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해떨어진뒤, 샤콘느를 듣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란 자극적인 수식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곡을 들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 마음 한 자락 흐트러짐 없는 사람을 매너는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이 곡을 같이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매너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속을 헤집어 놓는 바이올린의 애잔한 음색 때문에 한 자락 그늘이 얼굴에 드리워질것이기 때문이다. 샤콘느는 혼자 들어야 하는 곡이다.

울고 싶을 때 듣는 곡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매너다. 나를 울게 하는 곡과 나 대신 울어주는 곡.

 단조 가락의 처연한 아름다움이 나를 둘러싼 공간에 은은하게 흩뿌려지면 아픈 마음 한 자락을 그로 인해 다시 돌아보게 된다. 어느 감정의 선. 을 넘지 않는 선율을 통해 슬픔을 다시 마주하고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되는 거다. 그런 게 '나를 울게 하는 곡'이다. 언제가 될련지는 모르고, 그런 일이 없는 게 행복한 일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슬픈 뒷모습을 지켜봐야할 일이 생긴다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2번 중 메뉴엣을 나직이 걸어둘게다. 두 번째 메뉴엣 선율이 시작될 때 즈음, 그사람의 어깨가 조금씩 움직일지도 모르니, 손을 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대신 울어주는 곡'은 다르다. 처절하고도 치열하게 슬픔을 터뜨리고 가슴을 쥐어짠다. 그 극단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서면 나의 슬픔은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슬픔 쪽에 몰려있는 내 안의 감정이 선율의 슬픔으로 몰리는 탓에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거다. 비탈리의 샤콘느는 그 중에서도 나 대신 가장 처절하게 울어주는 곡이다.

얼마 전 서양고전음악을 듣고 싶다는 어느 서재 쥔장에게 편집CD한 장을 구워보낸 적이 있다. 곡명과 작곡가, 연주자의 아우라에 주눅들지 말고 음악 자체로 받아들이는게 더 좋겠다. 라고 생각한 매너는 역부러 모든 음악 파일의 제목을 지웠다. 대신 간단한 한 줄 평가를 파일제목으로 삼고 그에 따라 분류했다. 그렇게 분류된 폴더 이름 중에는 '울고싶을때'가 있고, 그 폴더 안에는 아홉 개의 파일이 있다. 이런 식이다.

눈물이 흐르네.mp3
속으로 통곡하기_넷.mp3
속으로 통곡하기_둘.mp3 
속으로 통곡하기_셋.mp3 
속으로 통곡하기_하나.mp3
우아하게 울기.mp3
울음 참다가 한방울 흘릴때.mp3
참고 참다가 터뜨리기.mp3
천천히 울기.mp3

속으로 통곡하기. 라는 곡의 정체가 비탈리의 샤콘느다. 하나 둘 셋 넷. 이라는 숫자를 붙였던 건 동일한 곡을 여러 개 집어넣은 까닭이다. 눈물. 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젖어있는 곡, 가장 먼저 떠올랐던 곡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연주 모두, 나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샤콘느의 처절하고 비통한 정서로 축축하게 젖어있지만 그 양상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인간 같지도 않은 처절함. 이라는 말 이외에 설명 방법이 없는 하이페츠의 귀기서린 소리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그의 제자였던 유진 포더는 하이페츠의 소리를 조금 길게 늘여놓고 귀기를 조금 빼면 된다. 지노 프란체스카티는 오래된 녹음 탓일까. 모나지 않게 젖어 있다. 정호진의 연주는 드물게 피아노가 반주를 맡고 있는데 여리고 나긋나긋한 톤이, 긴머리 소녀가 숨죽여 흐느끼는 모습이 눈앞에 비친다. CD를 굽고 나서 생각이 나서 아차. 했던 장영주는 선이 가늘어 마음을 덜 긁지만 듣기엔 편안하다.

역부러 낮술을 피하지 않고 주억주억 모두 받아마셨다. 지난 보름간의 치임과 혼란, 그리고 최악의 결과에 대한 너머의 속사정을 알게 된 오늘 오전, 제정신으로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걸 보니 아직 매너는 청년. 은 커녕 소년에서도 한 발자욱 물러서 있나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직장 상사와 선배들과 박수를 치며 술을 마시다 맥주병을 부여잡고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을 부르짖었다. 그렇게, 해 넘어가기도 전 만땅재 돌아와 쓰러져 한 시 너머 눈을 떴다. 냉동실을 열어 본 다음에야 지난주 집들이때 접대 반찬으로 북어포 양념구이를 하느라 북어 다 써버린 걸 깨닫고 쓴웃음진 매너는 쓰라린 빈 속이 저어하여 동네 편의점에 쓰레빠 끌고 사발면과 간식거리를 주워온다. 새벽 두어시 사무실에 내려와 무선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사발면 껍질을 뜯고 냉동실에서 꺼낸 파 쪼가리와 다진마늘을 사발면 속에 던져넣는 와중에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온다. 여적 어질어질한 정신에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다시 마음 쓸어내리며 되뇌인다. 여기서 눈물 흐르면 정말 소년이 된다. 그렇지만 울고는 싶고. 그래서 이르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새벽이 허용하는 한도의 볼륨을 키우고 샤콘느를 풀어놓는다. 하이페츠의 귀기서린 소리가 매너 대신 통곡을 하며 날 선 비명까지 질러댄다.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날 선 소리. 그래. 정말 가끔씩은 그런 게 필요하다.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소리가. 두 눈으로 본 것만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두 내 손에 달려있다고 매일같이 되뇌이는 매너지만, 성장통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는 진통제 정도는 초월적인 동네에서 빌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날이 밝아온다. 오늘도 주말근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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