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경건'하기만 하다는 관념을 어디서 얻었는가? 신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왼쪽이기도 하고 오른쪽이기도 하며, 불손하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한 존재다!

신은 웃을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멋진 농담을 즐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유머가 없다고 알고 있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유머를 발명한 것은 신이다.

너희가 나한테 말할 때는 꼭 숨죽인 어조로 말해야 하는가? 상스런 말이나 거친 언어는 내 영역 밖에 있는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내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말,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중 일부는 내가 경멸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랑하리란 게 너희 생각이냐? 분명히 말하노니, 나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불쾌하지 않다. 그것이 삶이며, 삶은 선물이자,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이요, 신성한 것들 중의 신성함이다.

나는 삶이다. 왜냐하면 내가 곧 삶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측면은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 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인간이 창조해낸 악의 경우에는요?

너희는 신의 계획 밖에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없다. 단 한가지 생각도, 단 하나의 물체도, 단 한가지 사건도, 즉 어떤 종류의 체험도. 너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창조하게 해주는 것이 신의 계획이니까. 신이 스스로를 신으로서 체험하는 것은 이런 자유 속에서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삶 자체를 창조한 이유가 이런 체험을 위해서였다.

악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선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너희가 신의 일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은 너희가 악마의 짓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추위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위를 사랑하지는 않으며, 낮음보다 높음을,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그것들은 모두 존재 전체의 부분들이다.

나는 '악'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신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서로 반대이며, 괜찮지 않고 좋지 않으며 신이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신이 보기에는 모든 게 다 '받아들일 만'하다. 어떻게 신이 존재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겠는가? 어떤 것을 거부하는 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건 그것이 내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옳음'과 '그름'이란 상대적인 용어들이다. 나는 이 용어들을 이런 식의 의미로만 쓴다. 다시말해 '네게 도움이 되는가'란 면에서, 혹은 '네가 원하는가'라는 면에서)

그러나 너희 믿음을 고수하고 너희 가치에 충실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너희 부모의 가치이고, 너희 조부모의 가치이며, 너희 친구들과 너희 사회의 가치이니까. 그것들은 너희 삶의 틀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잃으면 너희의 체험으로 짠 천은 다 풀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것들을 한조각한조각 조사하도록 하라. 집을 통채로 헐지는 마라. 하지만 벽돌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깨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 더 이상 구조를 지탱하지 않는 벽돌들을 바꿔 끼우도록 하라.

옳고 그름에 관한 너희의 관념들은 그냥 그것, 즉 관념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자신'의 내용을 창조하는 생각들이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을 바꿀 까닭, 또는 변경하려는 목적은 딱 한가지 뿐이다. 너희가 자신에게서 행복을 느끼지 않을 때.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오로지 너희만이 알 수 있다. 오직 너희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건 내 창조물, 내 아들이다. 이 상태에서 나는 대단히 즐겁다."고 말할 수 있다.

가치란 건 단지 견해일 뿐이며, 평가요 판단일 뿐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너희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다. 아마도 너희 부모와 너희 종교와 너희 선생들과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이 내린 판단들일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진리로 포함시킨 가치판단들 가운데 너희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내린 것들은 아주 적다. 너희가 이 곳에 온 것은 체험하기 위해서였고, 너희는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체험으로 자신을 창조해 왔다.

만일 죄라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빌어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만드는 게 죄일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체험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복음으로(말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처음으로 실제 체험과 만날 때, 너희는 그 만남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덮어버린다. ... 신에 관해서도... 신에 관한, 너희 마음의 모든 체험은 신이 좋다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이 가르치는, 신에 관한 모든 것은 신이 나쁘다고 말한다. 너희 마음은 신을 두려움없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은 신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신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한다. 너희는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신의 존재 앞에서 떨어야 한다. 너희는 평생토록 주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정의'이기에. 主의 그 무서운 정의에 맞설 때 너희는 고통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신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만일 너희가 뭔가를 어느정도 필요로 하는 신,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몹시 마음이 상해 그것을 주기로 했던 사람들을 벌하는 신을 믿는다면, 너희는 나보다 훨씬 왜소한 신을 믿는 것이다. ...내 다시 이 글을 통해 너희에게 다짐하노니, 나는 필요한 게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바램이 있을 뿐... ) 그러면 신의 바램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나는, 내 모든 영광 속에서 나 자신을 알고 체험하기를,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와 우주의 온갖 세계들을 발명하기 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번째로 나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든, 너희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너희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세번째로 나는, 삶의 전과정이 지금이라는 순간순간마다 끊임없는 기쁨과 계속되는 창조와 결코 끝나지 않을 확장과 완전한 성취를 체험하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가 완전한 앎에 이르는 순간(이런 순간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에는 너희 역시 내가 항상 느끼는대로 느낄 것이다. 즉 너희 역시 오로지 기뻐하고 사랑하고 수용하고 축복하고 감사하게 느낄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신의 다섯가지 마음 자세'이다.

...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치유란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걸 이해하겠느냐? 신말고는 선택할 것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신이 되길 선택할 수도 없다.

...영혼은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몸에 깃들고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너희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가 세상에 와서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즐거움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즐거움이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일궈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할 때의 참뜻이다.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체험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고자 자신을 상대계로 끌어들였다. '자신'이란 너희가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관계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해낸 존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개인적 관계들은 성스러운 터전이다. 너희의 첫번째 관계는 너희 자신과 맺어져야 한다. 너희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하라.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존중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남들의 느낌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겠는가?

남들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기되어야 할 첫번째 질문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며',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 "이다. 너희는 몇 가지 존재방식을 충분히 시험해 볼 때까지는 대체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려 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가 가장 참된 느낌들을 존중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 선각자는 그런 체험들을 충분히 겪었기에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 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충분히 시험해' 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전에 그 옷들을 입어봐서 그 옷들이 자기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선각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실현에 삶을 바쳐왔기에,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그런 느낌들을 절대 즐기지 않는다. 선각자들이 소위 재난이라는 것을 만나도 동요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여러가지 도전과 어려운 순간들이 따를 것임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들을 피하려 들지 말라. 감사하면서 환영하라. 그것들을 신에게서 받는 소중한 선물로 여겨라. 너희가 관계와 삶 속으로 들어와서 이루고자 했던 바를 할 수 있는 영광스런 기회로 여겨라.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적으로 보지 마라. 심지어 문제로도 보지 마라. 모든 문제를 기회로 보는 기술을 기르도록 하라.

...너희는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체험 결과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체험의 원인이 되라는 권유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의식하는 삶이란 게 바로 이런 삶이고, 자각하면서 걷는다는 게 바로 이것이다. ...불과 몇 생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네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는 것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가 되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 불과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온갖 것들을 죽였다. 곤충, 식물, 나무, 동물, 사람들을.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죽이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부와 명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제 너는 놀랍게도 그저 자신이 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나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네 동무라고 부를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다 정말 좋은 징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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