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자유의 길

                                                     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요하네스 슈라이버는 마르코 복음에 관한 자신의 연구를 '신뢰의 신학'으로 지칭했다.... 마르코는 나자렛 예수에 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신뢰로부터 당신의 내적인 권능을 믿었던 분이고, 당신 마음 속에 있는 바를 단순하게 말씀하시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가차없이 행하시는 분이며, 적대자들과의 대결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다. 그분은 많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홀로 대결하시면서도 하느님에 관해 체험했던 바를 간직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고, 고문당하고, 모욕당하고 죽으실 때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의 신뢰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다....예수 죽음의 기적을 이해한 첫 사람은 이방인 백부장이다. 복음은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비명 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보았다고 말한다. 바라봄, 깊이있게 바라봄은 신앙에 속한다. 만일 내가 예수의 비참한 십자가 죽음에서 그리고 그 죽음의 비명소리에서 하느님께 대한 예수의 절대적인 신뢰를 본다면, 나는 마르코 복음의 메세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수의 무조건적인 신뢰가 드러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고쳐주시고, 악마의 세력에서 해방되기 위해 투쟁하셨던 그분의 사랑이 완성된다. 마르코는 죽음의 무기력에서 악마의 세력을 이겨내신 예수의 사랑을 역설적인 비유로 묘사한다. "이웃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이 사랑은 죽음으로써 생생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죽으면서 죽음을 이겨낸다.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사랑의 새 생명이 의기양양하게, 마지막 희생을 각오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무기력과 실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 사랑을 믿기 어렵다.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 독자는 예수의 죽음 안에서 어둠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모든 불안에 대한 신뢰의 승리를 보도록 초대받고 있다. 마르코에게 예수는 참된 신앙인이시다. "그분은 온갖 시련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 아버지를 조건없이 신뢰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온갖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표현으로" 죽으신다. 독자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묵상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모든 불안과 곤궁을 극븍해 주시고,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예수와 더불어 신뢰하도록 초대받을 것이다.

마르코는 많은 불안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신뢰의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안은 우리 시대의 근본 주제이다. 마르코는 값싼 위로를 언급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우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과 고독과 거부 그리고 실패의 모든 상황을 묘사하고, 가장 극심한 고독과 무기력의 장소인 십자가에서 사랑의 승리를 밝혀 줌으로써 불안을 잠재운다. 마르코는 이런 십자가 신학으로 현대인의 가장 큰 불안인 곤궁, 실패, 질병, 외로움, 고독에 대해 해답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불안에 대해서도 해답을 내린다. 마르코는 십자가에서 불안에 대한 신뢰의 승리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독과 무능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를 추종하려고 각오할 때, 죽음이 사랑을 물리칠 수 없음을 이해할 것이며, 바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사랑이 가장 힘있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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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해 보는 건데,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절에 살았더라면 예수라는 사람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한 위격이신 성자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외적으로 볼 때, 학력도 없는, 겨우 삼년간 설교와 치유를 행하다가,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한 이름없는 인물을...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위해 순교까지 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리라...

대다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불안을 달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현세에 대한 불안, 죽는 순간과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대인의 신앙생활 모습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요즈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이 꼭 주일마다 미사나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뜻일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온가족이 같은 신앙을 갖고 있으면 주일마다 같이 미사 참석하는 것이 가족 행사가 되니까 뜻깊을 수 있겠지만, 나처럼 한사람만 미사참석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소외감을 느끼며 집에 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많이 치유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힘이 필요할 때에는 물론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픈 사람이 다른 사람 배려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병원에 가겠다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야속할 뿐이지...

한때는 나를 고쳐주신 하느님이 너무 감사해서 은혜를 갚기 위해 마음에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아버지가 감사해서 아버지 곁에 남아 있으면서, 한편으론 이러면 아버지께서 끝까지 나를 돌보아 주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심리가 작용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인품이 훌륭한 부모라면 자식이 어렸을 때, 또 아파할 때 돌보아 주고서, 자기 곁에 남아있기를 기대하지 않고,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지켜볼 것이다. 하물며 하느님은...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지 못할 때, 어떤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도 별로 없이, 은총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채, 의례적으로 하느님께 일주일마다 출석도장 찍으며, 이웃사람과 놀다오는 것 아닐까? 나처럼 이웃과 놀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건데, 꼭 미사에 참석해야만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거룩하게 지내는 것일까? 어쩌면 게으름을 이런 생각들로 합리화하는 걸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건 아닐거다. 스스로의 한계 이상으로 뭔가를 해내야 할 때, 힘을 얻기 위해 오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자기 자신의 한계 이상을 하고자 할 때 힘이 되는, 자신만의 철학이나 신앙이 있을 때 삶은 좀더 수월해질 것이다. 모든 고통과 부조리와 비합리라는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만큼 많은 정의와 사랑과 선의가 있음으로 해서 아름다운 세상으로 느낄 수도 있고... 개인에게도 그림자가 있음은 당연한 거고, 그 그림자를 수용할 때 인격이 더 풍부해 지는 것처럼, 사회에도 교회에도 그림자가 있는 건 당연하고, 그 그림자를 수용할 때 더 풍성해질 수 있겠지... 마음으로 수용은 하겠지만, 그 안에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체험해 보려고 한다. 주일미사를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잘하면 보다 더 큰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사실, 난 점점 형식적인 것은 딱 질색으로 느껴진다. 천주교의 온갖 제례들, 미사의 형식들...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하니까 미사의 형식을 견디는 것이지, 영성체를 제외하면, 미사보다 교회 예배가 훨씬 자유로와서 좋다. 예배는 너무 가벼운 것이 마음에 안들지만... 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할지... 스스로 탐색해 보아야겠다.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했는데, 크고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 안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유를 더 깊이 체험해보고 싶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가지셨던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마태오 12장 37절 ; 잘 들어라. 심판날이 오면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될 것이다. 네가 한 말에 따라서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게도 되고 죄인으로 판결받게도 될 것이다.

이 말씀엔 약간 두려움이 느껴진다. 사실, 두려움을 느낄 일은 바로 이 말씀이 아닐까? 누가 과연 하느님 마음을 제대로 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체험한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겠지... 과연 있는그대로의 하느님을 내가 느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내 시각을 갖고 인식하게 되기가 쉬우니까... 그렇더라도 여러 사람의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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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 생각하다보니, 종이로 말아서 만든 망원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 색깔 셀로판 테이프까지 붙여서... 지금도 맑은 안경은 아니지만...

관심사항이 '사랑'일 때는 책을 읽어도, 영화를 보아도 거기에 촛점이 맞춰지고, '여성인권'일 때는 그쪽 관련 책들을 주로 골라 읽고, 다른 분야 책을 읽어도 그 주제의 관점에서 책을 읽고, '민중'일 때는 또 그렇게 바라보며 열받아하고... 그림공부할 동안은 예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하느님에 대해 조금 알아갈 동안은 또 '독실한 크리스찬'의 관점에서 나자신과 사람들을 '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내 본성이 뭐 하나에 집착하면 거기에 푹 빠지는 특성이 있나보다.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불편한 점이 있다면, 딸린 식구들과 자 나신의 실생활을 돌볼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는 것. 이제는 많이 좋아져서(특히 상담소를 그만두면서 무지 힘들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면서부터) 뭔가에 집착을 덜 하게 되는 것 같다.

판단하는 문제도 많이 나아졌다.

마태오 복음 5장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태오복음 7장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5장에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관점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관점에서일까? 우리가 누구를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7장의 말씀에 따르자면, 우리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그의 티를 보면서 판단한 거라는 말씀일텐데,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악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심판받게 되는 거겠지? 하느님께 심판받는다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그래서, 우리가 심판하는 내용대로, 스스로의 행동을 구속하게 된다는...  예를 들어서, '튀는' 사람이 싫으면 나는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잘난체' 하는 사람이 나쁘게 보이면 나는 '잘난체' 하지 않으려 무의식중에 애쓰며 노력하게 되고, 잘난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웬지 밉고... '답답한' 사람이 싫으면 '답답한' 내 아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고 '까다로운' 사람이 싫으면 '까다로움'이라는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을, 세상을 총체적으로 보는 시각을 길러야겠다. '신과 나눈 대화'에서 신께서, 상대계에서 '옳고 그름'은 없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옳고 그름은 없다'도 결국 옳은 말만은 아닐 수 있다는 전제하에... 뭐든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 말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말장난인지 진실인지...

마태오 복음 6장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 마음의 빛이 어둠이라면...  율법주의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모든 율법주의자들. 혹은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모든 지식들, 관념들. 'must, always, only, must not, never, every...'

마음의 빛이 빛이려면, 이해하고 사랑하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나뭇잎을 스치는 미풍처럼, 밝은 미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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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에 빠져 있을 때는 다른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정신건강에 관심있을 때는 그 문제에, 신체 건강에 관심있을 때는 그 문제에, 영어공부에 관심 있을 때는 영어에, 독서에 관심있을 때는 또 독서에 관심의 촛점이 좁혀지면서 시야가 좁아지는게 나의 특성인 것 같다. 이동식 박사 말씀이 만인만물에 고루 관심이 있어야 진정 건강한 사람이라는데, 나는 언제쯤에야 내 좁은 관심분야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려나...

막내가 새 유치원에 적응하느라 그러는지 여기저기 몸이 조금씩 좋지 않으면서 통 먹으려 들지를 않는다. 먹어야 나아질텐데...

짐작되는 성모님 생각 : 너는 이런저런 새로운 시각들에 접하면서 영적으로 혼란스러워하며 통 기도하려 들지를 않는다... 기도해야 나아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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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9장 35-37절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하고 하신 다음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시고 그를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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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절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지! 쉽진 않겠지만...'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문득 '첫째가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섬겨도 되겠네.'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슨 심보인지...

어린이 받아들이는 문제는 또 무의식적으로 '입양'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각자의 여건에 따라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 경우는, 진짜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 마음 속에 있는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내 마음 속, 남편 마음 속, 또 친구, 올케, 부모님, 이웃 등등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받아 보살핌이 필요한 내면 아이.  그래서 어른이면서도 자주 충동적이고 때때로 공격적이며 자주 불친절하고 때때로 불안해 하며 자주 인내심을 잃곤 하는 원인이 되는 내면 아이.

그 아이들을, 그래서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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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눈 포도주와 갈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유치원에서 배웠다, 로버트 풀검, 김영사

뒷집 사람과 나는 서로 상대방을 색안경을 끼고 본다. 내가 보기에 그는 갈퀴질이나 하고 삽질이나 하는 사람이며,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말썽꾼이며, 황야를 정복한 그런 종족의 후예이다. 반면 그는 나를 게으름뱅이로 여기고 있다.

가을이면 그는 한 주일이 멀다 하고 낙엽들을 갈퀴로 긁어모아 쌓아두기에 바쁘다. 그리고 눈이 올 때마다 밖으로 뛰쳐 나와 삽으로 흰 눈을 못살게 군다.

그의 지나친 열성 때문인지 아니면 난폭함 덕분인지 몰라도, 언젠가는 두껍게 얼어붙은 서리까지 용케 삽으로 다 치워낸 적도 있다. "자연이 사람을 앞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연에 깃들인 신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사뭇 조심스럽게 말해준다. 나뭇잎은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렇게 낙엽이 되어 떨어져 왔다고, 또 대지는 갈퀴와 사람이 있기 전에도 꽤 잘 조화를 이루어 왔다고 그에게 말해준다.

대자연은 낙엽을 놓아두고 싶은 곳에 놓아두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흙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흙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말해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흙을 계속 써 없애기 때문이라고 깨우쳐준다.

그리고 흰눈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눈은 우리더러 하루쯤은 일손을 늦추고 쉬면서 잠자리에 있으라는 것을 알리는 신의 계시이다. 그뿐만 아니라, 눈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저절로 녹으며, 낙엽들과 한데 섞여 더 많은 흙을 만들어낸다고 그에게 말해준다.

그의 뜰은 정말 말쑥하다. 나는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리라. 말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면 말이다. 그리고 지난번에 눈이 왔을 때 그는 차 있는 데까지 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비록 갈퀴질이나 하고 삽질이나 하는 사람이긴 하여도 좋은 이웃임에는 틀림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편견이 없다.

하지만 내 뜰은 붉은 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이 서로 어우러져 마치 아라비아 양탄자 같은데, 그의 뜰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그가 기껏 눈에 삽질이나 하고 있는 그 시간에, 나는 다음 해 칠월이 오면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마실 눈을 병에 담고 있었으며, 테이프에 눈 내리는 소리를 녹음해서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는 데에 썼다.(눈은 정말 쓰임새가 많다.)

나는 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겨울눈 한 병에다 눈 내리는 소리가 녹음된 예의 그 테이프를 끼워 보냈다. 그는 나에게 갈퀴를 선물하였다. 우리는 서로 그것들의 적절한 쓰임새에 관한 교훈을 주고받은 것이다.

나는 그가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를 교화시켜 나갈 작정이다. 그는 또 내가 지나치게 종교적이라고 여겨 나를 신앙심에서 좀 끄집어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내가 이기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도 나도 또 여러분까지도 모두 나뭇잎과 눈이나 마찬가지로 흙이 되어, 사람들이 갈퀴질이나 삽질을 하든 말든, 나뭇잎과 눈이 가는 곳으로 가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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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지막에는 내가 이기게 되어 있다.'에서 웃음이 나왔다. 노인의 천진함(?)이 느껴져서. 지금의 나라면 아마 '내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겸손해지자.'라고 마무리 할텐데...

그리고, 지금의 나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을 나와 너무나 비슷하면서(어리석은 점에서) 한편 너무나 이질적인 사람들로 느낀다. 나 자신의 모든 면이 껄끄럽게 느껴지면서, 수용하는 것이 잘 안되어서 그럴거다.

오늘 아침, 남편의 친구가 변호사 사무실 개업한지 일년 정도 되었는데, 사무실 유지가 어려워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서로 절충 못하고 싸우고 소송 걸어줘야 그 사람은 먹고 살겠네."라고 말하며 같이 웃었다.

그래. 내가 꿈꾸는 평화로운 세상은 꿈일 뿐이기도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들어서 직업을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지겠다. 변호사, 의사, 경찰, 청소부 등등

하느님께 변호사가 '식구들 먹여 살리기 힘들어요, 하느님. 은총 내려 주세요.' 하고 간절히 빌면 하느님은 어느 누군가가 소송을 절대로 취하할 마음이 없도록 만들어 주셔야 할 거다. 이제 막 개업한 의사가 '은총 내려 주세요.'하고 기도하면 하느님은 여러 사람들이 운동안하고 과식해서 병에 걸리도록 방치해 두셔야 할 거고. (그렇게 안하셔도 사람들이 알아서 소송 취하 안하고 운동 안하겠지만... 변호사랑 의사 먹여 살리려고...)

무질서와 어리석음도 세상살이에 필요한 거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아침이었다. 하느님도 이렇게 세상을 관조하실까?

나는 이제 무엇을 하길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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