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전집 양장 세트 - 전9권 (2판) - 일러스트 500여 컷 수록 셜록 홈즈 시리즈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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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왓슨


왓슨, 지난 한 주 잘 보냈나?

나는 생각이 많은 한 주였네. 그건 자네가 지난 주 내 사무실에 왔을 때 불쑥 던진 한 마디 말때문이라네.

자넨 요즘 SBS 수목 드라마 <싸인>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했네. <싸인>은 자네나 나나 흥미롭게 여길만해. 범죄가 일어나고 수사가 진행되지. 최첨단 현대과학을 총동원해 범죄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재구성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네. 자네는 내게도 <싸인>시청을 강력하게 권하지 않았나. 그뿐아니라 자넨 마치 추리물이라는 장르의 매니아인양 2007년부터 방영되어 작년(2010)말 시즌3이 종영된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최근 많은 과학범죄추리물의 원조격으로 2000년 미국을 뒤흔든 드라마 CSI 시리즈, 만화를 원작으로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 이르기까지 쉬지도 않고 한참을 떠들었다네.(미안하네, 내겐 그저 자네가 수다를 떠는 걸로 보였네. 뭔가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게 장장 1시간 정도를 혼자서 즐겁게 떠들더니 무슨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서서 외투를 챙겨들었네. 평소 자네같지 않았네. 왓슨, 자네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네. "홈즈, 우리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잊진 않았겠지. 그 말을 할 때 자네 얼굴에는 1시간동안 즐겁게 떠든 사람의 웃음기라곤 없었네. 그건 말이야. 최정상을 구가하던 운동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해 주목받고 있는 신인 선수를 잔뜩 칭찬한 후 쓸쓸하게 뒤돌아서는 모습같았네.

나의 생각 많은 한 주가 그렇게 시작됐네. 사랑하는 친구에게 위로가 될 말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네. 진심으로.

왓슨, 우린 1887 <주홍색 연구>에서 스템포드 군의 소개로 처음 만났지. 베이커가 221B번지 하숙집에서 무려 123년이나 보냈네. 물론 자네는 결혼후 거길 떠났지만 말이야.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군. 세상이 많이도 변했고. 더군다나 자네가 말한 걸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활동하는 미디어의 환경은 상상할 수 없이 달라졌네. 우리는 장편 4편과 단편 56편에서 지면(책, 잡지)상으로 활동했지만 지금 인기를 누리는 추리물의 인물들은 화려한 영상을 동반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네. 물론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이야기도 200여편이 넘게 영화로 제작되었네.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왓슨,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이러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네.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게. 셜록 홈즈 시리즈의 불멸의 이유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하니까 말일세.

왓슨, 스킬(미디어)은 스토리를 이길 수 없네. 지난 120여년간 셜록 홈즈 시리즈라는 추리물은 하나의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했네. 이집트의 번영이 무엇때문이었나? 나일강이 만들어 놓은 비옥한 땅들 때문이었네. 기름지고 비옥한 토양없이 어떻게 울창한 삼림과 풍성한 먹거리를 기대할 수 있겠나? 우리가 퇴적해 놓은 60편의 작품은 지금 수많은 추리문학 작품들뿐 아니라 현대의 다양한 추리콘텐츠의 서식지가 되었다는 걸 기억하게. 스킬은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 수 없네. 하지만 스토리는 또 다른 스토리를 잉태하는 자궁이 되네. 우리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거라는 말일세.

사람들이 짧은 기간동안 관심을 가지고 열광하는 드라마, 영화같은 것에 좀더 관대해지게. 또 요즘 인기를 누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물에 등장하는 가가 쿄이치로 같은 초짜들에게도 등을 두드려주는 여유를 가져보게. 시리즈가 세상에 나온 지 이제 고작 10년째고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물을 쓰기 시작한 것도 20년밖에 안됐네. 그리고 말이야, 10년 넘게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영화가 있던가? 없네. 급속도로 대중의 마음을 장악한 그 작품들-어떤 콘텐츠이건-은 바로 그 속도만큼 빠르게 다른 인물과 콘텐츠로 대체되며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네. 현대의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은 하나의 콘텐츠가 장기간 대중과 동거하는 걸 원치않네. 다행히도 우리는 19세기말에 대중과 만나 이토록 장기간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지만 말이야. 그러니 선두에 서는 것이 앞서가는 것이 아닐세. 중심에 있어야 앞서 가는 것이지.

그리고 말이야, 왓슨. 어떠한 형태로든 추리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자네와 나를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네. 드라마 <싸인>이나 <별순검>, CSI시리즈를 시청하든, 만화 <명탐정 코난>을 보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읽든 마지막에는 반드시 셜록 홈즈라는 인물을 만나려고 할 걸세. 결국 그건 등산로만 다르고 정상은 동일한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네.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21세기의 소년이 결국 1960년대 비틀즈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듯이 말이야.

우리를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하던 시도도 있었네. 말하기도 부끄럽고 기억하기도 싫지만 말이야. 제일 어처구니 없었던 것은 바로 우리를 세상에 소개한 코난 도일 경이 무려 8년 동안 우리와 세상의 관계를 끊어버렸지. 자네도 생생하게 기억할 걸세. 1983년부터 1901년까지는 셜록 홈즈 시리즈 120여년의 역사상 암흑기였지. 도일 경이 그런 오판만 하지않았더라도 자네와 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이 소개됐을텐데 안타깝구만. 우리를 살려낸 건 독자들이었네. 작가를 뛰어넘는 명성을 얻게된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많지만 그 어떤 인물도 우리의 그것을 따라올 순 없을걸세. 우린 1901년 <바스커빌 가문의 개>로 부활했네. 그때의 감격이라니.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오는구만. 왓슨, 작가도 우리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순 없었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불멸하는 이유는 CSI 시리즈가 최첨단 컴퓨터와 과학 장비를 동원하고 여러 사람이 업무를 분담하는 집단적 사건 해결을 보여준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는 한 인간의 관찰과 직관이 얼마나 뛰어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언제나 사소한 생활 속의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다룸으로써 강력하고 잔인한 현대의 추리물들-특히 미국 추리범죄 드라마들-에는 없는 향수와 낭만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네. 19세기 낭만의 향기는 현대 자본의 냄새를 환기시킬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라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우리가 사용했던 마차, 전보, 기차, 지팡이, 확대경 같은 것들을 무척 그리워하게 되지. 그것 역시 산업과 자본의 세계에 편입되고 있지만 말이야.

논리적인 사람은, 바다를 보거나 폭포 소리를 듣지 않고도 한 방울의 물에서 대서양이나 나이가라 폭포의 가능성을 추리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인생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사슬이 되고, 우리는 그 사슬의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추론 및 분석의 과학은 장기간의 끈질긴 연구를 통해서만 익힐 수 있고, 유사한 인생살이에서 그것을 최고도로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난해한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측면에 눈을 돌리기 전에, 보다 초보적인 문제에 통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게 좋다. 타인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역사와 직업을 첫눈에 알아보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그러한 연습이 철없는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관찰력을 기르고 어디를 보고 무엇을 찾아야 할 지 알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의 손톱, 코트 소매, 구두, 바지 무릎, 엄지와 검지에 박힌 못, 표정, 셔츠 소매......, 이러한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상대의 직업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관찰자가 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추리에 실패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셜록홈즈 전집1 <주홍색 연구> 32-33p

(전략) 전에 내가 한 말 기억나나? 기기묘묘한 것을 찾으려면 삶 그 자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인생은 항상 그 어떤 상상보다 더한 것을 보여준다고 했던 것 말일세. - 셜록홈즈 전집5 <빨간 머리 연맹> 49p


왓슨, 자네가 얼마만큼 내 말에 수긍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고전적이며 낭만적인 우리 이야기의 생존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전혀 없네. 오히려 더 나은 스킬을 통해 우리의 스토리가 담겨질 뿐이지.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개역개정 요한복음 1장 1절


종교적으로 해석한 건 아니지만 우리와 관련지어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볼 때 말은 창조의 근원이지. 창세기에 따르면 신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했으니까. 인류에게 스토리를 구성할 말과 글이 있는 한 우리는 죽음을 염려할 필요가 없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밤을 지세울 추리물을 찾고, 또수많은 추리작가들이 새로운 추리물을 창조해내고, 최첨단 미디어가 수많은 추리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한 우리의 왕국은 영원하며 우리 또한 영생(永生)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하하.

이제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고 자네가 문학의 대륙 끝에서 성공적으로 간척한 땅, <셜록 홈즈 전집>을 하나 하나 다시 읽어보도록 하게.


홈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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