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시대 - 캐롤라인 왕비의 1460일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2
페르 올로프 엔크비스트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친애하는 왓슨

 

왓슨, 잘 지내나?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느라 바쁠테지? 하지만 충분히 쉴 시간을 가져야 하네. 몸이 쉬이 지쳐버리는 계절, 여름이니까 말이야.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고 여유도 미소도 사라지고 정상적인 의사결정도 힘들어지지. 더군다나 자넨 환자의 병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확실한 처방을 해야하는 의사이니 만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하도록 하게. 하하,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았군. 그래도 친구 좋다는게 이런 것 아니겠나?   

 

자네, 내가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이유가 궁금하지? 지난 주말 내가 자네 병원에 잠시 들렀을 때  자네가 내게 건넨 책 기억하나? <가면의 시대> 말이야. 자넨 일이 너무 바빠서 그냥 대충 훓어봤다고 했어. 그러면서 18세기 후반 덴마크 궁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흥미로운 역사소설 정도라고 했네. 책을 돌려 받을땐 내 생각을 듣고 싶다고 덧붙이면서 말이야. 그래선지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주의를 기울였네. 꼭 사건을 의뢰받은 느낌이 들었거든. 

 

이제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해 보자구. <가면의 시대>를 깊이 읽어내려면 18세기의 덴마크를 들여다봐야 된다고 생각하네. 자네에게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군. 먼저 <권력과 광기>(비비안 그린, 말글빛냄)의 12장(덴마크의 연극-크리스티안7세)을 읽게.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7세의 통치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걸세. 또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남경태, 들녁) 중에서「InterludeⅡ 혁명을 선도한 계몽 309p~322p」부분도 발췌해서 읽어두면 17~18세기에 걸쳐 유럽 지성사에 대두되었던 계몽주의가 크리스티안 7세의 통치시대였던 덴마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을거야. 물론 이런 배경지식이 없어도 책은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는 것처럼 술술 잘 넘어가네. <가면의 시대>는 그 자체로 독자가 흥미있어할 만한 요소-역사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점,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분명하다는 점, 왕실의 치열한 권력 암투와 부도덕한 애정 행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 등-를 두루 갖춘 하나의 완결된 소설이기 때문이지.    

 

이야기의 뼈대는 단순하네. 나이 어리고 정신이상인 왕(크리스티안 7세)과 왕비(캐롤라인 마틸드)를 둘러싸고 한 쪽에선 보수세력(굴베르)과 개혁세력(슈트루엔제)이 힘을 겨루고 또 한 쪽에선 왕비와 왕실 주치의(슈트루엔제)가 애정 행각을 벌이지. 결국 왕비는 이혼당한 후 외딴 성으로 유배되고 슈트루엔제는 처형되네.당연히 슈트루엔제의 개혁안들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권력은 굴베르의 손에 들어가면서 끝을 맺지. 이 단순한 스토리 속에 신학이 지배한 그 시대의 순수와 신성, 계몽주의의 이성, 그리고 개성 강한 인물들의 욕망을 절묘하게 엮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더군. 

 

왓슨, 난 말이야 표지와 제목에서 <가면의 시대>가 꼭 한 편의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느껴졌네. 이 책의 원제는 '주치의의 방문'이거든. 뭐 하지만 난 <가면의 시대>도 멋진 함축을 담은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네. 겉과 속이 다르고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행동이 조화롭지 못한 등장인물들을 잘 표현하고 있어. 또 크리스티안,캐롤라인, 슈트루엔제, 브란트 같은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진정 원하는 삶은 따로 있는데도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 마치 출연하고 싶지 않은 연극의 무대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나간 배우들처럼말이야.

 


 

벽난로에 불을 켰다. 다른 불은 없었다. 다들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응접실에 모인 사람은 국왕 크리스티안 7세, 왕비 캐롤라인 마틸드, 에네볼트 브란트, 그리고 슈트루엔제였다. 불빛은 벽난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슈트루엔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린 뭐가 될까?"

"스테인드글라스 만드는 화가." 왕비가 말했다. "영국의 한 성당에서 작업할 거야."

"배우." 브란트가 답했다.

"밭에 씨 뿌리는 사람." 국왕이 말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당신은?" 왕비가 슈트루엔제에게 물었다. "당신은 뭐가 될 거야?"

슈트루엔제는 답변 대신 둘러앉은 친구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마디 툭 던졌다.

"의사."

 

- <가면의 시대> 367p


왓슨, 현실을 연극으로만 채워야 한다면 그 삶은 거짓일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더구나 그런 연기를 강요당해야 한다면 일상이 고통과 공포로 얼룩져 결국 피폐해질 뿐일테고. 태생적으로 왕실에 태어난 왕가의 사람들이라해도 감정과 언어까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마리오네트 인형이 아닐까?

 

책의 전반부는 주요 인물들-굴베르, 크리스티안, 캐롤라인, 카테리네, 슈트루엔제-의 외모와 성향이 집중적으로 묘사되고 있네. 또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독자의 신뢰를 획득하고 성경의 내용을 삽입하여 그 시대의 종교적 분위기도 잘 만들어 내고 있고. 중반부는 캐롤라인과 슈트루엔제의 부도덕한 애정행각 혹은 진실된 사랑이야기가 나오고 후반부는 체포되어 유배되고 처형되는 파국이지. 아무튼 <가면의 시대>의 핵심 내용은 부도덕이라고 하든 진실하다고 하든 캐롤라인과 슈트루엔제, 그들의 사랑이야기네.

 

사랑이야기 좀 해 보겠네. 내 비록 장가도 안 간 사립탐정이지만 사랑도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분석하고 추리해 볼 수 있지 않겠나? 사랑은 수작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네. 사람은 수작, 즉 말을 주고 받는 것으로 서로 의사소통할 뿐 아니라 감정까지 전달할 수 있지. 처음엔 불쾌했던 감정도 말을 하다보면 유쾌해질 수도 있고 유쾌한 감정을 공유하기도 하고 말이야. 신분은 왕비 캐롤라인이 높고 나이는 주치의 슈트루엔제가 15살 정도 많네. 둘의 공통점은 뭘까? 덴마크에서는 둘 다 이방인이라는 사실이지. 뿐만아니라 왕비는 왕과의 관계가 아주 좋지 못하고 말붙일 진실한 벗 하나도 없었네. 슈트루엔제는 정신이상인 왕을 대신해서 덴마크의 개혁을 거의 혼자서 추진하고 있었네. 그렇다면 또 하나의 공통점은 외로웠다는 것이겠지. 당연히 사랑에 빠졌네. 신분과 나이의 벽을 넘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거야. 죽을 줄도 모르고. 이런 사랑을 하려면 규칙이 필요한데 '조심'과 '용기'네. 슈트루엔제는 왕비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면서 승마의 규칙을 가르쳐 주더군. 아이러니하게도 승마의 규칙도 '조심'과 '용기'더군. 슈트루엔제는 사랑도 승마도 '조심'해서 했지만 캐롤라인 왕비는 사랑도 승마도 '용기'있게 했네. 근데 말이야, '조심'을 첫째 규칙으로 삼은 슈트루엔제는 말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사랑도 비극적으로 끝나 처형당했고 '용기'를 더 낫다고 생각한 캐롤라인은 승마를 하면서 말에서 떨어진 적도 없었고 목숨도 부지했어. 재밌지 않나? 사랑이든 승마든 뭐든 간에 너무 조심하는 것보단 약간 용기있게 하는 게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첫 수업에서 탈 말 쪽으로 안내했다.

"첫 번째 규칙은 '조심'입니다." 슈트루엔제가 말했다.

"그럼 두 번째는요?"

"'용기'입니다."

"두 번째 게 낫네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가면의 시대> 236p

마지막으로 <가면의 시대>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말, 순수 이야기를 해볼까하네. 왓슨, 나는 말이야 크리스티안, 캐롤라인, 굴베르, 슈트루엔제는 모두 순수를 추구했다고 생각하네. 먼저 크리스타안을 보자구. 그는 직함에 굶주린 자들이 들끓고 부도덕이 창궐한 궁정 풍토를 그리스도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아 성전을 정화한 것처럼 자신의 궁정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했네.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슈트루엔제는 개혁을 통해 덴마크를 더 나은 사회와 국가에 이르게 하는 것이 순수함(신성함)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했지. 굴베르는 덴마크의 전통과 궁정, 나아가 모든 백성이 계몽사상에 전염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순수를 수호하는 것이라 믿었네. 캐롤라인은 철저히 사랑이라는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응했고 말이야. 누가 진정 순수의 수호자일까?  묻지 않을 수 없네. 어렵군.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나치게 순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비, 관용, 용서가 부족하다는 거야. 근본주의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네. 어려워.

 

왓슨, 이상한 일이야. 책을 덮고 나니 책 속 몇 구절이 머릿 속에서 맴도는군. 그러다가 전혀 다르게 해독되는 암호문처럼 눈 앞에 펼쳐져. 그건 나의 가능성에 대한 꿈으로 읽힌단 말이지. 신성하게 살고 싶은 꿈 말이야. 다시 진지하게 묻자구. 왓슨, 자네 꿈은 뭔가? 신성하게 살고 싶은 꿈 없나?

 


 

"우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슈트루엔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린 뭐가 될까?"

<가면의 시대> 367p

 

"그럼 두 번째는요?"

"'용기'입니다."

"두 번째 게 낫네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가면의 시대> 236p

 

결국 스트루엔제 시대에서 남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생물학이나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꿈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것이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슈트루엔제 시대가 남긴 단순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플루트의 음률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히 잘라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가면의 시대> 489p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책임인 미성숙 상태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남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러한 미성숙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은 그 원인이 이성의 결핍이 아니라,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겠다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3년)에서

<가면의 시대> 9p


그렇찮아도 바쁠텐데 긴 글 읽어줘서 고맙네.

다음 주말에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하세.

 

홈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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