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하트 - Bravehear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나'로 살 수 없다. 자본과 재화가 거래되는 시장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 인간은 철저히 구매자의 기호와 욕구에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쓸모가 없다.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의 욕구'는 끼어들 틈이 없다. 욕구를 상실한 인간은 꿈꿀 수 없는 인간으로 변한다. 꿈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꿈꿀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 몸은 살았지만 영혼은 사라진 인간으로 말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지만 21세기 현재 '인간은 죽었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난 자주 꿈과 직장의 경계에서 서성인다. 그 경계지역엔 꿈을 좇아 자유의 땅에 도달했다는 사람들의 노래가 희미하게 들린다. 하지만 현실을 버린 직장인들의 피비릿내도 진동한다. 코를 막고 저 자유의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현실은 확성기를 통해 경고방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떻게 먹고 살 건지 생각해 보셨나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그래 꿈을 찾아 떠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협박성 멘트는 나를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내 인생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자유'를 외치며 방어선을 구축한다. 든든한 우군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자유는 대학가서 마음껏 누리고 지금은 죽자 살자 공부할 때'라고 외치는 교주같은 선생님들과 그 말을 경전처럼 따르는 친구들 틈에 있었다. 그래서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었다. 대학에 가서는 잠깐이었지만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고등학교 선생님들께 감사하며 그분들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주어지는 시간은 자유가 아니라 고통이었다.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시간의 통제를 국방부에 위탁하기로 했다. 2년 동안 입고 먹고 자고 일어나는 모든 일상이 기계같았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대학생활과는 180도 정반대의 시간관리였다. 육체적으로 고달팠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군복무시절까지 나는 시간과 상황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제대후 그제서야 난 내가 누군지, 뭘 해야할 지 고민하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때 <브레이브 하트>를 만났다.

 

 내가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그 때, 난 무슨 고민을 하든 마지막에 가서는 막연하게나마 '자유로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 내게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하자면서 정체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13세기말 스코트랜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에 용감하게 맞섰던 인물이다. 당시 스코트랜드는 잉글랜드에 빌붙어 주체성을 잃어버린귀족들과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모르는 평민들뿐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설 순 없다.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월레스는 스털링 전투에 앞서 스코트랜드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멋진 연설을 한다. 자신은 '윌리엄 월레스'이고 우리는 '자유인'이며 '목숨을 빼앗을 순 있지만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아직도 스코트랜드를 상징하는 푸른 염료를 얼굴에 잔뜩 바른 월레스가 칼을 빼들고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자기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꿈과 자유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것은 내장된 나침반 같은 것이다. 혹 길을 잃어도 방향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마음 속 북극성이다.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월레스와 자기가 누구인지 왔다 갔다 하는 귀족 브루스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월레스는 어린 시절 소규모 전투에서 아버지와 형을 한꺼번에 잃는다. 그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월레스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용기를 갖고 꿋꿋하게 살아라." 월레스는 이 말을 평생 가슴 속에 새겼고 그렇게 살았다. 브루스는 귀족 가문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문이 스코트랜드의 왕위를 차지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문둥병으로 몸이 썩어가던 그는 브루스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때로는 웰레스의 편에 때로는 잉글랜드의 왕 롱생크의 편에 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중립은 미덕이 아니다. 회색의 다른 이름이며 배신의 은신처가 된다. 결국 브루스는 월레스를 배신하고 스스로 자책하는 가롯유다꼴이 되어버린다.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업그레이드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의 양날개가 생긴다. 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물질에 자신을 팔지 않는다. 그런 일관된 행동은 자신감을 불러 일으킨다. <브레이브 하트> 속 스코트랜드의 귀족들은 롱생크가 주는 황금, 영토, 작위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혼을 팔아버린 족속들이었다. 월레스는 돈과 명예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있었다. 요크성을 점령한 월레스에게 롱생크가 이사벨라 공주를 보내 휴전제의를 하면서 작위, 토지, 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한다. 결국 롱생크의 계략에 빠져 잉글랜드로 잡혀온 월레스는 감옥에서 이사벨라 공주와 재회한다. 비참한 처형을 하루 앞두고 공주는 월레스에게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자비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 때 월레스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가슴에 담을 대답을 한다. "롱생크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난 이미 죽은거나 마찬가지요....사람은 언젠가는 죽소. 목숨이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니까(Every man dies, not every man really lives.)"

 

 그래.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살아있다고 산 건 아니다. 삶과 죽음이 마치 동전의 양면인듯 하나가 되어 굴러온다. <브레이브 하트>에는 많은 사람이 죽는다. 대규모 전투신이 많이 나오니까 무지기수로 죽는다.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월레스의 아버지와 형이 죽고, 아내 머론이 죽고,  친구 해머쉬의 부친 켐벨이 죽고 결국 자신도 죽는다. 월레스는 죽음도 삶의 일부로 생각한 것같다. 아버지도 머론도 친구의 부친도 모두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월레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처형되기 직전 감옥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부디 용감히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먼저 간 소중한 사람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삶의 끝을 떠올리면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집중해서, 좀 더 용기있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에 맞닿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에 월레스가 '자유(freedom)'를 외치는 순간을 가장 인상깊은 장면으로 꼽는다. 나도 무척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한다. 울컥하고 뭔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자유는 주어진다' 라는 믿음을 버리고 '자유는 선언이다' 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난 내 자유를 누군가가 강탈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는 내 속에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자유를 선언하고 용기를 가지고 자유인으로 사는 것 뿐이다. 투쟁의 결과로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월레스와 롱생크가 격돌하는 폴커크 전투 장면. 브루스와 귀족들의 배신으로 처절하게 패배당한 후 죽어가는 해머쉬의 부친 켐벨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틀렸어. 보내 주거라.....나는 자유인으로 충분히 살았다. 이렇게 장성한 네가 늘 자랑스러웠고...난 행복했단다." 난 월레스와 스코트랜드의 자유는 저 잉글랜드를 정복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로 가는 길 위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벌써 15년 전이다. 방황하던 나에게 꿈과 자유의 메시지를 전했던 <브레이브 하트>의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가슴 속 나침반을 다시 들여다 본다. 여전히 꿈과 자유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월레스의 기도를 나도 읇조린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부디 꿈과 자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프리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