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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구려1~3>는 4세기 초 서천왕의 손자 을불이 고구려 15대 미천왕으로 등극, 낙랑을 축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잘 알려진 김진명. 그의 작품들은 역사를 바탕으로 미스테리처럼 전개되기 때문에 시작부터 대중성을 확보한다. 문체가 유려하진 않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밀도있고 박진감이 넘친다. <고구려>도 김진명표 소설의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척 재미있다. 한편의 무협소설을 읽는 것처럼. 다만 그 스케일이 다른 작품의 서너배 크다는 점이 그의 전작들과 차이다. <고구려> 미천왕 편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만 줄잡아 40~50명, 그가 17년에 걸친 자료 검토와 해석 끝에 내놓은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고구려>는 전형적인 영웅소설이다. 주인공 을불(미천왕)은 무예에 출중하다. 왕재(王才)도 지녔다. 그래서 왕이 되었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라고 하면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을불은 시련과 고난의 과정을 밟아간다. 어린 시절 봉상왕(고구려 14대왕)의 핍박으로 종조부 안국군과 부친(돌고)을 여의고 위태로왔던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하여 소금장수로 떠돌다 낙랑으로 흘러 들어간다. 숱한 고생을 하지만 후원자들과 친구를 만나 결국 화려하게 고구려 15대 왕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4세기 전후의 고구려, 낙랑, 선비의 영웅들과 조우하게 된다. 삼국지의 제갈공명에 비할만한 재사들-고구려의 창조리, 모용선비의 원목중걸, 진의 최비, 낙랑의 주아영-의 지략대결을 엿볼 수 있다. 관우, 장비같은 장수들-숙신의 아달휼, 모용선비의 모용외와 아야로, 고구려의 여노와 고노자-의 용맹과 충정도 목격하게 된다. 을불을 둘러싼 양소청과 주아영의 애정관계, 주아영을 둘러싼 을불과 모용외의 삼각관계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아, 적벽대전만큼 흥분되는 서안평 전투까지. 심각한 역사의식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빠져든다.
김진명은 작가의 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맹렬히 진행중인 지금, 우리의 "작가와 출판사들은 다투어 삼국지와 초한지와 수호지를 재번역"하고 있으며 "고구려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문학은 어느 곳에도 없고 누구도 쓰지 않고"있다고 했다.(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가야의 이야기를 <제4의제국>이라는 작품으로 빚어낸 최인호 작가가 들으면 발끈하시겠다, 삼국지로 우리 현대사를 풍자했던 그래서 우리만 가지고 있는 <고우영의 삼국지>의 故 고우영 화백께서 들으시면 무덤에서 일어나시겠다) 이런 상황속에서 청소년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숱한 장수들의 이름은 다 외우면서도 정작 미천왕이 누구이고 소수림왕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요즘 아이들 똑똑하다. 지난 10여년간 출판시장에서 아동부문은 가장 급속히 성장했으며 학습만화 시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구려 왕 정도는 알고 있는 애들이 꽤 된다. 물론 역사의식과는 별개겠지만) 그래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삼국지를 읽기 전에 고구려를 읽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고구려>를 집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개탄과 안타까움, 신념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삼국지>의 2,000년의 관록과 명성을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극동지역에서, 다시 말해 한중일에서 삼국지의 아성은 <고구려>에 등장하는 명장(名將) 아달휼이나 모용외가 오더라도 불세출의 군사(軍師), 창조리나 원목중걸이 오더라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삼국지>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 속에 등장하는 제갈공명, 관우, 조조같은 인물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삼고초려, 읍참마속같은 하나의 일화는 언론 기사, 명사 특강 등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면서 일반 대중은 그것이 누구의 역사인지를 묻지 않는다. 고사(故事)로 인식할 뿐이다.(<고구려>에도 삼국지, 열국지의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 꽤 있다.) 뿐만아니라 영화, 게임, 캐릭터 상품으로 그 형태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삼국지>의 역사는 오래전 저물었지만 삼국지 이야기가 자본의 시대에 여전히 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삼국지에서 한 수 배우면 작가는 <고구려> 집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보게, 젊은이. 아참, 다루라고 했지. 무예의 세계는 깊고 심원한 것일세. 국적이나 신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아. 나는 자네가 고구려 사람이라고 해서 경원하지 않는데, 나보다 젊은 자네가 그런 것에 얽매여서 되겠는가? 세상을 좀 더 넓은 눈으로 보아야지.
- <고구려1> 91p
(낙랑의 무예총위 양운거가 다루(을불)에게 자신의 집에서 무예를 배워보라고 권한다. 다루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는데 이때 양운거가 다루에게 한 말)
스토리텔링 시대다. 역사 속 스토리들이 21세기 새로운 전장(戰場)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김진명의 <고구려>도 미천왕 을불을 선봉으로 스토리 전쟁에 막 나서고 있다. 일단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다니 드넓은 영토를 차지할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다.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곧 모습을 드러내면 아마 드라마, 영화 제의도 들어올 것이다. 스토리에 목마른 게임제작자들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렇게 국지전에서 작은 승리를 만들어 가다보면 운명을 건 한 판 승부를 벌일 힘을 비축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고구려>가 출사표(이것도 삼국지 냄새가 난다.^^:)를 던지고 뛰어던 이 대회전(大會戰)의 승패는 다시 장구한 세월이 흐른뒤 미래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