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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이야기 ㅣ 카르페디엠 19
안케 드브리스 지음, 박정화 옮김 / 양철북 / 2005년 11월
평점 :
(홈즈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왓슨이 기다리고 있다)
홈즈 : 왓슨, 오래 기다렸지? 미안하네.
왓슨 : 괜찮네. 자네 많이 바빴군 그래.
홈즈 : 그렇게 됐네. 의뢰받은 사건 현장을 면밀히 조사하고 관계된 사람들과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지 뭔가. 자네, 2시간이 넘도록 기다리느라 지루했겠어?
왓슨 : 하하. 전혀 지루하지 않았네. 책을 읽었거든. 자네 요즘 아동도서도 읽는 모양이지?
홈즈 : 내 지식의 폭을 넓히려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겠나. 그래, 최근엔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동도서도 읽고 있네.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두 친구 이야기>도 읽었고.
왓슨 : 음, 이 책은 제목을 보곤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로만 생각했어. 근데 처음부터 긴 한숨이 나오더군.
홈즈 : 그렇지? 자네가 긴 한숨을 토해 낸 건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때문이겠지.?
왓슨 : 맞아, 홈즈. 어떻게 열 살짜리 여자 아이 유디트에게 그토록 심한 폭언과 구타를 일삼을 수 있을까? 그것도 엄마가 말이야. 생각만해도 끔찍하군.
홈즈 : 유디트의 엄마(코니 반 헬더르)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폭행은 거의 광기에 가깝지. 그 여자는 허울만 엄마일뿐 유디트에겐 잔인한 괴물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지 않겠나?
엄마는...진공청소기의 금속 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제발……엄마, 제발……." 유디트는 멍한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등과 팔과 엉덩이는 쏟아지는 매를 맞고 있었다. 매질은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았다. 유디트는 침대로 기어가 베개 밑에 머리를 묻었다. 공포에 질려 몸을 잔뜩 웅크렸다. <두 친구 이야기> 95p
느닷없이 손이 다가와 유디트의 머리채를 거세게 잡아서 뒤로 확 젖혔다. 유디트는 아프고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질렀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여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었다. 엄마가 유디트를 부엌으로 끌고 가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마구 차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조리대에 쿡 쳐박혀서 두 팔로 얼굴을 가로막았다. "역겨운 도둑년."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을러댔다. <두 친구 이야기> 139p
왓슨 : 홈즈, 이 여자의 잔인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홈즈 : 왓슨, 자넨 지금 약간 흥분상태네. 진정하게. 하여간 유디트의 엄마가 왜 유디트를 그토록 심하게 매질했을까 생각해보는 건 중요한 문제야. 그건 유디트의 미래와도 관계되어 있으니까.
왓슨 : 홈즈, 자네도 짐작하고 있군. 보통 자녀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지. 자기도 부보로부터 학대를 받았거나 심한 차별을 받은 경우가 많아. 유디트의 엄마도 그런 유년의 슬픈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말이야. 자기의 아픔이 자녀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심한 폭력으로 자신의 과거를 보상받으려 하더군.
홈즈 : 학대받는 아이들의 문제는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는 것 아니겠나? 극도로 소심해져서 친구관계에 폐쇄적이된다든지, 아니면 집에서 겪은 폭행, 폭언을 다른 약한 친구들에게 행사한다든지. 물론 그보다 아동학대가 그토록 위험한 이유는 끊어버리지 못하고 세대를 넘어 대물림되어 나타난다는 것이겠지. 마치 물을 먹은 스펀지가 불쑥 불쑥 스며있는 물을 짜내듯이 어느덧 가해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학대에 중독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곤 통탄해한단 말이야.
왓슨 : 그러니까 가정에서 학대받은 아이들을 위해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 장치가 필요하네. 아이들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 아니겠나? 하지만 이 나라엔 그런 부분이 매우 취약하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세. 그래도 유디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등장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홈즈 : 미하엘이라는 친구지.
왓슨 : 홈즈, 친구라는 말이 참 좋지 않나? 정겹고 들으면 웃음이 나고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하하. 친구라는 말 속에 홈즈 자네의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
홈즈 : 참, 그 친구 새삼스럽기는. 친구 관계가 빚어내는 보석을 우리는 우정이라고 부르네. 왓슨, 우정이 언제 싹 트는지 아나?
왓슨 : 글쎄?
홈즈 : C.S.루이스는 <네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네.
단순한 동료 의식으로부터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은, 동료 중 어떤 두사람(혹은 그 이상이) 다른 동료에게는 없는 어떤 공통된 본능이나 관심사나 취향-그 순간 전까지만 해도 각자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보물(또는 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입니다. 우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전형적인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뭐, 너도?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었는데!" C.S.루이스 <네가지 사랑>
왓슨 : 꽤 공감되는데.
홈즈 : 유디트와 미하엘은 가족때문에 겪는 '아픔'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지. 둘 다 한부모 가정이지. 좀 복잡하게 얽혀있긴 하지만 말이야.
왓슨 : 미하엘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아버지가 있지만 네덜란드 헤이그의 엘리 이모네 집에서 생활하지. 홈즈, 이 책은 말이야 낳았다고 부모가 되는 것도, 함께 산다고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어.
홈즈 : 맞네. 부모다워야 부모고 가족다워야 가족이지. 유디트의 엄마를 엄마라고 할 수 없네. 또 미하엘의 아빠가 미하엘에 대한 태도,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면 진정 아빠가 될 순 없었을 걸세. 낳지는 않았지만 미하엘을 자식처럼 데리고 사는 엘리 이모를 보게. 미하엘이 엄마라고 불러도 손색없어.
왓슨 : 미하엘과 유디트는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조금씩 과거와 가족사 이야기도 하면서 깊은빛을 내는 우정을 만들어 가네. 또 서로의 약점을 메워주면서 일종의 동지 의식도 느끼고. 유디트에게는 미하엘이 일종의 쉼터 역할을 했지. 미하엘도 자신의 난독증을 이해하고 책을 읽어주는 유디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고.
홈즈 : 그래. 왓슨, 난 이런 열 살 또래의 아이들이 과연 이런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네. 내 어린 시절이 떠 올랐기때문이지. 부럽더군. 아무튼 유디트와 미하엘의 관계가 더 진전되려면 유디트가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했네.
왓슨 : 홈즈, 우린 유디트를 좀 더 이해해야하네. 미하엘이 편안한 쉼터같은 친구였겠지만 유디트는 엄마로부터 학대받는다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을 걸세. 아니, 진실이라기보다는 봉인된 비밀 같은 것이었겠지. 어린 아이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홈즈 : 그랬겠군, 왓슨. 소중한 친구가 자신의 비밀에 휘말리도록 하고 싶진 않았겠지. 그 보다 더한 이유는 공포와 긴장감이었을 거고.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중략)
"왜냐하면 너무 겁을 먹거든. 그냥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무서워." <두 친구 이야기> 278-279p
왓슨 : 홈즈, 사람이 언제 더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지 아나? 폭행 순간이 아니라 폭행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 순간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라네. 긴장의 진폭이 커지고 공포는 극대화되지. 유디트는 늘 그런 분위기 속에 살았네. 폭행 후 엄마의 우호적 행동조차도 공포스러워지는 그런 분위기 말이야. 난 한 순간도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걸세. 그런 분위기는 열 살 소녀 유디트를 완전히 불능상태로 만들었겠지. 공포는 비밀과 거짓말을 키워낼 수 밖에 없었을테고.
홈즈 : 자네 말을 들어보면 미하엘이 끈질기게 유디트를 위해 준 마음이 결국 유디트를 진실과 용기의 마당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어. 미하엘은 유디트에게 '유디트'임을 상기시키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유디트는 유디트'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네. 나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은 나와 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니까.
"처음에, 널 알기 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넌 스테피가 아니라 유디트잖아."
유디트는 몸을 돌려 미하엘의 얼굴을 보았다. 눈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 나는 유디트야. 유디트."
유디트가 천천히 되풀이했다. 자기 이름을 처음 들은 사람처럼 말했다.
<두 친구 이야기> 215p
왓슨 : 유디트의 이야기와 함께 <두 친구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미하엘의 이야기는 가족의 회복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네.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해서 좋았고.
홈즈 : 왓슨,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 장면을 짚고 넘어가야겠네.
왓슨 : 혹시 이 책에서도 추리할 만한게 있었던 건 아니겠지?
홈즈 : 좀 비약적인 생각이긴 해. 하여간 이 장면부터 보자구.
그때부터 선생님이 틀어 놓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포악한 괴물 같은 불도저들이 열대우림을 파헤치고 있었다. 동력 톱이 기분 나쁜 소리로 울부짖고 나자 키 큰 나무들의 몸통이 트럭에 실렸다. 몇백 년 동안 숲에서 종족의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숲을 지키기 위해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미하엘은 그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느꼈다. 원주민과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영국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숲의 파괴를 막으려고 벌목 작업을 방해했다. 그의 목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누구 하나 그 사람을 신고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숲에 숨어,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며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두 친구 이야기> 101p
왓슨 : 이건 베크만 선생과 아이들이 수업하는 장면이잖나?
홈즈 : 맞아. 좀 느껴지는게 없나?
왓슨 : 어디 보자...
홈즈 : 이 장면이 <두 친구 이야기>가 인류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주제로 도약할 수 있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믿네. 작가가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왓슨 : 들어 보세.
홈즈 : 이 책은 표면적으로 유디트와 미하엘의 상처난 가족사, 둘의 우정이 싹트고 열매맺는 과정을 다루고 있네. 물론 이것만으로도 작품의 의미가 대단하지. 하지만 책 속에 소개된 다큐멘터리 수업장면을 보면 인류가 친구 자연에게 한 짓이 유디트의 엄마가 유디트에게 한 학대와 뭐가 다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네. 상처입은 유디트는 파괴된 자연환경(숲과 원주민)으로, 유디트의 친구가 되는 미하엘은 원주민의 방패가 되어주는 영국 사람으로 대비해볼 수 있어.
왓슨 : 오, 홈즈. 그건 비약이 아니라 대단한 통찰인걸.
홈즈 : 파괴된 것이 무엇이든 원상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려해도 파괴의 시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걸 우린 기억해야하네.
왓슨 : 아이들을 지켜가는 노력만큼 자연을 지키는 건 중요해. 다 망쳐놓고 자연보호캠페인이다, 탄소배출제한이다 떠들어봐야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지. 아이들과 자연은 인류의 미래라는 걸 다시 한 번 뼈져리게 깨닫게 되는 구만.
홈즈 : 아이들의 언어를 배워야 하네.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지. 그래야 공감할 수 있어. 또 자연의 경고도 잘 들어야 하고. 훼손된 자연과 상처입은 아이들이 여는 미래는 비참할 수 밖에 없겠지. 그들이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가 버리지 않도록 희망찬 오늘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가는 길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네.
왓슨 : 오늘 즐거웠네 홈즈. 이래서 자네 사무실에서 2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손해볼 게 없다니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