사랑해 주려는 상대방이 나보다 더 좋게 더 잘 될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단계의 사랑입니다.

두번째 단계의 사랑은 이것을 극복하는 것, 즉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사랑을 말합니다.

세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밥이 되고, 밑거름이 되어 주는 마음의 사랑입니다.

 세번째 단계의 사랑을 어떤 스님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처녀가 잉태를 했습니다. 사내가 누구냐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의 매를 피하기 위해 처녀는, 마을 위에 있는 절의 고명한 주지 스님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곧장 아기를 싸안고 주지승을 찾아갔습니다.

"자, 스님의 아기요."

아버지가 아기를 내던지며 비웃었는데도 주지스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받아 안았습니다. 그저 "그런가?"라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주지승은 누더기 승복에다가 아기를 감싸 안고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동네로 내려가서 아기에게 젖을 얻어 먹였습니다. 절에서 함께 살던 다른 스님들은 주지승에게 저마다 욕을 퍼붓고는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스님의 그런 모습을 본 아기의 어머니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을 떨쳐 버린 슬픔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 나머지 진짜 아비가 소금장수라고 실토했고, 처녀의 아버지는 그 길로 절에 달려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아기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랬군!" 한마디만을 던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기를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외부에서, 또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머리속의 생각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물 속에 무언가를 빠뜨렸다면 물살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흔들림이 없을 때 그것을 집어 올립니다. 그러나 물을 헤치고 휘저으면 물결은 더욱 흔들리게 되어 물 속에 있는 것을 볼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가슴과 머리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머리가 커질 때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머리가 작아질수록 내면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로 하느님을 찾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머리가 앞서면 가슴은 그 뒤를 따르고 가슴이 먼저 움직일 때 머리는 그 가슴의 움직임대로 따를 것입니다. 가슴이 커지면 우리는 빈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바로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어,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 세가지 종류의 생각함이 있다고 하면, 그 하나는 나의 자유의사에서 오는 나 자신의 생각이고, 나머지 두가지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중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악신으로부터 오는 것 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의 행동의 뿌리를 보지 않고 겉만 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충전'과 '방전'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뿌리를 찾고 뿌리에서 실천을 시작하려고 할 때 변화되기 시작됩니다. 이러한 식별과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경험에서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이웃과 하느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듯이, 느낌대로 하지 않고 느낌의 원천을 식별(양심성찰)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은총이 유혹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유혹의 시기에도 항상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생각이나 행동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즉, 시작할 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고, 끝에 가서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

책을 내 마음대로 편집해버렸다.

중요한 건, 내가 나 자신과 하느님과 악신에게 얼마나 할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 같다. 외부에서 아무리 자극을 해도 내가 꿈쩍도 안하면 누구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현재 나는 하느님보다 나 자신과 악신(하느님 아닌 것이겠지)에게 훨씬 더 많은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 시간과 관심과 노력면에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는 '시간', '노력' '관심' 이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어서 조용했는데, 중간쯤에 둘째가 오고, 내 무릎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더니(내가 많이 나아졌다는 증거이다. 전에는 글 쓸 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다.) 이제는 거실로 가버렸고, 좀 있다가 큰아이가 와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독촉하고 있다. 시작은 읽은 것을 정리하면서 고요했는데, 중간에는 마음이 어지럽고, 끝에는 쫓기는 마음이다. 그래도 계속하고 있는 건...?

큰애에게 양보했다가, 다시 쓴다.

어제는 울산지법에 있는 친구가 청주지법으로 이동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건만,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건 그 소식을 전해준 다른 한 친구의 태도에 내 안의 무언가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전화한 그 친구가 기쁨에 찬 소리로 대뜸 "니네집 방 하나 비워. 경선이가 청주로 온대. 집이 옥천이니까 출퇴근을 한다지만, 일이 늦게 끝나면 하룻밤 잘 방이 필요하대. 우리 집(결혼 안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보다는 너네 집이 좀 더 낫지 않겠니?"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화도 나고... "그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 우리 남편 알잖아. 사람들 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거(사실 나도 마찬가지고. 낮이라면 몰라도 밤에는 더구나...) " 그런데, 이런 나의 반응을 그 친구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나보다. (하긴, 옛날의 나라면 아마 당황해 하며, 진땀을 흘렸을 거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아주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며 '주중에는 남편이 없지 않으냐' - '있을 때도 있다', '너희 남편 있을 때는 안 갈거다.' -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하며 서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다가 내가 경선이에게 전화해서 유감스럽지만 안되겠다고 이야기하기로 하고 끊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정작 본인은 그 친구만큼은 섭섭해 하지 않았다.

전화 끊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남편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무의식 중에 이런 어려운 문제(사랑의 실천을 강요당하는)의 도피처로서 의견이 분명한 사람을 택했던 거라는... 어제의 나는 사랑을 줄 바늘끝만큼도 여유가 없었다는... 내 가족, 올케, 조카들, 친정 부모님, 시어머니만 해도 나에게는 무거운 상태라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너무도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철이 들어서 이런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친구의 그러한 말투에 자극받지 않고 평화롭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나아가서 청주로 오는 그 친구를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우리 방 하나 빌려줄 수 있게 될 거라고(희망사항이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혼자 있는 것이 워낙 좋으니까)... 날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밥이 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 지금은 우리 가족에게 밥이 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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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 말씀하기를
<병고를 양약으로 삼으라> 하셨느리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
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 데에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지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들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아루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 때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짝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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