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패자 - 6.25 국군포로 체험기
박진홍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6월
품절


눈사태처럼 남으로 후퇴하는 보병들에게는 통솔하는 분대장도 소대장도 없었고, 중대장도 대대장도 없었다. 후퇴할 때도 전진할 때와 같이 양 도로변에 일렬로 서서 지휘자의 지휘 하에 후퇴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눈 앞의 보병들은 내가 먼저, 네가 먼저 하면서 남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완전 오합지졸, 그야말로 비참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중략) 주위를 살펴보니 분대원 몇명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공포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온몸이 떨렸다. 우리를 그토록 못할게 굴던 국방경비대 출신의 일등상사인 호랑이 선임하사도 온데간데 없었다. 분대장도 없었다. 장교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계급을 내세우던 상급자들이 지금 아무도 없다. 상병인 내가 졸지에 제일 높은 계급자가 되어 있었다. 그 계급이란 것도 똑같이 입대를 했지만 내가 군번이 빨라서 먼저 진급이 된 것이지 성적순이 아니었다.

(중략) 먼 곳에서 지프 모양이지만 보통 지프보다 큰 차가 보였다. 별을 두개나 단 별판도 있었다. 우리 사단장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미군 사단장은 최전선까지 와서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우리들은 도로에 정렬하여 거수 경례를 했다. 그것은 감사와 존경의 표시였다. 차를 탄 사단장도 답례를 했다.-17~42쪽

수천명이 떼지어 우리에게 겁도 없이 달려오던 중국군 인해전술의 첨병은 국부군 포로 출신이었다. 분대장 한 사람만 모택동의 팔로군 출신이고, 그 외 인해전술 참가 부대는 국부군 출신의 포로들인 것이다. 후방 부대라서 이런가 했더니 전방 부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중략) 국부군 출신들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신 성분을 극복하려 했다. 군복을 오래 입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요령과 통솔력이 있는 법인데, 전투 경험까지 많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우리와 같이 단 몇일의 훈련만 받고 일선에 온 군인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래서 이들이 유효사거리 밖에서 보인 행동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던 것이다. 적진을 향해 선 채로 유유히 걸어오는 그들을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중략) 우리들은 그들과 작별 인사와 함께 악수까지 하면서 헤어졌다. 민족은 달라도 전쟁에서 같은 포로 신세 경험을 가진 자들끼리는 서로를 정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들은 멀리 떠나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며 이별을 아쉬워했다.-51쪽

여기서 나는 포로로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무서원과 첫 대면을 했다. 역설적이게도 중국군은 타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무서원은 같은 민족이지만 이념적으로 적대시하게 되어 감정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족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유엔군과 중국군이 개입하여 대리전 양상으로 벌어진 상황이기에, 내무서원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까 라는 걱정이 앞섰다.-58쪽

멀리 맞은 편에서 트럭 한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미제 군용트럭이었다. 북으로 가는 인민군 포로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중략) "고생했다. 잘 가거라!" 우리는 남으로, 그들은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가 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어느 전쟁사에 이런 광경이 또 있을까. -188쪽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부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대였고, 내가 속해 있던 7사단은 안동에서 걸어서 서울까지 행군했기 때문에 후발 부대에 속했다. 내가 한여름 날씨에 허우적거리며 서울에 입성했을 때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집에도 없었고 거리에도 없었다. 그리고 휴전 후 나는 서울역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6.25 전쟁 동안 젊은 사람들은 모두 군대에 나간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마카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젊은이가 태반이었다. 젊은 여자의 몸치장은 대단했다. 이북에서 화장한 여자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서울역에서 보는 여자들은 진한 화장에 입술에는 붉은 칠을 하고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전쟁을 겪은 나와는 전혀 다른 몸치장이었다. 이들의 차림새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새 군복을 입은 촌스러운 표정의 우리를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계급장도 없는 우리를 경멸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객차 속의 우리와 객차 밖의 그들 간에는 마치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있는 듯 했다. 나는 정말 이곳이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인가 하고 내 눈을 의심했다. 이런 남쪽의 모습은 이북과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이북은 전원이 전투원이었다. 전원이 전쟁에 나가 싸웠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전쟁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195쪽

후배들이 나를 보고 싶다고 연락했다. 경북중학교 1년 후배들이며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중략) "너거는 어떻게 지냈노?" "우리는 군대 안 갔습니다." "어떻게 피했노?"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판 무덤에 내가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이 바보였다. 고생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할 수가 없었다.-224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zuaki 2006-08-17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하는 사람만 억울한 사회에서는 조금이라도 안 당하려고 잔머리를 굴리게 마련. 가슴 아픈 얘기군요. 이 책 무지하게 읽고 싶어서져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집 근처 도서관에 있습니다. 히힛, 빌려와야지~

중퇴전문 2006-08-19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군대가 받고 있는 유권무역 무권유역(有權無役 無權有役)의 혐의 - 빽 있는 넘은 안 가고 가는 넘들만 간다는 예비역 컴플렉스의 원형을 보는 듯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