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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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기 전, 인터넷 서점 리뷰어들의 글을 살폈다. '노인들의 아픔을 이야기한 책', '집약의 극치를 보여준다', '늙은 나를 만나게 하는 소설', '살다가 병들고 늙어 죽게 된다는 것' 등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별 넷이상을 매겨놓았고 호평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말을 극도로 아꼈다. 덕분에 나는 장례식으로 시작된 주인공의 삶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끝까지 지켜 볼 수 있었다. 살고 병들고 늙어 죽는 이야기를 이보다 더 진실되게 보여주기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수작이었다. 리뷰어들의 호평에 공감했다.

 

책을 덮은 후에 잠시 눈을 감는다. 인상 깊었던 단어들이 내 감상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 '은밀한 야망', '오랫동안 참아온 야망'....'꿈'... 나는 뜻밖에도 <에브리맨>에서 꿈을 만났다. 그것은 오랜 습관때문이다. 나는 죽음을 대할 때마다 삶을 생각하게 되고 삶은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에브리맨>에서 꿈을 만난 것은.

 

동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소. 광고 쪽에서 일을 해서 처음에는 아트 디렉터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나중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진했는데, 광고 일을 접은 뒤에는 자신에게 남은 세월 동안 매년,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소. <에브리맨> 14p

 

젊은 시절 그는 스스로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다. 매우 관습적인 데다 모험을 싫어해서, 미술학교를 나온 뒤에도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며 그림을 그리고 잡일을 하면서 들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쪽 - 사실 이것이 그의 은밀한 야망이었다 - 을 택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착한 아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보다는 부모의 소망에 부응하여,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고, 안정된 생계를 위해서 광고계에 진출했다. <에브리맨> 38p

 

그는 예순다섯 살이었으며, 막 퇴직을 했고, 이제 세번째로 이혼한 상태였다.(중략) ...하루의 남은 시간은 거의 모두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오랫동안 참아온 야망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에브리맨> 70p

 

<에브리맨>은 주인공의 꿈이 세월과 함께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등학교 시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충동으로 태동된 꿈은 젊은 시절 은밀한 야망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퇴직후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그림을 그리며 보낼 수 있게 되는 열매를 맺게 된다. 주인공의 삶은 박수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유일하게 박수 쳐 줄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오랫동안 참아온 야망'을 실행에 옮긴 그 장면이다. 도전하는 것이 두려워 안정을 택했다가 65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원하는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 뭐 그렇게 박수받을 일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난 꿈을 이뤄낸 자들-이룬 시점과 관계없이-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을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

 


그러나 그는 그림이 지겨워졌다. 오랜 세월 그는 퇴직이 자신에게 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긴 시간을 그림에 바치는 꿈을 꾸어왔다. <에브리맨> 107p

 

나는 내가 갖춘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온종일 그림을 그리는 꿈을 이룬 주인공이 그림이 지겨워졌다니. 이런, 뭐가 잘못된 걸까. 고등학교시절의 주체할 수 없었던 충동이, 젊은 시절의 은밀한 야망이, 결국 현실이 된 꿈이 그는 왜 지겨워졌을까? 그것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잔뜩 긴장하며 결승전 상대를 기다리던 권투선수가 상대의 기권으로 챔피언이 된 기분, 바로 모험없이 꿈을 이룬 자가 느끼는 지루함이 아닐까?

 

갑자기 그는 무(無)에 빠져버렸다. 무라는 상태만큼이나 '무'라는 말소리에 빠져 길을 잃고 표류했다. 그러면서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모험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에브리맨> 108p

 

또 하나, 꿈이 지루해진 이유는 꿈이 목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아닐까? 삶이 다하는 노년의 한 순간까지 활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꿈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꿈의 목적이 분명해야만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냥 그대로 목적없는 나날들을 지나 종말에 이르는 것은 비참하다.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에브리맨> 167p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생각난다. 현역시절보다 퇴임후 더 역동적인 활동을 하는 대표적인 노인이다. 1924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88세다. 퇴임후 30여년간 사랑의 집짓기 운동, 세계 인권 향상, 국제분쟁 조정 등에 공헌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재임시절보다 퇴임후 더욱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다. 이따금씩 북한 문제와 관련, 평양을 방문한다는 카터 대통령의 기사가 들려올때면 나는 그 분의 해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해군 제독과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토록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된 이유를 난 그 일화에서 찾는다. 평범한 사람이 특별해 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이 지루해지지 않으려면 젊은 날 삶을 살아가는 좋은 지침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이고.

 

나는 핵 잠수함 계획 부대의 배속을 지원했고, 그 일로 릭오버 장군과 면담하게 되었다. 내가 릭오버 장군을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우리는 두 시간 이상을 단둘이 큰 방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내게 가장 토론하기 좋아하는 주제를 택하도록 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 그 때 가장 잘 알고 있는 주제들 즉, 시사 문제, 해군의 생활, 음악, 문학, 해군 전략, 전자, 사격술 등을 택했고, 그는 점점 어려운 질문들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런 질문을 통해서 그는, 내가 선택한 주제들에 대해 그에 비해서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내 눈을 계속해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몸은 금방 땀으로 흠뻑 젖게 되었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고, 나는 '이제야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몇 등이나 했나?"라고 그가 물었다. 애마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신입생으로 들어오기전에 죠지아 공과 대학에서 4학년을 마쳤기 때문에 내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그래서 나는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820명 중에서 59등을 했습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참 잘했다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결코 듣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자네 최선을 다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네! 제독님."이라고 말을 시작해 놓았는데, 내가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과 사관학교에서 우리의 동맹국, 전국, 무기, 전략 등등에 대해 배우던 것을 기억해 보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간신히 숨을 들이쉬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면담을 끝맺으려고 의자를 돌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질문, 아니 대답할 수 없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나?"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마 동안 부들부들 떨면서 앉아 있다가 천천히 그 방을 빠져 나왔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120-121p

 

 

이야기가 엇나갔다. 다시 <에브리맨> 이야기를 계속하자. 소설 속 등장인물 중에는 주인공의 딸 낸시가 있다. 오랜 꿈을 이루고도 그림을 지겨워하고 갑작스런 무(無)에 빠져들어 혼란스러워하는 노년의 부친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낸시는  내 눈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보인다. <에브리맨> 주인공이 종말까지 누린 축복이 바로 낸시다. 꿈이 우리를 다시 출발선에 세울때마다 멀리서라도 응원가를 불러주고 깃발을 흔들어줄 가족이 있다면, 친구가 있다면, 직장동료가 있다면 그가 바로 우리의 낸시다. 

 

"아버지는 지금 잠깐 좌절하신 것뿐이에요. 그냥 그런 거라고요. 아버지는 훌륭한 화가예요. 저는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훌륭한 화가인지 아닌지 알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저예요." <에브리맨> 110p

 

삶이 다할때까지 꿈을 향해 떠나지 않는 건 나를 외면하는 일이다. 꿈은 오늘도 내게 진실을 묻는다. 너는 누구냐고, 너 아닌 무엇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현실에 머물려는 나에게 손짓을 한다. 나는 두렵다. <에브리맨>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살다 병들다 늙어 죽을까봐. 나는 꿈꾼다. 꿈으로 가는 모험 속에서 얻을 많은 것들을.  

 

<에브리맨>에서 꿈을 만나다니, 버스에서 옛 친구와 마주친 느낌이다.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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