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정규한, 성서와 함께

-많은 돈과 명예를 바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아침 해 뜰 무렵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에 있으면 지나가는 헐렁한 수도승이 있을 터이니 그에게 무조건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주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당신은 그 보물을 얻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산신령의 말대로 그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자니 정말로 웬 허름해 보이는 수도승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신령이 시킨대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 했더니, "이것 말이오? 가지시오. 나도 어디서 얻은 것이니까요." 하면서 주먹만한 큰 다이아몬드를 바랑에서 꺼내 선뜻 내주었습니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행복한 기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걷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가던 길을 되돌아 그 수도승의 뒤를 따라가서 수도승이 쉬고 있는 여관을 찾아내어 수도승에게 보물을 돌려주며, "이 다이아몬드를 도로 받으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 말고, 이렇게 귀한 보물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는 당신의 그 '부요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의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보다 못한 만큼만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즉, 내가 사랑해 주려는 상대방이 나보다 더 좋게 더 잘 될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단계의 사랑입니다.

두번째 단계의 사랑은 이것을 극복하는 것, 즉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사랑을 말합니다.

세번째 단계의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밥이 되고, 밑거름이 되어 주는 마음의 사랑입니다.

 세번째 단계의 사랑을 어떤 스님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처녀가 잉태를 했습니다. 사내가 누구냐고 윽박지르는 아버지의 매를 피하기 위해 처녀는, 마을 위에 있는 절의 고명한 주지 스님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곧장 아기를 싸안고 주지승을 찾아갔습니다.

"자, 스님의 아기요."

아버지가 아기를 내던지며 비웃었는데도 주지스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받아 안았습니다. 그저 "그런가?"라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주지승은 누더기 승복에다가 아기를 감싸 안고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동네로 내려가서 아기에게 젖을 얻어 먹였습니다. 절에서 함께 살던 다른 스님들은 주지승에게 저마다 욕을 퍼붓고는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스님의 그런 모습을 본 아기의 어머니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을 떨쳐 버린 슬픔과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 나머지 진짜 아비가 소금장수라고 실토했고, 처녀의 아버지는 그 길로 절에 달려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은 아기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랬군!" 한마디만을 던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기를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외부에서, 또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머리속의 생각에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물 속에 무언가를 빠뜨렸다면 물살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흔들림이 없을 때 그것을 집어 올립니다. 그러나 물을 헤치고 휘저으면 물결은 더욱 흔들리게 되어 물 속에 있는 것을 볼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물결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곧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가슴과 머리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머리가 커질 때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머리가 작아질수록 내면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자신이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머리로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로 하느님을 찾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머리가 앞서면 가슴은 그 뒤를 따르고 가슴이 먼저 움직일 때 머리는 그 가슴의 움직임대로 따를 것입니다. 가슴이 커지면 우리는 빈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바로 내면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어, 세례자 요한처럼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에게 세가지 종류의 생각함이 있다고 하면, 그 하나는 나의 자유의사에서 오는 나 자신의 생각이고, 나머지 두가지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중 하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악신으로부터 오는 것 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자 할 때, 우리의 행동의 뿌리를 보지 않고 겉만 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충전'과 '방전'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뿌리를 찾고 뿌리에서 실천을 시작하려고 할 때 변화되기 시작됩니다. 이러한 식별과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경험에서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이웃과 하느님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듯이, 느낌대로 하지 않고 느낌의 원천을 식별(양심성찰)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은총이 유혹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유혹의 시기에도 항상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생각이나 행동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즉, 시작할 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고, 끝에 가서는 서로 다투는 일이 없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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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 마음대로 편집해버렸다.

중요한 건, 내가 나 자신과 하느님과 악신에게 얼마나 할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 같다. 외부에서 아무리 자극을 해도 내가 꿈쩍도 안하면 누구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현재 나는 하느님보다 나 자신과 악신(하느님 아닌 것이겠지)에게 훨씬 더 많은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 시간과 관심과 노력면에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다이아몬드는 '시간', '노력' '관심' 이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어서 조용했는데, 중간쯤에 둘째가 오고, 내 무릎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더니(내가 많이 나아졌다는 증거이다. 전에는 글 쓸 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다.) 이제는 거실로 가버렸고, 좀 있다가 큰아이가 와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독촉하고 있다. 시작은 읽은 것을 정리하면서 고요했는데, 중간에는 마음이 어지럽고, 끝에는 쫓기는 마음이다. 그래도 계속하고 있는 건...?

큰애에게 양보했다가, 다시 쓴다.

어제는 울산지법에 있는 친구가 청주지법으로 이동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건만,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건 그 소식을 전해준 다른 한 친구의 태도에 내 안의 무언가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전화한 그 친구가 기쁨에 찬 소리로 대뜸 "니네집 방 하나 비워. 경선이가 청주로 온대. 집이 옥천이니까 출퇴근을 한다지만, 일이 늦게 끝나면 하룻밤 잘 방이 필요하대. 우리 집(결혼 안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보다는 너네 집이 좀 더 낫지 않겠니?"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화도 나고... "그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 우리 남편 알잖아. 사람들 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거(사실 나도 마찬가지고. 낮이라면 몰라도 밤에는 더구나...) " 그런데, 이런 나의 반응을 그 친구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나보다. (하긴, 옛날의 나라면 아마 당황해 하며, 진땀을 흘렸을 거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하면서...) 아주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며 '주중에는 남편이 없지 않으냐' - '있을 때도 있다', '너희 남편 있을 때는 안 갈거다.' -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하며 서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다가 내가 경선이에게 전화해서 유감스럽지만 안되겠다고 이야기하기로 하고 끊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정작 본인은 그 친구만큼은 섭섭해 하지 않았다.

전화 끊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남편을 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무의식 중에 이런 어려운 문제(사랑의 실천을 강요당하는)의 도피처로서 의견이 분명한 사람을 택했던 거라는... 어제의 나는 사랑을 줄 바늘끝만큼도 여유가 없었다는... 내 가족, 올케, 조카들, 친정 부모님, 시어머니만 해도 나에게는 무거운 상태라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너무도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철이 들어서 이런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친구의 그러한 말투에 자극받지 않고 평화롭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나아가서 청주로 오는 그 친구를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우리 방 하나 빌려줄 수 있게 될 거라고(희망사항이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혼자 있는 것이 워낙 좋으니까)... 날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밥이 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 지금은 우리 가족에게 밥이 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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