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아내가 물었다. "여보,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할건데요?" 이럴때는 질문과 대답사이에 틈을 둬서는 안된다. 나는 번개와 같이, 빛의 속도로 대답했다. "순장 풍습을 따라야지. 같이 관에 들어갈거요." 아내가 막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당신,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요. 나하고 함께 죽는 건 용서해도 먼저 죽는 건 용서못해요!" 그렇다. 결혼은 반드시 사별을 전제하고 있다. 잊고 살 뿐이다. 

 

 나는 아직 배우자를 먼저 잃어버리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 슬픔은 내가 아내를 사랑한 정도에 비례하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C.S.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아내 조이를 잃은 슬픔을 비통하게 쏟아놓고 있다. 무신론자로 살아오던 루이스는 32세(1929년)때 유신론자가 됐다. 이후 그는 역사에 남게 될 기독교 변증서 -<고통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예기치 못한 기쁨> 같은 - 를 써냈다. 이들 책에서 늘 하나님 편에 서서 변론했던 루이스는 조이를 상실한 슬픔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하나님이 계시는가'라고 되묻기까지 한다.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니라 아픔을 표현한 말이지만 아내가 없는 현실을 이보다 더 아프게 인식할 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증상이다....(중략) 그러나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 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중략)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 <헤아려 본 슬픔> 22p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모든 광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찾아보라고 해도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손길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죽었다. 죽어버린 것이다.

- <헤아려 본 슬픔> 32p

 59세가 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루이스는 암에 걸린 조이와 병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이들의 극적인 사랑이야기는 <Shadow Land>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강추!) 결혼후 잠시나마 조이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면서 희망을 엿보았던 루이스였으니 슬픔과 절망을 더 컷으리라.

 

 루이스가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헤아려 본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뇌를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 글쓰기는 확실히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루이스는 처음의 슬픔의 장막을 걷어내고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다. 아내 조이를 계속 죽은 자로 애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대할 것으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에 대해 나는 '너무 완벽해서 지속되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중략)...그러나 또한 이는 '그 나름의 완벽함에 다다랐다. 이루어야 할 만큼 이루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길게 늘일 필요가 없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됐다. 그 과정을 터득하였다. 내 보기에 미쁘다. 이제 다음 연습으로 갈 준비가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2차 방정식을 배워서 즐겨 할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거기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다. 선생님은 다음 단계로 옯겨 가신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배웠고 성취했기 때문이다. 

- <헤아려 본 슬픔> 74~75p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헤아려 본 슬픔> 76p

 

우리는 한 몸이었다. 이제 둘로 갈라진 이상, 그것이 완전하고 온전한 체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결혼한 상태일 것이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리라....(중략)...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어느 민담에 산 자의 애도가 죽은 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다. 죽은이들은 우리더러 제발 좀 그만두라고 말한다...(중략)...어쨌든 내게는 앞으로의 계획이 명백하다. 나는 가능한 자주 기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웃음으로 맞이하기조차 할 것이다. 내가 그녀를 덜 애도할수록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 <헤아려 본 슬픔> 81~83p

 이제 조이도 루이스도 죽음의 단계를 넘어갔다. 조이의 표현대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로운 상태'로 영원의 샘으로 돌아간 것이다. 먼저 과정을 밟아간 루이스가 슬픔을 미리 헤아림으로써 나같이 그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에게 족보(?)를 남긴셈이다. 앞날에 대한 무지는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던가? 더구나 알지도 못하는 거대한 슬픔의 산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으로 찾아든다면 나는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을 다시 읽겠다. 루이스의 글들이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아내와 나는 '자다가 편안히 함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조이가 말했듯 둘이 한날 한시에 죽어 나란히 누워있는것처럼 간다해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만약에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먼저 가야된다면 내가 슬픔을 헤아리는 자가 되기를...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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