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생각하다보니, 종이로 말아서 만든 망원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 색깔 셀로판 테이프까지 붙여서... 지금도 맑은 안경은 아니지만...

관심사항이 '사랑'일 때는 책을 읽어도, 영화를 보아도 거기에 촛점이 맞춰지고, '여성인권'일 때는 그쪽 관련 책들을 주로 골라 읽고, 다른 분야 책을 읽어도 그 주제의 관점에서 책을 읽고, '민중'일 때는 또 그렇게 바라보며 열받아하고... 그림공부할 동안은 예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하느님에 대해 조금 알아갈 동안은 또 '독실한 크리스찬'의 관점에서 나자신과 사람들을 '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내 본성이 뭐 하나에 집착하면 거기에 푹 빠지는 특성이 있나보다.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불편한 점이 있다면, 딸린 식구들과 자 나신의 실생활을 돌볼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는 것. 이제는 많이 좋아져서(특히 상담소를 그만두면서 무지 힘들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면서부터) 뭔가에 집착을 덜 하게 되는 것 같다.

판단하는 문제도 많이 나아졌다.

마태오 복음 5장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태오복음 7장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들어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5장에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관점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관점에서일까? 우리가 누구를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7장의 말씀에 따르자면, 우리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그의 티를 보면서 판단한 거라는 말씀일텐데, 그렇다면 바로 우리가 '악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심판받게 되는 거겠지? 하느님께 심판받는다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그래서, 우리가 심판하는 내용대로, 스스로의 행동을 구속하게 된다는...  예를 들어서, '튀는' 사람이 싫으면 나는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잘난체' 하는 사람이 나쁘게 보이면 나는 '잘난체' 하지 않으려 무의식중에 애쓰며 노력하게 되고, 잘난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웬지 밉고... '답답한' 사람이 싫으면 '답답한' 내 아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고 '까다로운' 사람이 싫으면 '까다로움'이라는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을, 세상을 총체적으로 보는 시각을 길러야겠다. '신과 나눈 대화'에서 신께서, 상대계에서 '옳고 그름'은 없고,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옳고 그름은 없다'도 결국 옳은 말만은 아닐 수 있다는 전제하에... 뭐든지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 말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말장난인지 진실인지...

마태오 복음 6장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네 마음의 빛이 어둠이라면...  율법주의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모든 율법주의자들. 혹은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모든 지식들, 관념들. 'must, always, only, must not, never, every...'

마음의 빛이 빛이려면, 이해하고 사랑하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나뭇잎을 스치는 미풍처럼, 밝은 미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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