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리철진에서 박인환씨가 분한 고첩 오선생은 남한 사람이 다 된 인물이다.  공작금도 잃어버린채 자신을 찾아온 철진에게 짜증을 주체할 수 없고, 그냥 조용히 있다가 북으로 돌아가라고 타이른다.  남편보다 한술 더 뜨는 중산층 지향의 아내 간첩 역은 정영숙씨가 맡았다.  벌이도 시원찮은 간첩질을 부부가 전업으로 할게 아니라, 한명은 식당이라도 해보자는 푸념을 한다.  IMF와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고용 불안과 삶의 질 하락에 시달리는건 첩보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리철진이 임진각 휴게소로 들어가기 전에 오선생과 나눈 대화가 있다.  "옛날에 내가 살기위해 필요한 건 오로지 내 믿음이었던 시절엔 말이야, 그게 없으면 죽을 거 같았어.  내 신념이 붕괴되고 내 투쟁이 없어지면 그 땐 정말 죽는 줄 알았지.  근데 이 놈의 나라가 좋은 게 있지.  그런 어떤 것이든 뭐든 쓰면 없어진다는 거야.  투쟁도 그것이 풍미했던 시절도 이념도 다 써버렸다.  쓰니깐 다 없어지더라구.  리철진 동무, 내가 공산주의자로 보이나?"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인민을 살려야지"  혹자는 비범한, 혹자는 가벼운 인물로 평하는 장진이지만 내게는 저 대목으로서 기억된다.  박인환씨의 연기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영하의 책과는 소재의 유사성이 조금 있는 정도인 영화 얘기를 한 것은, 당시 관람 후에 했던 생각이 떠올라서이다.  남에서 북으로 간 간첩은 어땠을까.. 안기부의 타이틀이 바뀌고, 민간인으로 정권교체가 되던 시대의 혼란 같은 것.  물론 혼란의 내용도 거창하기보다는, 97년 외환위기 당시 급격한 환율 절하 탓에 확정금리로 책정된 미화 공작금이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반찬 가짓수가 적어지고 방학 때마다 애들을 평양 영어 캠프 보내는 것도 그만 둬야 했다 등의 시덥잖은 공상이 주였다.  반북과 친북만이 소리 높은 사회에서도 다른 형태의 접근, 가령 B급 개그 같은 것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모종의 우월감에서 북쪽 사람들의 '촌스러움' 을 비웃는 '연변 개그' 같은 것까지 의미한건 아니다. (진행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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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퇴전문 2006-08-2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 과연 그렇습니다.
RM/ 메일론 안 왔는데요. 아마 제가 메일로 받기 기능을 쳌하지 않아서인가 봅니다. 원래 댓글의 내용은 뭐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