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언제나 네가 창조한 걸 얻고, 너는 항상 창조한다. 지금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은 적이 없다고 내게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너는 네가 불러낸 것을 항상 가져왔다. 네 인생은 언제나 네 인생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했느냐 - 자신이 선택한 걸 얻은 적이 거의 없다는, 확실한 창조력을 지닌 생각까지도 포함해서-의 결과이다. ...네 삶은 네가 삶에 대해 의도하는 바대로 굴러간다.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음을 명심하라. 대다수 사람들이 보통 취하는 창조 방식은 생각과 말과 행위, 혹은 행동을 포함하는 2단계 과정이다. 먼저 생각, 다시 말해 형태를 이룬 발상 혹은 최초의 개념이 떠오른다. 이어 말이 나온다. 대부분의 생각은 결국 말이 되어 나오는 법이다. 흔히 글이나 이야기로. 이것은 생각에 에너지를 보태주어 생각이 세상 속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이 지점에 이르면 이제 생각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띄게 된다. 마지막으로 말은 때때로 행위로 옮겨져 소위  결과로, 즉 애초에 생각에서 시작된 것의 물질 표현으로 나타난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다. 네 생각이 부정적일 때 그것은 일종의 악순환이 된다. 너는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네 현재 체험의 상당부분은 네 이전 생각을 근거로 한다. 생각은 체험을 낳고, 체험은 체험을 낳는 생각을 낳는다. 받침생각이 즐거운 것일 때 이 과정은 계속해서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받침생각이 지옥같으면 그것은 계속해서 지옥을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낸다. 비결은 받침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뿌리생각 혹은 받침 생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생각-말-행동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뭔가에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으면 먼저 행동하라. 먼저 말을 하라. 충분할만큼 자주 이렇게 하라. 그러면 너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끔 네 마음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기회가 오면 재빨리 행동하라. 충분히 반복하다 보면, 얼마 안가 네 마음은 그 생각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네 새로운 사고가 될 것이다. 새로운 생각은 네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다. 그것은 네가 진화하고 성장하고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제 기회다.

...너희는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주다. 너희가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꾸자꾸 되풀이한다면, 한두번이 아니라 몇십번, 몇백번, 몇천번 되풀이 한다면, 그것들의 창조력이 얼마나 엄청날지 생각해 봤는가? 자꾸자꾸 되풀이된 생각이나 자꾸자꾸 표현된 말은 표현된 꼭 그대로 된다. 그것은 외부로 나와 실현된다. 그것은 너희의 현실이 된다. ...네 현실을 바꾸려면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하길 그만두면 된다. 네 경우라면 "나는 성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그게 어렵다면)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을 하도록 하라.  "지금 성공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라거나 "모든게 다 내 성공을 돕고 있어"라는 식으로. ...예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그에 앞서 기적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해 내게 미리 감사했다. 그로서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언한 것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누군지'와 자신과 나와의 관계를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의 앎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 ...그러니 이제 네가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원하지'말고 선택하라. 진심으로, 온마음으로 선택하라.

모든 병은 스스로 창조한다. 고리타분한 의사들조차 지금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뭘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병이 들면 그들은 왜 병이 자신을 덮쳤는지 모른다. 마치 자기네 스스로 저지른 짓이 아니라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느낀다. 대다수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비단 건강문제와 그 결과만 그런게 아니다.

걱정은 마음의 활동 중에서 미움 다음 가는 나쁜 것으로, 거의 최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을 심하게 파멸시키는 형태이다. 걱정은 일정한 초점 없이 정신 에너지를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몸에 해로운 생화학 반응들을 창조하여, 소화불량에서 관상동맥 폐색까지 온갖 병들을 일으킨다. 걱정은 마음이 자신과 나(神)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보여주는 마음의 행동이다.

미움은 가장 위험스런 정신상태이다. 그것은 몸에 독을 퍼뜨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어낸다.

두려움은 '너희'의 모든 것에 맞서는 대립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희의 정신건강과 육체 건강에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려움은 걱정이 증폭된 것이다.

걱정과 미움과 두려움은, 그 파생물들인 불안, 애달픔, 성마름,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몸세포를 공격한다. 이런 조건에서 건강한 몸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 같은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가져온다. 모든 병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서 창조된다....생각은 대단히 미묘하면서도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 형태다. 말은 그보다 덜 미묘하지만 더 짙은 에너지 형태이고, 행동은 셋 중에서 가장 짙은 에너지 형태이다. 너희가 '나는 패배자야.' 같은 부정적인 개념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너희는 엄청나게 강한 창조 에너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너희가 감기에 걸린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단 물질 형태를 띠고 나면, 그 결과들을 뒤집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최고의 믿음이라는 행동이 필요하다.우주의 긍정적인 힘에 대한 남다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너희가 이 힘을 신이라 부르든, 여신, 혹은 不動의 동인, 원동력, 최초원인, 혹은 그 밖의 어떤 딴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말이다. 치유자들이 바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것은 '절대앎'에 전달되는 믿음이다. 치유자들은 너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전체이고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들임을 알고 있다. 이 앎도 생각이다.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생각이다. 그런 앎은 산도 옮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너희 몸의 분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치유자들이 종종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생각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제발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너처럼 이십년동안 하루에 한갑씩 피워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이라도 담배를 피운 적이 있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다. 한번이라도 자기 몸 속에 술을 들이붓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너희 인간들은 지금 사는 식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하지만 네가 이걸 알면 놀라겠지만, 너희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너희의 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지탱하게끔 설계되었다. 나는 너희의 장대한 몸을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설계했다! 최초의 인간들은 사실상 고통도 없고, 오늘날 너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모르는 몸으로 살았다.

...영혼은 고안하고,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그 순환구조는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영혼-마음-몸, 고안-창조-체험

      성신 =영감 =고안

     성부 =부모 =창조

    성자 =자식 =체험

"너희는 이미 신이다."

 

너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 본질인 평화로움에서 분리될 때마다 나를 부르도록 하라.

나는 거기 있으리라.

진리와,

빛과,

사랑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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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경건'하기만 하다는 관념을 어디서 얻었는가? 신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왼쪽이기도 하고 오른쪽이기도 하며, 불손하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한 존재다!

신은 웃을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멋진 농담을 즐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유머가 없다고 알고 있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유머를 발명한 것은 신이다.

너희가 나한테 말할 때는 꼭 숨죽인 어조로 말해야 하는가? 상스런 말이나 거친 언어는 내 영역 밖에 있는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내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말,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중 일부는 내가 경멸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랑하리란 게 너희 생각이냐? 분명히 말하노니, 나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불쾌하지 않다. 그것이 삶이며, 삶은 선물이자,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이요, 신성한 것들 중의 신성함이다.

나는 삶이다. 왜냐하면 내가 곧 삶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측면은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 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인간이 창조해낸 악의 경우에는요?

너희는 신의 계획 밖에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없다. 단 한가지 생각도, 단 하나의 물체도, 단 한가지 사건도, 즉 어떤 종류의 체험도. 너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창조하게 해주는 것이 신의 계획이니까. 신이 스스로를 신으로서 체험하는 것은 이런 자유 속에서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삶 자체를 창조한 이유가 이런 체험을 위해서였다.

악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선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너희가 신의 일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은 너희가 악마의 짓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추위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위를 사랑하지는 않으며, 낮음보다 높음을,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그것들은 모두 존재 전체의 부분들이다.

나는 '악'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신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서로 반대이며, 괜찮지 않고 좋지 않으며 신이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신이 보기에는 모든 게 다 '받아들일 만'하다. 어떻게 신이 존재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겠는가? 어떤 것을 거부하는 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건 그것이 내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옳음'과 '그름'이란 상대적인 용어들이다. 나는 이 용어들을 이런 식의 의미로만 쓴다. 다시말해 '네게 도움이 되는가'란 면에서, 혹은 '네가 원하는가'라는 면에서)

그러나 너희 믿음을 고수하고 너희 가치에 충실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너희 부모의 가치이고, 너희 조부모의 가치이며, 너희 친구들과 너희 사회의 가치이니까. 그것들은 너희 삶의 틀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잃으면 너희의 체험으로 짠 천은 다 풀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것들을 한조각한조각 조사하도록 하라. 집을 통채로 헐지는 마라. 하지만 벽돌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깨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 더 이상 구조를 지탱하지 않는 벽돌들을 바꿔 끼우도록 하라.

옳고 그름에 관한 너희의 관념들은 그냥 그것, 즉 관념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자신'의 내용을 창조하는 생각들이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을 바꿀 까닭, 또는 변경하려는 목적은 딱 한가지 뿐이다. 너희가 자신에게서 행복을 느끼지 않을 때.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오로지 너희만이 알 수 있다. 오직 너희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건 내 창조물, 내 아들이다. 이 상태에서 나는 대단히 즐겁다."고 말할 수 있다.

가치란 건 단지 견해일 뿐이며, 평가요 판단일 뿐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너희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다. 아마도 너희 부모와 너희 종교와 너희 선생들과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이 내린 판단들일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진리로 포함시킨 가치판단들 가운데 너희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내린 것들은 아주 적다. 너희가 이 곳에 온 것은 체험하기 위해서였고, 너희는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체험으로 자신을 창조해 왔다.

만일 죄라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빌어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만드는 게 죄일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체험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복음으로(말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처음으로 실제 체험과 만날 때, 너희는 그 만남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덮어버린다. ... 신에 관해서도... 신에 관한, 너희 마음의 모든 체험은 신이 좋다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이 가르치는, 신에 관한 모든 것은 신이 나쁘다고 말한다. 너희 마음은 신을 두려움없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은 신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신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한다. 너희는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신의 존재 앞에서 떨어야 한다. 너희는 평생토록 주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정의'이기에. 主의 그 무서운 정의에 맞설 때 너희는 고통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신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만일 너희가 뭔가를 어느정도 필요로 하는 신,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몹시 마음이 상해 그것을 주기로 했던 사람들을 벌하는 신을 믿는다면, 너희는 나보다 훨씬 왜소한 신을 믿는 것이다. ...내 다시 이 글을 통해 너희에게 다짐하노니, 나는 필요한 게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바램이 있을 뿐... ) 그러면 신의 바램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나는, 내 모든 영광 속에서 나 자신을 알고 체험하기를,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와 우주의 온갖 세계들을 발명하기 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번째로 나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든, 너희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너희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세번째로 나는, 삶의 전과정이 지금이라는 순간순간마다 끊임없는 기쁨과 계속되는 창조와 결코 끝나지 않을 확장과 완전한 성취를 체험하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가 완전한 앎에 이르는 순간(이런 순간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에는 너희 역시 내가 항상 느끼는대로 느낄 것이다. 즉 너희 역시 오로지 기뻐하고 사랑하고 수용하고 축복하고 감사하게 느낄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신의 다섯가지 마음 자세'이다.

...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치유란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걸 이해하겠느냐? 신말고는 선택할 것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신이 되길 선택할 수도 없다.

...영혼은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몸에 깃들고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너희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가 세상에 와서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즐거움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즐거움이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일궈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할 때의 참뜻이다.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자 자신을 상대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란 너희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관계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해낸 존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은 성스러운 터전이다. 너희의 첫번째 관계는 너희 자신과 맺어져야 한다. 너희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하라.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존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들의 느낌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겠는가?

남들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기되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 "이다. 너희는 몇 가지 존재방식을 충분히 시험해 볼 때까지는 대체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가 가장 참된 느낌들을 존중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 선각자는 그런 체험들을 충분히 겪었기에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 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충분히 시험해' 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전에 그 옷들을 입어봐서 그 옷들이 자기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선각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실현에 삶을 바쳐왔기에,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그런 느낌들을 절대 즐기지 않는다. 선각자들이 소위 재난이라는 것을 만나도 동요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여러가지 도전과 어려운 순간들이 따를 것임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들을 피하려 들지 말라. 감사하면서 환영하라. 그것들을 신에게서 받는 소중한 선물로 여겨라. 너희가 관계와 삶 속으로 들어와서 이루고자 했던 바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로 여겨라.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적으로 보지 마라. 심지어 문제로도 보지 마라. 모든 문제를 기회로 보는 기술을 기르도록 하라.

...너희는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체험 결과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체험의 원인이 되라는 권유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의식하는 삶이란 게 바로 이런 삶이고, 자각하면서 걷는다는 게 바로 이것이다. ...불과 몇 생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네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는 것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가 되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 불과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온갖 것들을 죽였다. 곤충, 식물, 나무, 동물, 사람들을.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죽이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부와 명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제 너는 놀랍게도 그저 자신이 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나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네 동무라고 부를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다 정말 좋은 징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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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나눈 이야기 1  -나는 너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Neal Donald Walsch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 밖의 모든 개념들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 사람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며, 사람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Who You Are' 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토록 경이로운 장대함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존재에게서는 신조차도 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며, 엄청나게 못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신이 그토록 못난 존재라는 생각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온갖 것들에 대해서 너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해준 유일한 사람들, 즉 너희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이다.... 그들은 너희에게 이건 지나치고 저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너희는 그들이 너희를 바라보긴 하지만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는 걸 몇번이나 느끼지 않았던가? ...... 이 두려움에 근거한 사랑의 실체가 너희의 사랑 체험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실 그런 체험을 실제로 창조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굶어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 브라질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지진에 대해 유감스럽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너를 반영하는 것, 너 자신의 위대한 변형으로서 너를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난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차라리 네 가장 고귀한 '자신'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는 것들을 바꾸려 노력하거나, 그런 것들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라.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북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나는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볼 기회와, 너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을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너희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너희 자신을 금하는 것이다. 너희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것은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리라 주장한다. 무슨 그런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우리 사이의 진짜 관계가 아닐 뿐 아니라, 신을 조롱하는 짓이기도 하다.

지옥은 있다. 그러나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지옥을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지옥은 너희의 선택과 결정과 창조들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神)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 즉 '자신'과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의 당연한 귀결이다.

지옥은 잘못된 사고로 너희가 겪는 고통이다. 그러나 '잘못된 사고'란 용어조차도 틀린 것이다. 잘못된 것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은 기쁨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되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못난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며, 너희 영혼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없다. 하지만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곳, 불길 속에서 영원히 불타거나, 고통스런 상태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그런 곳으로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내가 그런 것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내가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지극히 신답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달지라도, 무엇 때문에 내가 너희의 실패에 대해 앙갚음하거나 벌하려 들겠는가? ...만일 너희가 정의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천국에서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의라는 목적은 간단하게 달성되지 않겠는가?

너희 이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어떻게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완벽하길 바라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랐더라면, 나는 너희를 너희의 고향인 절대완벽 상태에 그대로 남겨뒀을 것이다.  이 과정의 전체 핵심은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요, 참된 자신으로서,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되고자 하는 바대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갖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 너희 앞에 놓아준 선택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너희를 벌주어야 하는가?

너희는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 귀결을 깨닫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리라.

귀결consequence이란 결과result다. 당연한 결말(outcome). 이것들은 응보나 징벌과는 전혀 다르다. 결말은 자연법칙의 자연스런 적용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징벌처럼 비치는 것, 혹은 너희가 악이나 불운이라 부르는 것들은 스스로를 주장하는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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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

산불이 휩쓸고 지나가기 전에, 막연한 느낌에서 확실한 인식으로 이끌어 주신 시인에게 감사!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런 것 같다.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소녀적 감상으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자기 자리를 채워준다면 안심할 수 있겠다고 추켜주곤 하던 친구가 있는데, 그 기대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이제까지 친구와 나자신을 실망시킬 내적인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알 것이다. 내가 그런 친구가 아니라는 걸. 변해가는 나를 따라잡지 못해서 당황스럽다고 그 친구가 오늘 말했다. 나자신도 이렇게 자유로움(혹은 내맘대로 하고픈 욕구)에 대한 갈망이 클 줄 몰랐는 걸... 아마 활이 휜만큼 위력이 세듯이, 40년동안 휜 활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 가치에 대한 타인의 인정'이라는 힘으로 스스로 휜 활. 이제 내 가치를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내가 나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배짱이 느니까, 의무감이 줄어들고, 그것을 대신할 '사랑'이라는 원동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간격을 잘 정립해야겠다. 너무 멀지도, 너무 붙지도 않게...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잘 달라붙는 대상들에서도... 아이들의 성적, 남편의 칭찬과 걱정, 좋은 운, 배움, 쉼, 잠, 자유, 성취, 인정, 사랑 등등

아이들도 서서히 부모와 심리적 간격을 '기꺼이'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겠다. 큰애는 내 마음이 준비되기도 전에 그렇게 하고 있지만, 제 편한 부분은 제 뜻대로, 의지하고 싶은 부분은 여전히 의지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어서...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의 자립심을 키워줘야 할텐데...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그 심리적 끈을 부모 쪽에서 잘라줘야 한다고 하던데... 너무 과해도, 너무 부족해도 의존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데... 하기야, 정서적으로 자식에게 의존적인 부모도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나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될지도... 의존적인 부모를 탓하지 말자.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의 배경이 있겠지. 다만, 어떤 삶의 방식에나 늘 그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자기가 그런 결과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결과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이 또 사람인지라, 늘 깨어있어야 할 것! 때로는 안개속 같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기도하기. 각자에게 지혜를 주셔서 서로에게 바람직한 결과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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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백성욱 가르침, 김영사

조선 시대의 일이다.

어느 벼슬아치가 길을 가는데, 웬 집에서 소년이 글 읽는 소리가 매우 낭랑하게 흘러나왔다. 그 글 읽는 소리가 하도 범상치 않은지라, 집에 돌아온 그는 하인을 시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다. 인물이 쓸 만하면 사위를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보니, 소년의 모습이 목소리와는 영 딴판이었다.주인은 사위 삼고 싶은 마음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소년을 그냥 돌려보내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과상을 내오게 하여 떡이나 좀 먹고 가라고 일렀다. 소년은 자신이 당한 망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떡을 다 먹어 치웠다. 그러고는 맛있는 떡을 혼자 먹고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나는데, 좀 싸줄 수 없겠느냐고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주인은 새삼스럽게 소년의 사람됨에 감탄하고 그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소년은 나중에 재상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오리정승 이원익이다.

잘 닦는 이라면, 오리 대감과 같이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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