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 (양장) - 우리 땅에 사는 흔한 풀 100종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10
김창석 글, 박신영 외 그림, 강병화 외 감수 / 보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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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세상 모든 풀을 '잡초'라고 불렀다.

 

지난 해 3월, 두 돌을 지난 아들 녀석은 찬기운이 물러가자 저녁마다 산책을 나가자며 졸랐다. 그리곤 산책길에서 처음보는 풀, 꽃, 나무를 만날 때마다 '아빠, 이건 뭐예요?' 라며 줄기차게 묻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는 그래도 반쯤은 이름을 대 가며 답해 줄 수 있었지만 풀은 달랐다. 가지 수가 많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는 대부분 낯익은 풀들이었지만 강아지풀, 토끼풀, 괭이밥 말고는 모두 '잡초'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내 머릿 속에는 풀들의 이름이 없었다. 나의 순수한 무식함과 뻔뻔스런 오만함이 세상 모든 것에 막 관심을 가지고 선의로 다가서는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중지능이론이 퍼뜩 떠올랐다. 80년도 초반 하버드대학의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지능지수(IQ)만으로 인간의 지적능력을 측정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중지능이론을 발표했다. 즉, 과거의 지능지수 측정이 언어, 공간, 논리수학영역으로 한정되었다면 가드너 교수의 다중지능이론은 인간친화, 자연친화, 자기성찰, 음악, 신체운동까지 포함하여 8가지 영역의 지능이 복합적으로 관련되면서 인간의 지적 능력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부모라면 자녀가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모든 영역에서 지적 능력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건 의무라고 해야할 것이다. 아들 녀석의 자연친화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순 없었다.

 

풀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당연히 책을 스승삼았다. 내게 풀 이름을 가르쳐 준 책,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이하 <풀 도감>)이다. <풀 도감>은 우리 땅에 사는 흔한 풀 100종을 세밀화로 그려 생김새와 한살이를 설명해주는 풀 그림 사전이다. 사진이 아닌 세밀화로 그려진 풀들에서는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풀내음도 막 나는 것같다. 책 맨 앞에는 쉽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찾아보기'를 붙여놓았다. 또한 식물은 생김새에 따라 어떻게 분류되는지, 어떤 한살이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개괄하고 있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하나 하나 소개하기 시작한다. 숲을 본 다음 나무를 보는 것같다. 친절한 책이다. 

 

어릴 때 풀 이름을 몰라서 맘대로 이름을 붙였다. 계란 후라이가 연상돼 계란꽃이라고 불렀던 개망초, 기는 줄기로 땅바닥을 완전히 감싸고 있어 뱀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아 뱀풀이라 여겼던 환삼덩굴, 나팔꽃을 닮아서 작은 나팔꽃으로 알았던 아기메꽃, 강아지풀이 너무 커서 변형된 강아지풀이라 의심했던 수크랑. 나는 한 동안 아들 녀석과 함께 '잡풀'의 감옥에 갇혀있던 풀들을 의미의 공간으로 탈출시켰다.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 주변의 풀 이름이 궁금해질때마 나는 <풀 도감>을 펼친다. 도감을 펼쳐 풀의 정체를 확인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 세상 존재들의 '다양성'을 용감하게 말살해 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그냥 인간'으로 불릴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특함은 셀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다양함 속에서 '특별하고 유일한 그 누구'로 존재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나비를 '그냥 나비'라고 부르는 것은 나비에 대한 모욕이 되는게다. 굴뚝나비, 배추흰나비, 처녀나비, 모시나비, 표범나비, 유리창나비, 지옥나비, 부전나비...그래서 나비박사 석주명은 국내 240여종의 나비 이름을 불렀다. 곧은 뿌리와 수염 뿌리, 곧은 줄기와 감는 줄기, 그물맥과 나란히맥, 통꽃과 갈래꽃이 다르다는 사실이 자명한데도 난 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지 못하니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잡풀', '그냥 풀'이라 했다. 세상에.

 

걸어서 하는 아침 출근길, 아들과 함께하는 저녁 산책길에 이제 쇠뜨기, 지칭개, 참새귀리, 새팥, 흰명아주가 인사를 한다. 친한 친구가 확 늘었다. 아들 녀석 가르치려다 내가 배웠다. 세상에 '그냥~'은 없다. 세상 모든 풀은 이름이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 가슴에 환하게 울려퍼진다.

 

"사물에도 인간과 똑같이 이름이 있다. '창가의 꽃'이 아니라 '창가의 제라늄'으로 묘사하는 편이 훨씬 좋다. '제라늄'이라는 단어 하나가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가 그 꽃의 존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도와 준다.....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마음속 흐릿한 부분이 선명해지면서 이 지상의 삶에 튼튼한 줄을 이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내가 아는 식물들인 산딸나무나 개나리를 보면 그 장소에 더 깊은 친근감을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 줄 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쾌한 증명인 것만 같다."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120~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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