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글쓰기 -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지혜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89년 미국에서 초판이 나온 애니 딜러드(Annie Dillard)의 에세이 <창조적 글쓰기>(원제:The writing life)는 20년이 지난 2008년 국내에 소개됐다. The writing life라는 원제에 '창조적 글쓰기'라고 국문 제목을 붙인 것만큼이나 표지 그림도 다르다. 내가 굳이 영문판, 국문판의 제목과 표지 그림을 들먹이는 이유는 그것들로부터 건질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문판 제목과 표지 그림, 국문판의 그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책의 내용과 부합하는가? 답하기 어렵다. 저자 애니 딜러드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섬의 개인 서재에서 자신의 일상, 경험, 사색을 글쓰기와 연관지어 말하는 에세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영문판의 'The writing life'라는 원제가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론 낯익은 일상을 재발견하고  어떤 대상에게 글쓰는 이의 목소리와 놀라움을 부여하며 그래서 결국 나와 글이 하나가 되는, 세상에는 없는 글을 써내는 창조적 글쓰기를 하게 하는 것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국문판의 '창조적 글쓰기'라는 제목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표지 그림도 영문판의 표지 그림은 읽기 전에 글쓰는 이의 삶에 대해 짐작케한다는 점에서 더 비교우위에 있고 언뜻 보기에는 관련없는 비행기, 나방, 의자, 체스말, 악어, 볼트와 너트 등이 타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국문판의 표지 그림은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한다는 점에서 우위에 있다.

 


제목과 표지 그림의 차이는 이 책을 보는 시선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창조성의 원천과 관계가 있다.

 

우린 글에 어떻게 창조성을 불어 넣을 수 있을까? 작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글쓰는 일이 만만할 순 없다. <창조적 글쓰기>엔 '글쓰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아주 직설적으로 들려준다. 북극의 어느 추운 겨울캠프에서 한 여성이 모든 사람이 죽은 다음 자신의 허벅지를 떼어내서 낚시를 하는 장면은 글쓰기의 시작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잘 보여준다. 글쓰는 법은 끈기 있게, 온 힘을 다해 무뚝뚝하게 지면을 채워나가야만 죽음의 지면이 가르쳐준다니 아찔하다. 글쓰는 삶은 세미놀 악어와의 목숨을 건 사투며 언제 조류에 휩쓸려 망망대해로 떠 내려가 버릴지도 모를 해안가에서 배를 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니.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누가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줄까? 한 독자가 궁금해 했다. 지면과 지면이, 그 끝없는 공백이(시간의 낙서를 권리로, 글 쓰는 이의 대담무쌍함을 필연성으로 확인하면서) 그가 천천히 메워나가는 영원함의 공백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망치면서도 그의 자유와 행동할 권리를 주장하고, 건드리는 모든 것을 망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냥 불투명하게 여기 존재하는 것보다는 더 낫기 때문에 건드린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가 무뚝뚝하게 메워나가는 지면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가능성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지면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끌어 모을 수 있는 불완전한 장점들로 맞서보는 그의 죽음의 지면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 지면이 그에게 글 쓰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창조적 글쓰기> 89p-90p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좋아하고 문학을 즐기며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글쓰기에 도전할 것이고 자신이 쓴 글이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것과 다를 수 있다면...' 하고 소망할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리 속을 둥둥 떠 다녔던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나는 두 가지로 갈무리했다. 하나는 '일상의 재발견-낯설게 보기'이며 또 하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나의 확장'이다.



 

다행스럽게도 창조성은 타고난 재능이나 특별함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일상과 몸에 익은 익숙함 속에 숨겨져 있다. 바로 '일상의 재발견-낯설게 보기'가 창조성의 보고다.  중요한 것은 다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시선으로 대상을 표현한 결과가 한 켜 한 켜 쌓여 하나의 탑,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눈을 뜨고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본다고 관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 주변에 널려 있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놓치고 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 때문에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시각을 바꾸는 순간, 매일 주변에서 보던 모든 것이 내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관찰 대상이 된다.  - 백지연 <크리티컬 매스> 167p

 

버틀런드 러셀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만들어 가야만 '우리' 를 위한 부속품에서 벗어나 '나'로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낯설게 보기'는 창조성의 원천인 동시에 나의 확장이다. 나의 확장은 대상과 내가 하나되는 물아일체로의 고양된 형태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없던 새로움으로 이끌어 창조성의 모태가 된다.

 

화가는 세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물감을 풀이나 나사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중략)...자기 자신을 물감통의 내용에 맞추라고 파울 클레(스위스 화가)는 말했다. 물감통의 내용에 자기 자신을 맞추는 것이 자연이나 자연에 대한 연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가는 물감을 세상에 맞추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물감에 맞춘다. 자아는 물감통과 그 통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나르는 하인이다. 클레는 이런 통찰을 상당히 정확하게 "완전히 혁명적인 새로운 발견"이라고 불렀다. <창조적 글쓰기> 96p-97p

 

클레처럼 화가가 물감이 되고,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이 되고, 테니스 선수가 라켓이 되고, 요리사가 요리기구가 되고 글쓰는 이가 펜이 되는 물아일체의 순간 '나'는 대상으로 확장되고 그 확장된 나를 통해 경이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며 그 창조의 결과물또한 '확장된 나' 된다. <창조적 글쓰기>의 마지막 장章에는 데이브 람이라는 곡예 비행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곡예 비행마저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비행사가 비행기가 되는 순간을 상정해 보라. 당연히 가능하다. 

 

"모든 아름다운 가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라고 예이츠는 말했다. 람은 의도적으로 그 자신을 하나의 형상으로 바꿨다. 멀리 떨어진 비행기의 조종석에 보이지 않게 앉아서 그는 예술과 창조의 도구이자 작인이 됐다. 곡예비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의 비행기와 그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선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기분에 신경을 썼더라면 그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기라는 옷을 입은 그에게서는 성직자처럼 특색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배우나 왕처럼 자신이 맡은 역할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비행에 대해 그는 단지 "리듬을 탄 다음 그것을 따르는 거죠." 라고만 말했다...(중략) 비행할 때 람은 예술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자신을 예술 속에 묶었다. 그는 회전하며 예술을 사방에 펼쳐 냈다. 그 자신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촬영해 놓은 것이 아니라면 보지 못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을 들을 수 없었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가 청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쓴 종이 속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람 역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상상과 금속의 융합, 동작과 생각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음을. <창조적 글쓰기> 155p-156p 

 

글쓰기도 다르지 않다. 나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

 

자신의 일상과 경험 속에서 찾아낸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돋보인다. 한 순간 떠올랐다 섬광처럼 사라지는 이러한 지혜는 저자의 깊은 사색과 성찰 덕분에 잡아둘 수 있었다고 본다. 독자로서 저자같은 통찰과 지혜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독서의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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